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여행사진 중에 그냥 묻어두기 아까운, 이를테면 이야기가 담긴 풍경들이 있기에 이삭 줍기 하듯 욕심을 부릴려구요.
'눈먼 개'를 만난 건 비숍에서 사브리나 호수로 들어가기 전 주유소에서 였는데요.
비숍은 소문난 빵집도 있지만 이 또한 비숍 만의 브랜드 같았어요.
시각 장애가 있는 개가 볶아낸 원두커피라니 호기심을 자극하기 딱일 만큼 독특하지 않나요.
커피를 마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커피만은 사서 향을 맡고 싶어 마켓에도 둘러보고 아래 빵집에도 들렀으나
유감스럽게도 구하진 못했네요.
생각해 보세요.
애완용이 대세인 요즘 누가 굳이 눈먼 개를 거두어 키우겠어요?
심각한 장애가 있음에도 그 개를 돌보는 심성 좋은 주인이라면 커피 향은 음미해 보나 마나 틀림없이 훌륭하지 않겠어요.
설명이 필요 없는 비숍의 그 유명한 Erick Schat's Bakkery 파킹낫 들어가는 측면입니다.
딸내미만 빵을 사러 들어갔고 전 밖에서 우리 집 멍멍이를 데리고 우두커니 서서
드나드는 손님들이며 담쟁이 우거진 창가를 올려다봤네요.
이른 시각인데 벌써 울긋불긋 등산복 차림인 한 무리 한인들이 왁자하니 빵집 앞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더군요.
우린 도로 건너 자리한 비숍 시티팍 나무그늘에서 백 년 전통으로 소문난 그 빵을 오렌지주스 곁들여 먹었지요.
원래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그런지 암만 맛진 빵일지라도 그게 그저 그런 통밀빵일 뿐... ㅎ
비숍이라면 가톨릭에서는 교회의 직책 중 주교를 이르는데요.
허나 이곳 마을 이름은 사무엘 에디슨 비숍이라는 최초 정착자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더군요.
잠 때문에 일출맞이는 어림없지만 그래도 꽤 이른 시각, 일찌감치 이스턴 시에라로 진입했습니다.
야생동물이 흔할 첩첩산 아랫길, 커브길에는 사슴 주의 팻말이 선명했고요,
막 해가 뜬 다음의 하늘빛은 터키색으로 유달리 고왔습니다.
이미 만원사례가 아니라면 들어오는 순번대로 캠프장을 예약할 수가 있더라구요.
사람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지만 뒤쪽에 솟은 산들은 이마 훤해진 아침입니다.
벌써부터 깨어나 설치는 건 모기떼뿐이더군요.
자의는 아니지만 걔들한테 헌혈 좀 낫게 해 줬습니다. ㅎ
왕복 11마일 비숍패스의 출발지인 사우스 레익입니다.
비숍에서 지낸 며칠, 찰방구리 쥐구멍 드나들 듯 사우스 레익 여러 번 들렀네요.
높직한 바위에 앉아 강바람 즐기노라면 세월도 세간사도 다 비켜서며 나 또한 신선,
우리 집 멍멍이마저 호숫가 화강암 바위에 반해 너부죽 들누워 일어날 생각을 도통하지 않았습니다.
비숍패스에서 만난 보석 같은 호수 호수들.
해발 만여 피트가 넘는 높은 산중에 녹빛으로 빛나는 호수가 연달아 선을 보이는데야 어찌 환호를 보내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누구나 한번 그 길에 서보고 나면 오매불방 JMT 노래를 하는 이유가 충분히 가늠됐습니다.
땀에 흠뻑 젖은 산행 후, 하산길은 맘껏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어 좋았지요.
애스펜델 마을 길가 카페에서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촌사람은 핫쵸코로 이열치열 삼아 한번 더 땀을 냈네요. ㅎ
비숍 외곽에 있는 로우즈(LAWS) 철도박물관도 들러봤는데요.
395번 도로를 타고 노스로 향하다가 갈라지는 6번을 타고 서쪽으로 한참, 실버캐년 로드 출구가 보이면
우회전해서 곧장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박물관이 나오더라구요.
한번 길을 잘못 들어 헛수고를 한 뒤라 오기로 재차 시도해 봤는데 가보니 별로 추천할만한 데는 아니었어요.
골드러시 당시 미서부 철도역사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곳으로 증기기관차와 여러 전시관을 둘러봤구요.
근데 알프스 산자락 아래 예쁜 마을 같은 비숍에 뜬금없이 웬 기차?
작은 기차역에는 미국의 힘줄인 산업용 운송 열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마차만으로는 감당이 버겁던
데스밸리에서 나오는 광물 운송 목적으로 여기다 기차역을 만들었답니다.
