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논 분화구에 펼쳐진 황금 들녘

by 무량화


벼 이삭 고개 숙이며 황금벌판 이룬 하논은 요 근래 들어 생선 그릇에 고양이 발 드나들듯 자주 드나들었다.

단순한 내 셈법으로는 추석 때 햅쌀로 송편을 빚으니 늦어도 추분 무렵엔 추수하지 않겠나 싶었는데 계산 착오였다.

하긴 논농사래야 어쩌다 외갓집에서 본 게 전부다.

게다가 농촌 근처에서는 살아본 적도 없으니 추수 시기를 제대로 알 턱이 없다.

서귀포에 와서 하논 분지를 통해 가로 늦게 논에 흥미 느껴 관심 가지면서 뻔질나게 하논을 찾았더랬다.

삼월 논갈이 때부터 시작해 오월 싱그런 못자리도 보았고 이앙기로 하는 유월 모내기도 죽 지켜본 하논 논농사다.

칠팔월 초록으로 술렁대던 벼포기가 구월 초 노랗게 변하면서부터 발걸음 더

잦아졌다.

그러나 9월이 다해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추수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조바심이 나 이제나저제나 하면서 하루 걸이로 다녀오는 하논인데 아직껏 소식이 없다.

벼 이삭은 차츰 더 무거워지고 벼포기는 점점 더 금빛으로 익어가는 요즘.


가르마처럼 반듯하게 난 논둑길 저 끝엔 오연스러운 한라산 웅자.


도내에서 유일하게 벼농사를 짓는 하논 분지 벼포기 위로 바라본 한라산, 구름 드리워 신비감 더한다.



한 주 만에 다시 찾은 하논은 어느새 빛깔조차 풍요로운 가을 기운 완연했다.

민족 최대 명절인 중추절, 마음까지 절로 넉넉해지는 추석.

미국 사는 동안 내도록, 제대로 챙길 수 없었던 우리 고유의 명절이다.


송편 빚고 전 부치며 차례 모시느라 분답던 명절 느낌 어언 잊은 지 오래, 한국인들 차례 지내는 이들 역시 감소 추세라는데.


열흘씩이나 추석연휴 지낸다는데 그래서인지 황금연휴 앞두고 해외여행에 관한 화제가 더 풍성하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였듯 그 어느 절기보다 좋은 때가 바로 이즈음.

춥거나 덥지 않은 청량한 날씨에 오곡백과 거두는 풍요로운 수확철이다.


중추절 둥근달 떠오르면 기억마저 흐려가는 고향 생각 잠시 잠겨보는 건 어떨까요.

호박단 치마저고리에 꽃신 같은 추석빔 기억이야 아득한 옛일이라 희미하게 빛바랬으며.

그럼에도 어제 하논 풍경은 문득, 유년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미리 차례 전에 놋제기 꺼내서 일일이 문질러 닦을 때야말로 하루 공력이 여간 아니었다.

일단 바닥에 짚을 깔고 제기를 죽 꺼내놨다.

정초에 사용하고 할머니 기일 때 쓴 다음엔 나무 제기함 어둠 속에서 내내 지내서인가.

반짝거리던 놋그릇 고유의 윤기 대신 제기마다 거무칙칙하게 변해버렸다.

아궁이 재보다는 묵은 기왓장 곱게 빻아 만든 가루를, 물에 적신 짚수세미에 듬뿍 묻혀 기명들을 빡빡 문대줬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구경만 하던 내게도 일거리가 배당되곤 했는데 주로 자잔한 품목들이었다.

향합이나 향통과 제주 잔이며 촛대, 수저는 늘 그렇듯 내 몫이었다.

박박 힘 있게 문질러대야 하는 그릇들과 달리 소품들은 틈새나 구석까지 곰살스레 닦아야 하므로 애들에게 맞는 일감이기도 했다.

놋그릇에서는 특유의 비릿한 쇠내음이 다.

코피가 날 때 비강에서 감돌던 냄새와 엇비슷 닮은.

지금은 유기를 사용하는 이가 별로 없지만 스테인리스 스틸이 나오기 전엔 일상 용기로 썼는데 늘 사용하다 보면 냄새 역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지금 세월엔 그마저 향수가 된, 또 하나의 그리운 추억의 내음이 돼버렸다.



하논은 아직도 옛 정서가 묻어나는 마을이라 걸핏하면 나 이리로 달려오는지도 모르겠다.


풋감이 홍시로 변해가고 대추나무엔 알 굵은 대추 담밖으로 가지 휘어지게 달려있는 정겨운 풍경만이랴.

수로 따라 걷다 보면 가을 하늘 넘나드는 여러 종류의 잠자리 떼를 만난다.

실잠자리 장수잠자리 홍잠자리 밀잠자리 물잠자리...

낮게 창공 선회하면서 익어가는 벼 내음 즐기다가 잠자리는 자주 물가에 내려와서 쉰다.

마른풀 대궁에 앉아 까닥까닥 한들한들 위태위태 안쓰러울 정도로 조심스럽다.

예민한 실잠자리나 왕눈이 장수잠자리는 살푼 앉는가 싶다가도 금세 자리를 뜨니 그나마의 쉼조차 어렵다.

오금 저리도록 쪼글뜨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걔네들 하르르 바람 같은 자태 사진에 담기는 역부족이다.

에메랄드와 터키석 닮은, 보석같이 멋진 눈을 가진 장수잠자리는 설핏 스쳤는가 싶은데 어느새 하늘가로 가뭇없이 스며들었다.

잠자리는 모기나 하루살이를 먹이로 삼는 익충이다.

그래서 마냥 살가운 걸까.

마음 이리 끌리는 건 아마도 투명한 날갯짓 때문일지도.

이남일의 잠자리 시 일부를 대신 여기에...



"장대 끝 잠깐의 휴식은

메밀꽃 향기보다 편하다

바람 깃에 떠돌다

머문 그곳....."



조붓한 농로가 하논 분화구 안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여름내 도랑물 틉틉하게 고여있던 배수로에 물 그들먹하게 흘러간다.

물가에 푸른 열매 총총 열린 율무 한껏 왕성하고 한들한들 작은 수초들 무수히 떠있다.

저만치 구불대며 흘러가는 기다란 끄나풀은 왠지 물비암 같아 화들짝 그 자리를 떠났다.

가녀린 실잠자리, 고추잠자리보다 진한 홍잠자리, 머리가 청남색인 왕잠자리까지 물 위를 선회했으나 그 바람에 사진 찍을 생각 달아나고 말았다.

멀리서 세를 불리고 있다는 태풍 여파인지 거센 바람이 물비늘을 일으켰다.

일찍 모내기를 한 논은 어느새 벼 이삭 고개 숙인 채로 묵직이 나붓거렸다.

이앙기로 늦게 모내기를 한 논배미는 아직 꼬투리 여린 벼 이삭인데 낱알 여문 벼도 있었다.

바람이 불어 제킬 때마다 벼는 자로 모로 휘청대며 물결처럼 일렁댔다.

청보리밭에 이는 바람은 맥파를 만든다, 하면 벼논을 스치는 바람은 이름하여 미파(米波)를 만드는가.

흐으흠, 가능한 만큼 코 평수를 넓혀도 구수하게 익어가는 벼내음 가늠하긴 아직 이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