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마법의 주문에 걸린 양 오전까지 말짱하던 하늘이 오후 들자 슬며시 흐려지면서 바람까지 가세하기 시작했다. 주말에 강한 바람을 동반한 폭설이 내린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예보대로 눈보라가 심상치 않은 기세로 몰려왔다. 뒷숲에선 나목 가지들끼리 마구 뒤채이며 부대끼노라 쏴아~쏴아~먼 파도 소리를 냈다. 거친 바람과 함께 눈은 밤새도록 퍼부었고 이튿날도 진종일 흩날렸다.
며칠 전에 파킹낫 눈 치운 비용이 100불이나 나갔는데 또다시 무릎 깊이로 쌓인 눈. 이번만은 스톰이 슬그머니 비켜가기를, 예보가 살짜기 빗나가기를 바랐건만 영락없이 내리는 폭설. 수도를 비롯한 미 동부의 몇몇 주가 그로 인해 국제공항이며 도로가 폐쇄되자 속수무책으로 눈 속에 고립되고 말았다. 모든 활동이 마비된 채 정지된 일상. 일부에서는 정전사태까지 일어나 혼란이 가중되자 오죽하면 스노마겟돈이란 신조어가 등장하기에 이르렀고.
고스란히 흰 눈 속에 파묻힌 세상. 온 데가 은세계다. 주차된 자동차마다 눈에 푹신 싸여 온순하게 엎드린 지붕 선이 마치 내 어릴 적의 무광 풍경과도 같고, 이스트로 부풀어 오른 빵반죽처럼도 보인다. 다만 일으켜 세워놓은 윈도 브러시가 민달팽이의 한 쌍 촉수 눈처럼 삐쭉 솟구쳐 있다.
자동적으로 두문불출, 독한 감기약에라도 취한 듯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푸욱 쉬고 있다. 익숙지 않은 모처럼의 한가함이 처음엔 불편한 것도 아니고 찜찜한 것도 아니고 아무튼 묵지그레 개운치 않은 기분이었다. 열심히 달리기를 하다가 갑작스레 멈춰 선 듯 허뚱하니 이상스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창밖엔 줄곧 시야가 희뿜하도록 눈이 쏟아지니 어차피 쉬어야 하는 상황. 기왕이면 제대로 잘 쉬자 싶어 드디어 주어진 한유의 시간을 나름 즐기기에 이르렀다.
이틀째 맞는 휴식시간, 한정 없이 느긋해진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동굴 속에서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편안하고 안락하다. 곰이 따로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짓 그대로 내가 바로 곰이다. 지난여름 정말이지 곰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샌버나디노 산림공원 정상에 있는 빅베어 레이크에서였다. 그곳은 너무도 내 맘에 쏙 드는 데로 한 번은 꼭 게서 살아보고 싶을 정도였다. 동면하는 곰처럼 발바닥만 핥으며 지낼 수는 없으니 여러 여건상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꿈꾸는 건 자유다.
여름철이면 호수에서 수상 레포츠나 송어 낚시를 하고 구름 위의 하이킹 코스에서는 맨발이 더 즐겁던 곳. 눈꽃축제가 열리는 겨울엔 스키를 타고 눈썰매를 탈 수 있다는 그곳. 3500미터 급 높은 산이라 구절양장 고빗길을 하염없이 올라가며 굽이를 돌 적마다 만나곤 하는 낭떠러지 절벽에선 절로 차 손잡이를 꽉 잡게 만들었다. 처음엔 황량한 민둥산으로 시작 돼지만 올라갈수록 소나무 삼나무가 원시림을 이룬 곳. 그 높은 산꼭대기에 짜임새 갖춘 타운이 형성돼 있어 번다한 상가는 물론 학교 소방서 우체국 등이 두루 갖춰져 있었다. 절경의 호숫가를 빙 둘러 아름다운 별장 지대가 펼쳐져 있던 샌버나디노 산림공원.
지난여름 휴가의 마무리 장소는 거기였다. 우리가 머문 곳은 캐빈은 아니지만 순전히 목재로 지은 규모 큰 산장이었다. 송림 우거진 마당가에 캠핑시설이 마련돼 있어 참나무를 사다가 불을 피웠다. 딸은 요령 있게 금시 모닥불을 붙였다. 해가 지자 기온이 당장 서늘해졌다. 쌀쌀한 숲 속의 밤을 다사로이 녹이며 장작불은 괄게 타올랐다. 일렁대는 불길 따라 주홍빛으로 떠오르는 얼굴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아마도 다이돌핀이 저마다 퐁퐁 샘솟았을 것이다. 바비큐에 곁들여 마신 와인으로 거나해진 기분. 흥에 겨운 시조 한 수에 모두 함께 파안대소하던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이었다.
살고 지고 살고 지고/ 사시장철 곰이 되어 이 숲에서 살고 지고/ 오욕칠정 세간사야 시정에 부려두고/세한도 속 아취 누리며/솔잎 하고 이슬만 먹고 고요히 살고 지고. 그때 아마 이리 읊었던 것도 같다. 모처럼 친정 나들이 간 여인이 석 달 열흘 억수장마 지길 바라듯 그 산에 들어 석 달 열흘이 아니라 무진무진 살아보고 싶었다. 꽃이 나비의 자유를 탐내지 않으며 나비가 꽃의 향기를 탐내지 않고 각각 주어진 자리, 상황, 환경에 거슬림 없이 불평 없이 살아간다. 허황되기 짝이 없는 내가 배우고 싶은 안분지족이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할 일만 있다면 당장 짐 싸 들고 올라올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곳이지만 하긴 어디 사람 사는 일이 그리 단순하던가. 하산을 하며 아쉬움으로 내내 뒤돌아보던 그 산. 언제이고 눈이 내리는 날 나 거기 올라 질리도록 설경에 잠겨볼 것이다. 오늘처럼 눈이라도 깊이 쌓인다면 눈을 핑계 삼아 꼼짝없이 거기 갇혀버릴 수 있으련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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