그러나 제반 여건이 틀어지면서 착공만 하고 실제 운행은 될 수가 없었다네요.
호기심 많은 아이마냥 5불짜리 표를 사서 위 데스벨리행이란 양각 뚜렷한 주물 기차도 타보았지요.
역무원 할아버지가 철도에 얽힌 역사를 설명해 주는 외엔 싱겁게 편도 길을 왔다리갔다리만 하더군요. ㅎ
화잇 마운틴 서쪽 경사지에 나있는 돌너덜길을 걸으면 옹기조각을 밟듯 쨍쨍~ 예리한 소리가 난답니다.
납작납작 판판한 경질의 규암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인데요.
바다 밑 진흙이 압축되어 사암이 되었다가 변성작용에 의해 녹아 붙어 규암(珪岩, quartzite)이 되고,
이 규암들 틈새가 얼었다 녹았다 하는 과정이 반복되며 규암들이 부서진 조각들이라네요.
이는 46억 년 이어진 무량한 지구 역사의 한때 바다였다가, 히말라야가 그러하듯 지층의 격돌로 바닷밑이 융기되어 뭍이 된 흔적이겠지요.
세계 최고령 므두셀라 나무들이 수천 년을 살아온 화잇 마운틴 자락 동쪽 끝은 해수면보다 낮은 지대인 데스밸리에 닿아있으니 어긋진 지층 설명이 쉬 이해가 됩디다.
이 산줄기야말로 데스벨리가 존재하는 이유를 증거 해주기도 하니 주변 경관이 예사롭지 않을 수밖에요..
수수만년의 시간이 응축된 규암 조각을 주워 돌탑 하나 쌓아 올리고 내려왔습니다.
"지구엔 돋아난 산이 아름다웁다/산은 한사코 높아서 아름다웁다."
어느 분의 시처럼 한사코 높아서 멋스러이 아름다운 산. 산. 산.
저 건너 시에라 네바다 장엄설봉들이 울멍줄멍 어깨 결고 억겁의 시간을 여전히 행군하는 중입니다.
395를 타고 론파인을 지나 인디펜던스 빅파인 비숍에 이르기까지, 곳곳의 목초지에서 방목하는 블랙 엥걸스를 자주 스치게 됩니다.
평화로이 풀을 뜯는 쟤들을 보며 육질 부드러운 스테이크를 떠올리는 이 고이얀 식탐이라니.
축산물 가공을 겸하는 목장집 철망엔 소 통가죽이 주르름 널려있고 신선한 육포가 있다는 선전문구도 보이는데요.
아닌 게 아니라 좀 심하다 싶긴 하데요.
그러면서도 이쪽 길을 지나칠 때마다 알맞게 숙성시킨 스테이크 거리를 사서 소금 살짝 뿌려뒀다가 숯불에 굽곤 했네요.
별로 고기를 즐기지 않는 식성인데도 여기서만은 육즙 단 스테이크를 입 속으로 옮기기 바쁘답니다.
단순히 야외라서 식욕이 좋아진 게 아니라 그만큼 맛이 훌륭해서랍니다.
산행에 앞서 든든히 칼로리도 보충하는 한편, 안주가 좋아 마시는 와인 역시 덩달아 맛이 각별스럽지요 ㅎ.
금강산도 식후경, 이 동네에 와 야영을 하면 채식주의자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니라구요? 흠~
해가 설핏해지자 모기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약을 뿌려도 막무가내지요.
파스텔화처럼 곱게 노을 지는 하늘을 어두워질 때까지 바라보고 싶었으나, 노출부위마다 덤벼드는 모기떼를 쫒으려 서둘러 모닥불부터 피워야 했습니다.
나무 타는 연기가 주변으로 퍼지자 앵앵거리던 모기떼의 공격이 수굿해집니다.
서녘하늘은 색채 미묘한 실크 머플러를 휘날리듯 아주 환상적이나, 잠시 후 청남빛으로 바뀐 창공에 별이 하나둘 떠오릅니다.
별빛 총총하고 우윳빛 은하가 흐르는 평화로운 밤, 화톳불 속에서 익어가는 고구마와 옥수수 내음이 구수합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이런 낭만의 밤을 가져보는 것은 나름 성실히 산 삶의 보너스 아닐까요.
만추가 되면 맑고 투명한 금빛으로 물든다는 아스펜 숲길이 지금은 청년처럼 짙푸르기만 하더군요.
가을에 다시 와보겠노라고 꼭 기다리라고 유치한 놀이 같지만 암튼 흙길에다 그리 써뒀습니다.
염원은 마음속에 다지기도 하지만 글자로 써놓아도 염력이 작용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고 하더군요.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