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숙도 갈대 되어

1986

by 무량화

철새의 낙원이 가까운 탓일까. 이름마저 봄볕 같은 에덴공원 입구에서 버스를 내렸다. 썰렁한 외곽지 주택가. 전혀 에덴 닮지 않은 허술한 공원일랑 버리고 곧장 강가로 나섰다.



얼굴을 때리는 냉기가 한겨울답게 얼음가루로 와 박혔다. 게다가 강바람은 무서운 기세로 몰아쳤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 을씨년스러운 날씨였다. 코트 깃에서 음산한 바람이 몸부림을 쳤다. 피리 소리 같기도 한, 밤 새 울음소리 같기도 한 율조로.



강물은 온통 뒤끓고 있었다. 용트림하고 있었다. 좀 겁이 났다. 그래도 배를 기다리며 오늘은 꼭 을숙도에 들어가리라 작정했다. 나무판자로 얽은 구멍가게에서 바람을 피하며 언 손을 비볐다. 시린 감각으로 하여 어깨마저 절로 움츠려졌다. 삶은 계란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굴렸다. 따끈한 느낌이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통통거리는 낡은 배가 물살을 튀기며 접안되었을 때 나는 잠시 망설이기조차 했다. 무슨 청승으로 이런 날씨에 섬에 들어갈 것인가 하고. 바람이 등을 떼밀었다. 누군가 낯선 이가 손을 이끌어 주었고 나는 기우뚱 배에 올랐다. 조그만 선실은 두어 사람의 무연한 표정들뿐 텅 비어있었다. 페인트가 거의 벗겨진 채 얼룩진 기관실에서 제법 힘찬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보아온 낙동강은 청청한 줄기였는데 탁하기 그지없는 강물. 하늘빛의 반사 때문인지 물빛은 더할 수 없이 우울한 암청색이었다. 물결을 가르며 배가 속도를 내자 가까이 섰던 구지레한 풍경들이 바삐 물러섰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고 두께 모를 구름의 층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얼굴이 얼얼했다.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부딪는 바람결 차가웠다.



후루룩~. 한 무리의 새떼가 황급히 하늘로 솟구쳤다. 강 여기저기에 새들은 있었다. 강류에 작은 몸을 맡긴 채 나붓거리는 정경이 평화롭다기보다 차라리 안쓰러웠다. 그들을 품에 안은 낙동강의 창망함. 강은 물살 져 흐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출렁대고 있을 뿐.



배가 강심으로 파고들수록 고물에서 허옇게 부서지는 물결이 드높아졌다. 한참을 휘돌아 빼던 배가 속도를 늦췄다. 을숙도. 배에서 건너뛰어 위태로이 강기슭에 닿았다. 내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바람과의 동행이었다.




베이지색 원숙을 사려 안고 엎드린 을숙도. 서걱대는 갈대바람, 바람의 난무. 상상 속의 을숙도는 아니었다. 여태껏 갈대숲 우거지고 예서제서 후조 울음이 들리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황량스레 빈 섬이었다.



갈대는 바람결에 상한 그대로 이리저리 누워있고 더러는 꺾인 채였다. 엉성한 갈대숲 한켠에 농지 질펀하게 펼쳐졌고 드문드문 낟가리 같은 초막이 보였다. 수로 새새로 갈밭이 있으니 거기 안식의 나래 쉬는 새떼 보리라 기대했건만. 허나 아무것도 찾을 길 없었다.




거침없이 쓸어대는 바람은 더욱 기세등등했다. 요기로운 휘파람 소리로 휘어감기는 바람. 나는 영락없이 홀대받은 나그네였다. 불청객으로 빈 들에 엉거주춤 선 채 망연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농가의 밀창문을 열었다. 몇 개 과일과 과자 봉지가 좌판에 놓인 허름한 가게였다. 라면을 끓이고 있는 연인인듯싶은 두 젊은이가 앉아있어 반가웠다. 그래도 나 말고 이 바람뿐인 빈 섬을 찾은 이가 있었구나.



여기가 분명 을숙도냐고 바보 같은 다짐을 놓았다. 왜 새가 보이지 않느냐고 실없어 보이는 물음도 던졌다. 옛날 을숙도이지요. 그건..... 과연 그랬다. 을숙도에는 이제 무성한 갈대숲도, 겨울새의 정취도, 수로를 지나는 조각배의 낭만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대신 자연과의 공존을 거부하는 개발이라는 이름의 현대산업주의의 범람. 그 오만 앞에 여지없이 굴복하고 만 을숙도가 있을 뿐. 한때 철새들의 낙원이었음이 추억으로 남아, 마치 무도회의 수첩인 양 뒤적여 나 볼는지.



을숙도의 갈대 되어 술렁이는 새소리에 묻힌 채 강바람 따라 나부끼고 싶었던 마음을 추슬러 싸안았다. 배가 닿자 서둘러 올라탔다. 을숙도에 깔린 허망과 고적이 아쉬운 듯 내 발목을 잡기라도 할까 봐. 철새 몇 마리씩 강기슭 물결에 몸을 싣고 있었다. 떼 지어 강을 덮은 장관 대신 쓸쓸한 듯 추운 듯 외롭게. 저만치서 그들은 유유했으나 마지막 작별을 연습하는 것일까. 긴 다리 도요가 날렵한 몸매로 물을 차고 오른다.



배가 스치자 후조 나래 펴는 소리에 강물은 더욱 설레는가. 파도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