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군과 백군

2006

by 무량화


한 종교지에 다달이 쓰던 시평을 중단했다. 시사만평 격인 글의 성격상 사회적 이슈를 시기 적절히 다루게 되거나 환경문제 등 보편적 관심사를 주제로 풀어나가던 시평이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고는 하나 겉은 물론 속속들이 한국인인 나로서야 간과한 수 없는 문제가 바로 대한민국이 처한 현안들.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에 대해서도 썼고 서해안 북방한계선도 다뤘다. 북 미사일 핵 관계도 거론했다.



이에 익명의 한 독자로부터 강도 높은 항의가 들어왔다는 주필의 전언이다. 글 발표 후의 반응은 두 가지다. 공감을 표시하며 성원과 격려를 보내기도 하지만 이렇듯 거센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그러나 이번 경우는 섬뜩했다. 우선 글이 지나치게 경직된 보수 성향이라 못마땅하다는 질타였다. 그런 왜곡된 시각의 글, 한쪽으로만 편향된 논조의 글을 계속 싣는다면 편집 방향조차 의심스러우니 신문 구독을 끊겠다는 것. 나아가 주변에도 불매를 권고하겠다는 으름장도 곁들였다고 한다.



언뜻 안티 중앙이니 안티 조선을 외쳐대던 일부 극성스런 붉은 머리띠가 떠오르며 오싹해졌다. 한국 내에도 근자 들어 친북 패거리들이 드러내놓고 득세를 하고 있단다. 자유민주사회의 선봉인 미국 내에도 의외로 좌파가 다수 공존하고 있다는 얘기가 상기돼 새삼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됐다. 동시에 사상과 체제가 다른 남과 북으로 갈려 피아 간을 구분 짓고 색깔을 들먹이며 서로를 경계해야 하는 우리의 분단 현실이 안타깝고 비감스럽기만 했다. 종교지의 한계, 안 그래도 가뜩이나 열악한 신문사 사정인데 구독자를 잃게 하고 싶지 않아 즉각 손을 털었다.



아주 오래전. 책가방 내려놓기 무섭게 내닫던 동네 공터. 방과 후 으레 조무래기들이 거기 모여 사방치기도 하고 공기 줍기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줄 넘기를 하며 놀았다. 둘이서만 할 수 있는 놀이도 있지만 여럿이 모였을 때는 함께 어울리는 게임을 택하게 되는데 이때는 필히 편을 짜야했다. 재밌게 잘 놀고 난 끝에 더러 패가 갈려 싸우고 토라져서 돌아설 적도 있긴 하나 다음날이면 다시 아무렇지 않게 어우러지던 우리. 내 편 네 편으로 나뉘어 벽 너머 이쪽저쪽을 의식하게 됐던 첫 기억은 아마도 만국기 휘날리는 청추의 신나는 운동회날이 아니었을까.



그 어린 시절에도 우리 편에게는 거의 맹목적으로 열띤 응원을 보냈는가 하면 경쟁심 때문에 상대 쪽은 은연중 적대시하기까지 했다. 그때 청개구리라고 골려대는 백군 아이들은 우리 집 앞 골목도 지나가지 못하게 금을 그어두고 막기도 했던 치기. 그러나 운동회가 끝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우리는 금세 친한 이웃 동무로 되돌아갔다. 동심에야 앙금이라는 게 없었다. 청군 백군으로 갈라졌던 그 기간이 짧아서일까.



착실히 성장의 벽돌을 쌓아 올라가던 신앙공동체에 말썽이 일어났다. 시비는 점차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수굿해질 듯하다가 다시 점화되는 격한 감정들. 점입가경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신공격성 온갖 소문이 떠돌고 별별 해괴망측한 유언비어가 꼬리를 물었다. 어찌 그리 남의 눈 속 티는 잘도 잡아내면서 제 눈의 들보는 도통 못 보는 걸까. 흠 없고 거룩한 존재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잊고 각각 저만 옳고 깨끗하다고 목청 높이는가 하면 다들 재판관에 심판자가 되었다. 그 소요 속에 공동체 전체가 휘청거리며 분열 조짐을 보였다. 어제의 형제들이 어느새 이편저편으로 나뉘어 서로를 흠집 내기 시작했다. 이전투구, 한마디로 추태였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중생들의 이 행태를 말없이 지켜보셔야 하는 하느님, 정말이지 얼마나 괴로우실까.



끊이지 않는 이웃 간 집단 간 민족 간의 반목. 혹은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우리는 누구나 평화롭고도 조화로운 일상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 취해야 할 것 중 하나가 관용의 자세, 바로 관대함이다. 종교적 광신 풍토를 질타한 볼테르의 <관용론> 이후 프랑스 문화의 특징으로 자리매김된 톨레랑스. 관용이란 자기와 다른 신념체제와 생활방식에 대해 차별 배척하지 않고 공생공영의 입장에서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이르는 것. 우리와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최소한의 묵인, 즉 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도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인간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너그럽게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마주한다면 한결 살기 좋은 불국토가 이 땅에 이루어지련만. 내 편 네 편 가르지 않고 하나 되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세상, 그러한 참 평화의 길은 요원하기만 한 것일까. -2006 미주 중앙일보 뉴욕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