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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4. 2024

글과의 인연

지난 81년 어느 봄날. 대문을 밀치고 바쁘게 들어온 열 살짜리 큰 아이가 담임교사의 메모를 전해줬다. 내용은 KBS 대구 방송국이 주최하는「엄마와 함께 어린이 실기대회」에 참가해 달라는 통보였다. 아이는 사생대회, 엄마는 백일장에 참여하도록 짜여 있으며 망우공원에서 실시되는 봄 행사란다. 두 돌 지난 막내에게 라일락빛 원피스를 입히고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서 소풍삼아 참석했다.



망우공원은 그날이 초행이었다.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에 아직 떼도 엉성했고 그늘조차 변변치 않았다. 그날따라 바람이 몹시 불어 인근 과수원에서 농약 냄새가 심하게 날아왔다. 아이는 분분한 먼지에도 개의치 않고 열심히 과수원 풍경을 그렸고 나는 백일장 시제 중 <고향>을 택해 글을 써 내렸다.



때는 마침 무르익은 봄. 우리 집 담장에도 덤불진 찔레가 한창 향기로웠으며 등꽃은 보랏빛 주렴을 너르게 드리우고 있었다. 망우공원 이웃에는 만발한 아카시아 오동꽃이 더불어 감성을 자극했다. 어디 그뿐인가. 꽃 못지않게 신록 아름다운 산과 들. 푸르른 생명력이 충만해 있는 삼라만상 모두 찬란히 빛나고 있었으니, 그 속에서 유년의 그리운 고향 이야기는 절로 풀려 나왔다. 제대로 형식을 갖추지 못한 비록 미숙한 작문 수준의 글이긴 하였지만. 당시 원고지 쓰는 법도 알 턱 없는 채로 그래도 제 신명에 겨워 몇 장을 채웠다. 중등학교를 다닐 당시 특활시간에 문예반 활동을 하긴 했다. 교지에 시를 발표한 적도 있긴 하나 시골학교를 다녀 실제 원고지 사용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주로 이면지를 연습장 삼아 낙서나 끄적거린 게 고작이었다.



어쨌든 참으로 오랜만에 써본 글이건만, 생각을 깊게 모아 볼 새도 없이 펜이 먼저 술술 앞질러 나갔다. 필연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그렇게 하여 글과 나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얼마 후 모자가 똑같이 입선 통지를 받았다. 모처럼 쓴 글이 선에 들었다는 것이 어리둥절하면서도 신기했다. 시상식 날, 물빛 깨끼 한복을 차려입고 기분까지 날아갈 듯하였으니 역시 상이란 좋은 것인지.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낯선 전화를 받았다. 이전에 결성돼 있는 백일장 입선자 모임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를 묻는 전화였다. 이후 나는 <오월회>라는 글모임에 동참해서 매월 숙제로 한 편의 글을 써냈고 한 해에 한 권의 동인지도 엮어냈다.



내 글이 들어 있는 책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의 감격과 흥분은 아직도 기억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겨우 줄 글의 모양새 정도나 갖춘 글임에도 과분하게 수필 반열에 올려져 대접을 받게 되는 파격이 놀라워서였던가. 습작기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상태라 과연 그 글이 수필에 근접해 있는가를 살펴볼 안목도 기르기 전이요, 나름대로 숙고해 볼 짬도 없이 자기도취에 먼저 빠진 셈이다.



나는 그때나 이제나 다작 체질인 데다 자꾸만 고여서 넘치는 물길을 주체할 길이 없어 쓰고 또 쓴다. 기실 당시의 나는 어느새 자기 글이 활자화되었을 때의 각별한 기분을 알고 있었기에 써놓은 글을 어딘가로 발표하고 싶었지만 지면은 한정있었다. 그 무렵 대구에는 이렇다 할 문학동아리가 없던 터라 오월회는 비록 아마추어 모임이지만 지역에선 꽤나 인지도가 높은 단체였기에 아무 데나 마구 글을 투고하기도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결국 동인 활동은 좋은 점도 있는 반면 구속 아닌 구속감도 주었다. 보다 자유롭게 훨훨 나래를 펼 수 없는 일종의 제약이기도 한 셈이다. 그저 매일신문의「주부 수상」이란 지면을 활용하는 게 고작이었으니 매양 글은 원고지 일곱 장 수준에서 틀이 고착돼 갔다.



