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지난 다음 날, 뉴저지에 사는 교우에게 전화를 했다. 그녀 어머니의 10주기가 되는 날이라서였다. 교포사목이 어렵다는 소문은 진작에 났었고 미주에서 크고 작은 사달도 실제로 일어났었다. 우리처럼 작은 공동체도 시끄러웠지만 뉴욕의 퀸즈성당 같은 대형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톨릭의 치부를 들춰내는 셈이나 한번은 정식으로 짚고 넘어가려 하는 문제, 일치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 불협화음의 발단은 대강 이러했다. 교회가 어딘가 모르게 술렁거린다했더니 서울에서 파견된 본당 신부님을 밀어내려는 음모가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순명을 거스르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암암리에 벌어졌던 것이다. 한국에서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미국 내 한인성당에 사제를 파견하는 곳은 한국 교구청이나 제반 규정과 제재는 미국교구로부터 받는 체제이다. 몇 해 전, 로마에서 공부하다 휴가차 친구가 봉직하고 있는 성당에 다니러 왔다가 그냥 미국에 주저앉은 젊은 한인 신부 하나가 있었다. 사제수가 절대부족한 미국 현지 교구청 소속으로 신분세탁을 한 그. 이후 바로 그 한인신부를 옹립하려는 사목회장의 농간으로 교회는 내분에 빠졌다. 이미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파견신부와 현지조달된 한인 신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일부 교우를 제외한 전 교우들은 교구청 처사에 저항하며 서울에서 파견된 신부님 미사에 참여했다. 새로 발령받은 젊은 신부님은 미사 집전 중 중요한 전례인 거양성체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양손을 높이 들어 올리지 못할 지경으로 경직된 어깨.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서였다. 침 치료를 계속 받아야 했다. 분규로 두쪽이 난 채 시끄러워진 교회는 결국 교구청으로부터 폐쇄조치가 내려졌다.
마치 조폭처럼 앞장서서 미사 집전 중인 신부님을 겁박하던 그들의 무도함이라니. 필라 소재 의대 방사선과 교수인 사목회장과 비즈니스로 크게 성공한 전직 회장은 다들 공교롭게도 신교에서 장로직분에 있었던 사람들로 구교로 온 지가 십여 년 되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파견된 본당 신부님은 바닷가 공소로 떠나게 됐다. 동부의 라스베이거스인 애틀랜틱시티였다. 교우 대부분은 그분을 따라 시간 반이나 걸리는 공소까지 모두가 한마음 되어 오갔다. 때론 평화시위나 침묵이 폭력보다 더 겁나는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리더가 달리 있었던 것도, 누군가가 호소하며 외친 것도 아니었다. 각자의 판단에 의거, 일치된 행동으로 뭉쳤다. 먼 거리 마다하지 않은 우리의 평화행진은 만 넉 달만에 마무리짓게 되었다. 모두들 마음 모아 간청했던 대로 서울 교구청에서 우리 신부님을 부르신 것. 그 사이 놀랍게도 폐쇄조치가 취해졌던 체리힐 성당문이 열리고 사목회장과 그들을 추종하던 몇몇 세력들이 규합하여 교구청에 있던 한국인 신부를 내세워 미사를 보기 시작하였다.
어이없는 교구청 처사와 기막힌 상황에 우리는 분노했고 서울에서 파견된 신부님은 결국 사람이 무섭다는 말을 남기고 미국을 떠났다. 우리는 공중에 붕 뜨고 말았다. 그렇다고 예전 성당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집 가까운 성당으로 각각 분산돼 다니던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한 곳의 미국성당을 정해 모이기로 하였다.
그렇게 모인 곳이 쟌다크성당(St. Joan or Arc Parish)이다. 처음부터 뜻을 같이 한 73명이 한자리에 함께 했다. 원래 성당 식구라야 110명이 못 되는 숫자였으니 근 70%가 우리와 뜻을 같이 하였다.
