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 차지게 즐기다

by 무량화


처서를 함께 즐기자며 서귀포로 김 선생을 초대했다.

지난 주말 황선생과 금토금토 축제가 열리는 밤의 새연교를 구경하다 불현듯 그녀가 생각났었다.

부산 집과 신창 집을 오가며 지내는 그녀는 올해 팔순.

서귀포의 진수만을 골라 한턱 쏘고 싶었던 거다.

대정에서 만나 흑염소탕으로 거하게 식사를 한 후 서귀포로 와 법화사 백일홍을 보러 갔다.

배롱나무 꽃은 겨우 피기 시작하는 중이고 너른 연당의 연잎만 무성히 너울거렸다.

여기저기 늘씬하게 솟은 실한 연실(연밥)도 보였다.

땡볕 이글거리는 한낮이라 서둘러 거처로 와 폭포수 맞을 준비를 하고 정모시 쉼터로 해서 소정방폭포로 내려갔다.

하늘빛 유달리 청푸르렀고 여전히 찌는 듯 무더운 날씨, 폭염경보도 내려진 상태였다.


지난번 된통 나자빠지게 했던 대웅전 옆 사고현장 텐트, 이날 비로소 더 호되게 다치지 않은 건 부처님 크신 가피임을 깨닫다.


무더위 속에서라야 얼음같이 차가운 폭포수 맞기에는 안성맞춤.

주말이라 소정방폭포를 찾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폭포 아래 투명히 맑은 바다에서는 스노클링 하는 젊은 이들도 꽤 있었다.

관광객들도 연달아 폭포 옆 층계를 오르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타인 시선 구애받을 연배도 아닌 용감한 우리다.

우비를 덧입고 조심조심 폭포수 아래 섰다.

짜릿하게 전신을 난타하는 용천수 물줄기.

눈도 뜰 수없이 마구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에 머리며 어깨 등판과 허리 골고루 맘껏 마사지를 받았다.

날씨가 좋아 폭포 주변에는 수시로 무지개가 떴다.

폭포 테라피 하기에 더없이 좋은 일기라 우린 거푸 세 탕이나 물맞이를 했다.

그렇게 더위를 충분히 식혀준 다음 소라의 성에 들러 전망에 취했다가 정방폭포 거치고 자구리 해안 따라 서귀포항으로 걸어 내려갔다.

한 시간 조이 걷는 동안 일부 젖었던 옷도 마르고 해풍 선들거려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저녁놀 서서히 스며드는가 싶더니 천지연 다리를 건너는 도중 폭죽 팡팡팡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해가 무척이나 길다 여겼는데 어느새 밤.

멀리 새연교는 색색으로 변하고 밤하늘을 수놓으며 찬연히 명멸하는 불꽃들.

순간에 전생애를 살고는 산화해 연기로 스러지는 폭죽 여운이 새섬에서 자취 거뒀다.

서귀포 항 앞바다에 반사돼 일렁거리는 불빛까지 온데 환상적인 야경들로 꿈꾸게 하는 서귀포의 푸른 밤.

김선생은 소녀처럼 들떠 마치 해외 어딘가로 여행온 기분이라며 고맙다는 말 거듭했다.

나까지도 몽환적이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금빛 저녁, 베네치아의 밤거리, 아비뇽의 야시장 등이 줄지어 떠올랐다.

맞다, 진짜 좋은 건 나눠야 행복감이 배가되는 법.



지난주는 광복절 연휴 기간이라서 이벤트 그리 다채로웠던가?

그만은 못 미쳐도 새연교 불빛과 동그마니 뜬 범섬 옆에 줄 지은 고깃배만으로도 황감.

열대야 피해 나온 시민들과 혼연일체 돼 새연교 음악분수쇼 박자에 맞춰 고개 까딱댔다.

그리곤 새섬으로 가기 위해 새연교에 올랐다.

와아! 너무너무 시원해요, 새처럼 양팔 벌린 채 김선생은 감동 어린 탄성을 발했다.

해외 나들이 때 아니면 한국에서 이런 시간을 갖는다는 건 흔치 않은 편이다.

서울에서는 궁궐 야행 프로그램이 있었고 유성우 관찰 행사나 별밤 음악회 정도가 야외에서 행해질 뿐, 실제 한국의 밤문화를 주도하는 건 도심의 음주가무 아닌지.

그러니 우리 또래에게 이런 기회는 각별한 감흥으로 다가오는 건지도.

새섬의 반딧불이 길을 지나면서는 처음과 달리 빛의 홍수에 시달릴 나무들 생각하니 과유불급이다 싶었다.

해변 가까이 난 길을 걸어가는 데도, 일주 새 개구리 소리는 완전히 사라졌고 풀벌레 소리만 낭자했다.

과연 어느새 성큼 가을 초입에 다다른 듯.

일체유심조라 했다.

숲을 허물어뜨리며 장식해 놓은 기타 설치물도 낮에 보면 자연환경을 해하는 플라스틱 조형들일뿐이라 저으기 염려되는 면 많았으니 만사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우리는 두런두런 얘기 나누며 새섬을 한바퀴 돈 다음

새연교를 건넜다.

그새 축제의 장은 마감돼 파시처럼 사위 고요해졌다.

열 시 가까이 거처에 닿아 샤워를 하고 폰을 확인한 김선생이 오늘 2만보나 걸었네요, 놀라워했다.

하루 일정치고는 꽤 광폭행보를 한 처서날.

그 말을 비몽사몽 간에 들으며 노곤한 우리는 피차 단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