84년에 우리는 대구를 떠나 부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부산은 생판 낯선 곳이었다. 별다른 연고도 없고 친구조차 한 명 없는 타향 객지였다. 바다가 보이는 집에 살면서 마음에 큰 돛 하나 올리고 혼자 마냥 떠돌아다녔다. 새로이 시작한 일은 고전을 면치 못했으니 곤비한 나날이었으나 시간만은 지천이었다. 신문이 오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면은 물론 하단의 광고까지 모조리 훑어볼 만큼 할 일이 마땅치 않던 당시. 하릴없이 신문에서 물때표를 읽고 입출항 선박 이름을 보며 항구 도시로 옮겨 온 것을 거푸 실감하곤 했다.



그즈음에 꽤 많은 책을 접하게 됐다. 갓 중학생이 된 아들과 초등생 딸내미의 학교에서 도서대출을 받기도 하고 인근 도서관도 이용했다. 그러면서 읽은 책은 거의 빠짐없이 독후감을 써 두었다. 그것이 아마도 기본적인 문학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아웃사이더이자  풋내기인 나의 무질서하고 조악한 붓을 다듬어 나가게 한 추진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글감은 무수했다. 도처에 널려 있는 게 글감 같았다. 바다라는 새로운 소재에 도취되기도 하고 일상생활 속의 단상을 엮어 내기도 했으며 더러는 고단한 마음의 회포를 풀고자 끄적대기도 하였다. 때로는 폭포이듯 용출하는 기세 그대로를 한껏 풀어놓았다. 마그마처럼 뜨거운 내적 감흥과 아울러 지하수처럼 투명한 정서를 적절히 어우러지도록 버무려 나갔다. 그렇게 완성된 글은 여성지며 신문사 등에 계속 투고를 했다. 백일장도 놓치지 않고 참석했다.

그즈음 날마다이다시피 참 많이 쓰고 발표도 자주 했다. 익명의 자유,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은 홀가분함을 만끽하면서. 실제 그런 방식으로라도 내 글에 대한 평가와 검증을 받지 않는다면 무슨 진전이 있겠는가. 문화센터 혹은 창작 교실 등이 생기기 한참 전이다 보니 체계적으로 문학 수업을 받을 자리도 전무했던 터다. 그렇다고 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며 따로 정해 놓은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사사하는 입장도 물론 아니었다. 결국 내 글의 수준을 가늠해 볼 방법으로 택한 것이 여기저기로의 투고였다.



부산에 내려와 살면서 맘껏 자유로이 글을 썼던 그때가 어쩌면 내 나름대로의 문학수업 시절이 아닌가 싶다. 시로 출발해 시조로 이동했다가 수필과 동화도 집적거렸다. 우물 안 개구리 격일지라도 다작을 통해 내 글은 차츰 연마돼 갔고 스스로 「문학론」「수필 창작」등을 찾아 읽으며 수필의 의미를 조금씩 깨우쳐 나갔다. 취약한 점이 많은 혼자 공부이다 보니 맞춤법이 아리송하면 당연히 사전을 찾게 되어 사전과 가까이하는 습관이 배었다. 띄어쓰기가 모호할 경우 애들 교과서를 들춰보며 해결점을 찾았다.



수필은 예나 이제나 울타리가 낮다. 아무나 기웃거릴 수 있고 발 디딜 수 있는 데다 쉽게 손 이끌어 대접해 주는 덕에 각고의 노력 없이 87년 봄 등단을 했다. 막 서른여섯 중년 고개에 올라선 때였다. 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88년 엉겁결에 첫 산문집을 상재했다. 그렇다. 관대하고 마음씨 좋은 장르가 수필인가 하면 어찌 보면 인심이 너무 헤퍼 그 가치마저 평가절하되기도 하는 수필. 그와 인연이 닿게 된 십오 년 전의 오월 어느 날. 유년의 텃밭을 토양 삼아 대구에서 움튼 문학의 어린 순이 부산에 이르러 비로소 작은 꽃망울을 피워 올린 것이다. 지금의 내가 무엇보다 감사하는 일은 그때의 열 살 배기가 청년으로 바르게 자랐다는 것과 수필을 계기로 낯선 부산 땅에서 다수의 좋은 벗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글을 만나 나는 행복하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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