하얗게 눈이 쌓인 1월 9일 루시아 할머니의 장례미사가 잔다크 성당에서 엄수됐다. 할머니 뜻대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그분 가시는 마지막 길에 독서대에서 들려드렸다. 할머니는 떠나시면서 무언 가운데 우리에게 큰 선물을 남기고 가셨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라. 주님께서 다 문을 열어주실 것이다."
이민 와서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손끝 해지도록 청소일을 해 삼 남매를 길어낸 장한 어머니, 강 루시아 할머니의 장례미사는 우리의 처음 우려와는 달리 몬시뇰신부님의 집전으로 엄숙하고 장엄하게 치러졌다. 우리의 새 보금자리가 미국 성당 안에 둥지를 튼 것은 바로 그전 해 후반부인 9월의 일. 광야에서 유랑하는 우리 한인 커뮤니티를 쟌다크 성당에서 흔쾌히 소속 공동체로 받아주면서 신자 등록을 하고 명실공히 쟌다크성당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지 석 달만이었다.
여기 이르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언젠가 논픽션 소설로나 쓰여질까, 아직은 널리 펼 단계가 아니라고 본다. 하느님께서는 인과에 따라 양과 염소를 이미 구분해 놓으셨을 줄 믿으므로. 그것은 그분의 몫으로 전 과정의 흑과 백, 명과 암을 살피신 분이니 언젠가 때가 되었다며 이제는 자초지종 분명히 가려도 좋다고 하실 것이다.
아틀랜틱 시티 공소로 미사보러 다녔던 교우 및 미국성당에 흩어져 다니던 교우들. 함께 동참하기로 뜻을 모은 구월 이후, 우리는 한마음으로 쟌다크성당의 아홉 시 미사에 참례했다. 곧이어 하느님께서 11월 둘째 주일에는, 영어권이 아닌 나이 든 교우도 많은 우리의 고충을 헤아리시고 한국어 미사를 허락해 주셨다. 매월 두 번째 일요일 북부 뉴저지에서 한인 신부님이 내려와 집전하는 오후 4시 한국미사. 이 모두 감사하게도 예상외로 빠른 진전이었다.
모두들 감사하며 환호하며 그 기쁨을 나눴다. 그리 빠르게 한국미사의 문이 열리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두터운 은총 내려주심에 우리는 하늘의 크신 섭리 앞에 그저 감루를 흘렸다. 뜻밖의 은총에 감격하면서도 마냥 그 기쁨에 도취될 수만은 없었다. 산 넘어 산, 풀어야 할 숙제가 또 있었다.
공동체에는 연로한 분이 계신 데다 젊은이들은 노부모를 모시고 있었다. 언제 상사를 겪을지 모르는데 장례미사는 어떻게 하나, 말들은 아껴도 흉중이 무지근했다. 그 와중 겨울이 깊어가면서 루시아 할머니의 환우도 깊어져 갔다.
일에 매인 아들 내외 대신 병 수발을 위해 어렵사리 휴가를 낸 수녀님인 맡따님이 가정간호를 도맡았다.
그러나 휴가일정이 끝나가며 한국으로의 귀국날짜가 거지반 다가왔다. 당시 수녀님으로부터 영세자 교리공부를 받던 두 학생을 대동하고 할머니 댁을 자주 드나들던 우리 부부는 생명의 불길이 점점 사위어드는 할머니의 용태를 직접 느꼈다.
마지막 기름을 다 태우고 마침내 등잔불의 심지가 가물거리듯 불꽃은 흔들리며 약해져 갔다. 그럼에도 통증은 전혀 없었고 의식은 초롱했다. 다만 자리에 누워 눈을 뜨는 것마저 힘에 부친 듯 자꾸만 눈을 감으셨다. 우리를 북돋아 격려해 주시던 그분, 모든 것 다 하느님께 맡기고 앞만 보고 똑바로 걸으라며 음으로 양으로 힘찬 성원을 보내주시던 깐깐하신 어른. 우리가 한참 힘들 때 그 약하신 노인네가 우리 공동체를 위해 철야기도를 하시던 분이다.
