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전화를 받으니 유나 할머니의 기운 없는 목소리다.
비슷한 연배인 데다 똑같이 충청도가 고향이라 무척 반갑다며 대뜸 친구 하자 손 내밀던 그녀는 나보다 더 빼빼였다.
지방에서 자랐지만 큰 양조장을 한 아버지 덕에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그녀.
끼니마다 까맣게 윤나는 장조림이나 오징어볶음이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입도 짧고 아이들처럼 가리는 음식도 많다고 했다.
키는 우리 또래로는 큰 편인데 체중은 겨우 100파운드 남짓이다.
그녀네는 오퍼상을 하는 맡 오라버니를 따라 70년대 초에 온 집안이 이민을 왔다.
오빠는 지역 유지인 아버지 빽으로 중등학교 수학선생 하다가 동료 교사를 임신시켰으나 결혼 의사까지는 없어 미국으로 냅다 줄행랑쳤다고 한다.
그 길로 무역업에 투신, 크게 성공해 가족들을 모두 불러들였고 그녀는 중매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자바시장에서 몇십 년 장사를 해 그런대로 돈도 많이 벌었으나 남편 복이 없어 애진작에 갈라서서 홀로 아들 하나를 키웠다.
결혼초부터 무위도식 일삼으며 친정 재산이나 넘보면서 한량 노릇 하던 위인이라 남편과는 미련 없이 헤어졌다고.
아들은 유학 온 참한 일본 아가씨를 만나 십 년 전 가정을 꾸렸다.
외아들에게 모든 걸 걸고 뒷바라지 아끼지 않았던 그녀는 아들에게 별도로 집을 사주고 처음엔 따로 떨어져 살았다.
그러다 손주가 생기자 직장 생활하는 며느리를 돕기 위해 합가 했으나 그녀는 늘 큰소리치면서 지낸다.
평소 식성도 까다로운 데다 도무지 입맛이 없어 식사를 제대로 못한다는 그녀다.
그래서인지 꽤 신경질적인 그녀건만 아들 내외는 어머니 비위 건드리는 일없이 눈치 슬슬 보며 그녀를 신줏단지 모시듯 깍듯이 위하고 섬긴다.
손녀가 가족 그림을 그리면 언제나 제일 크게 그리는 사람은 할머니, 그다음은 아빠 엄마 순이란다.
명실상부 그녀는 그 집안의 제왕이다.
무더위 때문인지 영 입맛이 없던데 요즘 뭐 해서 드세요? 그녀가 묻는다.
전 양식 아닌 토종음식은 아무거나 맛나게 잘 먹어요.
실제로 아직껏도 난 입맛 없다는 게 무얼까, 그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날씨 덥기도 한 데다 아이가 아파 경황이 없는 통에 며칠을 물과 링거주사로 연명했다는 그녀.
열 살짜리 손녀가 방학 날 학교에서 무얼 잘못 먹었는지 심하게 토해서 응급실까지 갔더라며 애들 땜에 학을 떼겠다고 하소연한다.
척 늘어져 잠만 자던 아이가 이제 기운을 차렸는지 이것저것 먹고 싶은 걸 주워섬기기에 땡볕 불구하고 마켓에 다녀왔더니 더 지친다는 그녀.
뭘 안 드시니 맥도 없고 자꾸 기운이 빠지지요, 그러자 도통 먹고 싶은 게 없는걸요, 그런다.
요샌 일찍 학교 가느라 아침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요, 그래서 전 하교 후엔 너무 시장해서 물에 밥 말아먹기도 해요.
급한 김에 마른 멸치나 풋고추 된장에 찍어 먹어도 꿀맛인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자기도 그렇게 먹어보고 싶단다.
그럼 오세요, 마침 열무김치도 적당히 익었으니 다른 찬은 없어도 충청도 고향 밥상 나눠봅시다. ㅎ
얼른 쌀을 씻어 안치고는 마른 고구마 줄기와 고춧잎을 푹 삶았다가 들기름에 달달 볶았다.
텃밭에서 금방 따온 싱싱한 상추와 아삭이 고추 한켠에는 은빛 비늘 생생한 죽방멸치를 얌전히 눕혀뒀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인데 나물만 주욱 늘어놓을 수 없어 냉동실을 뒤져 오리고기 몇 쪽 팬에 구워냈다.
생 청국장도 한 종지 담고 매실 장아찌며 부추김치 깍두기도 꺼내놨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점심을 먹었다.
그녀는 처음엔 다른 반찬은 거들떠도 안 보고 멸치와 풋고추를 번갈아 양념장에 찍어 밥 한 공기를 맛나게 비워냈다.
이어서 열무김치에 나물 넣어 밥 비벼 먹고 싶다며 한 주걱만 더 떠달라고 주문하였다.
아~모처럼 고향에 온 거 같아요, 엄마 손맛 같은 밥 정말 맛있게 잘 먹었네, 이제 눈이 떠지는 게 정말 살 거 같아요.
대저택 안주인이건만 소박한 시골밥상으로 포식하고 간만에 행복해하던 그녀는 마무리로 오이지 국물을 훌훌 마셨다.
나른한 충족감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그녀는 눈을 살푼 감는다.
다음엔 뚝배기에 된장찌개 끓여서 점심 같이 먹자 했더니 두 팔 번쩍 올리며 으쌰으쌰, 애들처럼 좋아하는 그녀.
그래, 우리네 한생 산다는 게 별거던가. 2017
https://youtu.be/coj5e8VMLmc?si=6bKysudcx5a2ROZ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