지난 7월 5일
유월 하순경부터였다.
불쑥불쑥 두려움과 불온함이 혼재된 찝찝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며칠 그러다 말겠거니 했으나 파문은 갈수록 확산돼 갔다.
대지진을 예언한 일본 만화에서 촉발된 풍문에 더해, 30년 내에 대지진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 대비책을 강구중이라는 일본 정부의 발표까지 나오면서다.
‘7월 일본 대지진’ 설이 비로소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7월 5일 대재앙의 날이라는 뉴스 기사까지 떴다.
일본은 물론 한국과 중국 SNS 등을 떠들썩하게 했던 '7월 대재앙설'의 대지진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자마자 시애틀에서 리히터 규모 6.8의 지진을 만났다.
시차 적응이 겨우 될까 말까 한 시점에서다.
황당감 속에서의 몇 십 초 간, 험한 제트기류에 든 비행기 같댈까.
폭풍의 바다 한가운데에 뜬 작은 배 같댈까.
미친듯한 난폭 운전자가 모는 자동차 같댈까.
막무가내로 뒤흔들어대던 대지가 심하게 진저리 치듯 부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흔들림이 멎었다.
얼마간 멀미하듯 속이 다 울렁울렁 메스꺼움이 가시질 않았다.
그나마 콘크리트 건물이 아닌 목조주택에 머무렀던 점이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지진을 겪고 혼비백산한 우리는 시애틀에서 동부 뉴저지로 자리를 옮겼다.
뉴저지에서도 경미한 지진을 겪었다.
2011년에 규모 5.9의 지진이 수도인 워싱턴 D.C를 흔들었을 때 그 여진은 뉴저지까지 영향을 미쳤다.
아침나절 창문이 흔들거리며 벽에 건 액자가 떨어지자 기분 나쁜 진동이 지진임을 직감했다.
청소를 하려고 열어둔 현관문을 통해 냅다 밖으로 달려 나갔더니 집집마다 놀라서들 뛰쳐나와 있었다.
비교적 자연재해로부터 자유롭다는 동부인데 세 시간 거리의 D.C에서 발생한 지진 여파로 식겁을 했다.
제주에 와서 이듬해 겨울, 지진 발생지 가까이에 서있었던 적이 있다.
동백꽃을 사진에 담고 있는 중에 재난 알람이 긴박하게 삑삑거렸다.
놀랍게도 서귀포 서남쪽 인근 해역에서 지진이 났다고 했다.
과히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는데 아예 지진 난 줄도 몰랐으니 밖에 나왔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알람 소리를 확인하고 난 직후부터 육지에 사는 지인들로부터 전화가 바리바리 왔다.
밖에 있어서 지진난 걸 알지도 못했다고 하니 하나같이 다행이라고 했다.
옆집 현주씨는 퇴근해 옷 갈아입다가 빌딩이 휘청이는 바람에 너무 놀라 급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고 했다.
올레길 도반인 헬레나씨는 식당에서 저녁 먹던 도중 테이블이 흔들려 깜짝 놀랐다며 괜찮으냐고 물었다.
이처럼 고약한 지진을 이미 경험해 본 터라 일본 지진 소식에 유별나게 예민해진 것일까.
트라우마까진 아니라도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면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의 간극이 큰 듯.
만약 지진이 오면? 일단 밖으로 나와 건물이 없는 공지에 있어야 안전하다는 걸 체득한 바 있다.
'땅에 엎드리고(drop), 숨어서(cover), 60초간 기다리기(hold on)'재난대비 훈련도 받아봤다.
지진은 불시에 기습적으로 찾아온다.
첨단과학기술로도 지진 발생 일시와 장소, 강도 등의 예측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지진이란 자연재해가 한층 더 불안하고 겁이 날 수 밖에 없다.
거대 단층을 품고 있는 난카이 해곡은 태평양 판과 유라시아 판이 만나는 경계 지점에 길게 형성돼 있다고 한다.
과거부터 100-150년 주기로 규모 8∼9급 대형 지진이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단다.
실제로도 일본 가고시마 남쪽 해역에서 근자 들어 진도 5 이상의 지진이 빈번하게 일어나 우려를 증폭시켰다.
지진의 여파로 밀어닥치는 거대 쓰나미는 뭍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힐 것이라 했다.
한국 지질학자들도 일본에서 언제 대지진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반응이라 긴장감은 더욱 고조됐다.
난카이 해구에서 규모 8.0 지진이 난다면 1000㎞ 내에 있는 한반도 전역의 고층 건물이 영향을 받는다니.
고작 500㎞ 떨어진 서귀포라면 파급효과는 엄청 더 커질 것이 뻔하다.
몇 월 며칠 ‘휴거’로 세상 종말이 온다고 떠드는 이단의 주장은 헛된 낭설로 치부했으면서도 이번은 달랐다.
그날, 여전히 아침은 밝아왔다.
아무래도 마음이 묵지그레, 불안감이 스멀댔다.
해도 없으면서 후덥지근한 날씨인 데다 구름 낀 하늘엔 생뚱맞게시리 한라산에 흔한 까마귀까지 내려와 깍깍, 불길한 징조 같았다.
연출 효과 제대로 살린 완전 공포 분위기 컨셉이다.
아무리 긍정적 사고로 전환하려 해도 대재앙이란 단어가 뇌리에서 뱅뱅 돌았다.
만일 12층에서 재난을 당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일찌감치 물과 요깃거리를 배낭에 챙겨 넣고 일단 피난처 삼은 비자림으로 내뺐다.
비자림 입구 양쪽엔 내 머리통보다 큰 수국꽃이 소담스레 열을 지어 피어있으나 폭염으로 시들거렸다.
그늘숲 시원해서인지 비자림은 꽤 많은 방문객들이 평화로이 오갔다.
진종일 숲을 즐기며 놀다가 여섯 시 문 닫는 시각에 나와 세화바닷가로 갔다.
저물녘이라선지 파시처럼 해변은 텅 비어있었고 청년 몇이서 함성 지르며 물놀이에 신이 나있었다.
아예 처음부터 아쿠아슈즈를 신고 왔기에 물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다 해가 완전히 져서야 나왔다.
세화 버스 정류장에서 막 차를 기다리는 데 바닥에 새똥이 하얗게 깔려있기에 가로수 위를 올려다봤다.
그래도 제주라서 예전처럼 깃들 수 있는 집 추녀가 흔했던가.
어디서 새끼들 부화시켜 왔는지 다 자란 제비 떼 나뭇가지와 전선줄에 분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오랜만에 제비떼를 만나자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며 대지진 걱정도 시나브로 잊혀졌다.
두 시간 넘는 밤거리를 달려 늦게 귀가, 내내 밖에서 고단하게 지낸 덕에 샤워 후 잠은 쉬 들었고 숙면에 빠졌다가 오늘 아침을 맞았다.
이 날만 피해서 될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기나긴 하루였던 5일은 그렇게 무탈히 지나갔다. 2025/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