1월, 세례축일 미사를 마친 후 교우들 여럿이서 할머니 댁을 방문하였다. 숨소리는 고르나 미약한 호흡, 맥박은 잡힐 듯 말 듯 희미했다. 할머니의 포개진 손에 쥐어진 윤기 나는 묵주가 자꾸만 가슴께로 흘러내렸다. 그분이 가장 좋아하신다는 묵주기도를 다 함께 염송 하며 우리의 간원도 더불어 바쳤다.
설 뒤끝이라 점심에 끓인 떡국국물을 두어 술 드셨고 교우가 만들어 온 식혜물을 달게 받아자셨다. 마침 85회 생신상도 조촐하나마 받자와 케이크를 앞앞이 권하기도 하셨다. 생일축하 노래와 평소 좋아하셨다는 마라나타 성가를 불러드렸다.'우리 주님 하늘 영광 온 땅 덮을 때 /우린 땅끝에서 주를 맞으리 / 마라나타 마라나타....'
수녀님의 연기받은 휴가 마감날짜가 임박해 있었다. 따님이 한국행 비행기를 타신 뒤 눈 감으시면 어쩌나... 내심 조바심이 났다. 한 시가 조금 넘어 우리는 할머니 손을 한번씩 잡아드리고 일어섰다. 오후 2시가 채 못되어 루시아 할머님 선종을 알리는 전화가 왔다. 왜 그 순간 하느님 감사합니다, 가 저절로 터져 나오며 깊이 고개 숙여 합장하였는지..
쿡 받치는 슬픔이기보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앉았다. 평화로운 임종이었다고 한다. 말치레가 아니라 평소 올곧게 사시며 기도로 양식을 삼으신 그분이야말로 당연히 그리 됨이 마땅하리라. 맏따님의 간곡한 기도와 지성스러운 보살핌 속에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내시며 행복했을 할머니.
전 교우들에게 연락이 닿아 검정 옷차림끼리 어깨를 비비며 촘촘히 끼어 앉아 "제 잘못을 말끔히 씻어주시고 제 허물을 깨끗이 없애주소서~'연도를 바치고 돌아오는 길. 밤하늘 가득 푸덕진 눈발이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겨울이라도 그처럼 탐스러운 눈송이는 흔치 않았는데 참으로 특별한 밤이었다. 흰 눈송이송이들은 마치 오늘 불러가신 영혼을 하늘이 축복하는 듯하였다. 동시에 할머니의 영혼이 우리 모두의 어깨를 부드러이 감싸주는 듯 느껴졌다.
루갈다 할머니가 선종하시자 리치신부님께 연락을 드렸다. 응당 장례미사는 본당에서 올려야 할 것이며 몬시뇰께서 직접 집전하시겠다면서 절차와 일정을 알려주셨다고 한다. 그 후 뷰잉예절에도 참석해 고인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남은 가족들을 위로해 주신 신부님. 천국문이 절로 열릴 것 같은 몬시뇰 신부님의 장례미사 집전은 장엄하고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그분의 마지막 길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따습게 데워진다.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시면서 우리에게 쟌다크성당에서의 우리 자리를 공고하게 굳혀주셨고 우리 모두 인간적 갈등을 넘어 모쪼록 서로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고 모두 하나로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당부말씀을 무언중에 남기고 떠나셨다. 할머니는 이후 우리 모두를 더욱 굳건하게 하나로 묶어주셨다,
웰다잉이란 단어를 들으면 위암 말기임에도 주사약에 의지하지 않고도 아무 고통 없이 선종을 하신 루갈다 할머니가 생각난다. 신실한 기도생활 속에서 사람다이 잘 살아야 죽음의 복 받아 고이 죽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분.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는 말대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