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이사 오자마자 뒤란 공지를 삽질해서 밭을 일구었다.
사월이니 텃밭 가꿀 시기로 좀 늦었다 싶기에 부지런을 떨어가며 흙을 다듬었다.
그 봄, 고랑 따라 각종 채소 씨를 뿌렸으나 이 지역 실정에 맞지 않아 씨앗은 발아도 못 시켰다.
이 동네서 오래 산 교우분이 진작에 물어볼 것이지, 하며 소용없는 일을 했다고 손사래를 친다.
싹을 틔워봐야 강렬한 햇살을 견디지 못하고 죄다 타 죽고 만다며 괜히 물 낭비를 하지 말라고 했다.
봄엔 아무리 싹이 잘 돋아도 사막 땡볕에 결국 다 녹아버리는 데다 차광막을 쳐준다 해도 물값 감당이 안 된다는 것.
유행가 가사에 봄이면 씨앗 뿌려 가을이면~어쩌고 하였으나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다는 걸 모르고 괜히 헛수고한 셈.
여름내 유기농 신선한 상추며 들깻잎 거기다 풋고추 호박도 따겠다던, 야무진 봄 농사의 꿈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감당 안 되는 일임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날씨에다 오월부터 세 자릿수에 육박하는 기온으로 충분히 감이 왔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데저트인데 따로이 챙겨 열심히 물을 주지 않는다면 수분은커녕 습기 구경조차 못하는 땅이다.
그렇게 여름 땡볕 아래 채마밭은 푸른 기운 하나 없이 메마른 채로 먼지나 풀풀 날리며 방치되어 있었다.
가을에 씨를 뿌린다는 주변의 조언대로 불볕 여름이 어서 지나가고 서늘해지기만 기다렸으나 구월이 다 가도록 무더웠다.
시월 말에 들어서자 날씨가 좀 수굿해지기에 다시 밭을 정비하고 시비를 더욱 충실히 한 다음 씨를 뿌렸다.
그로부터 한 열흘 지나자 무와 배추 순이 열을 지어 쌍떡잎을 내밀면서 11월의 빈객 되어 환영받기에 이르렀다.
12월 첫날, 이곳 하늘답지 않게 낯선 회색빛이 진을 치기 시작하더니 밤부터 고요히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신통할 정도로 주룩거리며 거세게 내리는 비, 몇 달 만에 비다운 비가 진종일 내렸다.
온갖 초목은 모처럼 만에 생명수를 흠뻑 들이마신 다음 새론 기운을 차리고 하늘에 감사드리며 즐거워했다.
빗물이 쓸고 가 말갛게 씻긴 도로, 집도 거리도 가로수도 모처럼 깨끗하게 샤워를 해서 산뜻해졌다.
강줄기는 졸졸 개울이 되고 호수는 볼품없는 웅덩이로 변할 만큼 캘리포니아 전 지역이 오랜 가뭄으로 목이 타던 차에, 고대하고 기다리던 반가운 비가 오니 완전 해갈에는 못 미치나 그래도 얼마나 고맙고 고마운지.
비가 멎은 오후, 기회는 이때다 싶어 촉촉해진 밭 가장자리에다 마늘을 심으려고(실험상 미리 뿌리내린 것과 아닌 것 두 종) 텃밭으로 나갔다.
적당한 마늘자리를 잡아주려는데, 비 오기 전에는 아침저녁으로 그리 눈독 들이며 찾아도 없던 푸른 순들이 눈에 띄었다.
많은 식물의 씨앗은 잠자는 기간인 휴면기를 가지고 있는데 적당한 조건인 산소, 물, 온도가 맞으면 싹을 틔우기 마련이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씨앗 속에 있는 생명력은 사라지지 않으며 언제든지 발아하기에 적당한 조건이 형성되기만을 기다린다.
냉이꽃 한 잎에겐 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읊은 가람 선생의 시구도 있듯이 씨앗의 생명력은 곧 신이 주신 신비요 축복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씨앗은 러시아에서 발견된 패랭이 씨앗이라 하나 발아 성공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중국에서는 1천3백 년 묵은 연꽃 씨앗을 발아시킨 적이 있다.
그런데 몇 해 전 이스라엘 마사다의 요새를 발굴하다가 찾은 대추야자 씨앗 세 개 중 하나를 발아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 '사이언스'지에 실린 적이 있었다.
씨앗을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분석하여 본 결과, 대략 2,000년 전의 씨앗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연구자들은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씨앗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여름이 덥고 건조한 마사다의 기후가 생체 분자를 파괴하는 활성 산소의 발생을 억제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고 말했다.
2천 년이나 되는 세월이 지난 후에도 발아한 대추야자 씨앗 속에 그런 놀라운 생명력을 넣어 주신 전능하신 분.
오랜 기다림 끝에 감로수를 마시고 움튼 채소 새싹들을 만나고 보니 그분께 대한 외경심이 새삼 더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