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열매

2003

by 무량화


사과 철을 맞아 과수원 가는 길. 도로 양쪽으로 고르게 펼쳐진 숲에 단풍은 지금 절정기를 이뤘다. 주황빛 무대 조명이 한꺼번에 켜진 듯 눈앞이 환하다. 참나무 장작불 괄게 지펴진 도자기 가마 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같다. 오후의 햇살을 비껴 받으며 말갛게 타오르는 단풍 숲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미구에 지고 말 단풍 잎새들이 펼치는 고별잔치가 이리도 현란한 것은 섭리에 순응한 나무에 대한 신의 특별한 안배인가.



고향 마을 탱자나무 생울타리에 둘러싸인 아늑한 규모의 과수원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바다처럼 광활한 농장. 입구로 들어서는 고샅길만도 한 마장은 됨직하다. 농원 내를 도는 데는 협궤열차 같은 마차를 이용해야 한다. 왁자지껄 놀이동산에 마실 온 동심이듯 출렁대던 기분이 늪가 후조 떼 목쉰 가락에 짐짓 조용해진다.



앙바틈하니 줄지어 선 과목들. 이미 낙엽 진 사과나무에는 소담스레 빨간 열매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언뜻 봐도 풍작이다. 그러나 연분홍 꽃잎 피던 시절부터 오늘이 있기까지 험하게 후려치는 광풍이며 생가슴 할퀴는 모진 시련이 굽이굽이 그 얼마였을까. 남모르는 신역과 고초 의연히 견뎌내고 마침내 이르른 완성의 길이니 어찌 대견하다 않으리. 알알이 윤기로운 열매마다 때깔도 곱거니와 탐스럽기도 하다. 온 데서 새콤달콤한 사과향이 풍긴다. 입안에 절로 단 침이 고인다.



빨리 사과나무 아래 서고 싶은 급한 마음과는 달리 호젓이 떠오르는 한 얼굴. 왜 문득 이모님이 생각났을까. 엄마 동기 중에 오직 한 분만 유일하게 남은 막내 이모다. 메릴랜드에 계신 그 이모가 가끔 전화를 주신다. 소녀 마냥 톤이 맑은 목소리로 "이모다, 바쁘지 않니?" 하신다. 아침 일찌감치 전화를 건 어제도 서두르는 감이 들기에 어디 가시려구요? 했더니 홈리스 식사 준비하는 곳에 나가려던 참이라 하신다. 시간에 쫓겨 괜히 종종걸음 치지 않으시도록 얼른 전화를 끊었다. 평소 詩作도 즐기시고 성당 주보에 더러 글도 실으시는 이모다. 재작년엔 노인 봉사단체장으로 추대되자 손수 취임사를 쓰시곤 문맥이 매끄러운지 들어보라며 읽어 주시던 분이 이모다. 물론 가필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짜인 글이었다.



장골 같은 가장이 떠받쳐도 살기가 힘들던 60년 대. 정릉골 언덕에 기댄 남루한 집에 올망졸망 오 남매 남겨두고 이모부는 눈을 감으셨다. 신산스럽던 세월. 자그마하니 여린 체구의 이모건만 혼잣손으로 강단지게 자손들 거두어 지금은 옛말 하며 웃으시는 이모. 아름찬 내색 도통 안 하셨지만 굴곡진 마디마디 어찌 다 펼쳐 보이리. 다디단 새벽 잠결에 뵌 어머니, 어룽지는 촛불 앞에 무릎 꿇고 묵주에 매달리다시피 간절한 기도 바치던 모정으로 하여 오늘이 있을 수 있다고 이종은 말한다.



미국에 오신 지 어언 서른 해가 넘는 이모는 아들딸은 물론 손주들 수발만이 아니라 이제는 도움이 필요한 어려운 이들을 찾아 나선다. 당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나누는 삶으로 승화시켜 이웃사랑을 표 안 나게 실천하시는 이모는 건강을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늘 감사드리면서 사신다. 그렇게 높은 곳의 그분 보시기에 참 좋은 모습으로 살고 계신 이모다. 향기로이 잘 익은 과원의 열매와 겹쳐지는 이모. 이모처럼 나도 곱다라니 나이 들어가고 싶다.

- 미주 증앙/2003-



*이모님 올해 95세로 아파트에서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