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설록 티뮤지엄의 재발견

by 무량화


반가움에 가슴이 다 뭉클해졌다.

올 들어 처음 티뮤지엄에서 캐럴을 듣고서다.

요샌 상가에서나 거리에서 도통 캐럴이 들리지 않는다.

저작권료 문제로 캐럴을 맘대로 틀 수 없다는 건 오해였다.

속설 따라 그렇게 알고들 있었는데 실은 생활소음 규제와 에너지 규제정책 때문이었다.

과태료가 부과되는 등 단속 대상이 되므로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캐럴 듣기가 어려웠던 것.

왠지 이 시즌에는 호두까기 인형 발레도 봐야 했고 오케스트라가 펼치는 송년음악회에서 올드랭사인도 감상해야 섭섭지 않게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거 같은데.

화잇 크리스마스 노래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니 아늑한 감성이 스며들면서 마음결 저절로 말랑말랑해졌다.

일상 속 작은 소품 하나 자리 옮기듯, 별로 선호하지 않는 카페인데 들어오길 잘했다는 생각 비로소 들었다.

행복은 이처럼 소소한 데서 느껴지니까.



제주살이 첫해, 딱 한번 오설록에 가보고는 대체 관광객마다 왜 거길 필수코스처럼 들리는 걸까? 의아해했다.

기껏해야 녹차아이스크림이나 비우고 왔으니 별다른 감흥이 일리도 없었다.

아이들처럼 비누를 만들어 본다거나 중국인처럼 화장품 쇼핑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 후 여태껏 방문한 적이 없는 그곳을 오늘은 지인과 만나기로 해 불가피하게 가게 됐다.

약속된 시간까지 앉아서 기다리느니 여기저기 훑어나 보자 싶어 카페 밖으로 나왔다.

까치 지저귀는 소리 숲에서 청량하게 들렸다.

야외 테이블 위 황토색 파라솔이 계절과 썩 잘 어울려 아늑해 보였다.

그러나 목재 의자에 걸터앉기에는 날씨 꽤나 썰렁했다.

차밭으로 가볼까 하다가 바로 앞에서 호기심 자극하는 새카만 건물 특이하기에 정체가 궁금해 들어갔다.



CELLAR? 와인 저장고보다는 느낌 서늘한 국정원이나 벙커 같은 음산한 단어부터 연상되는 검은 지하실.

일층이지만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공간이라 입구가 어딘지 잠깐 어리둥절.

미궁으로 떨어진 듯 어찌할 바 몰라 허둥거리는데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갔다.

표본실 같이 어둑신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 음악이 아주 낮게 깔려있었다.

티스톤 셀러는 녹차 발효실로 발효차 숙성고였다.

신세계처럼 짠하고 펼쳐진 뜻밖의 공간은 특별 보너스 같은 선물이었다.

인고의 시간과 기다림의 미학이 녹아든 보석은 지하에서 더욱 단단히 굳혀진다.

그처럼 찻잎을 정하게 따서 덖고 숙성시켜 명품차로 완성돼 가는 일련의 과정 중인 발효실을 직접 탐방하다니.

생래적으로 받지 않는 커피라 평소 녹차를 즐겨왔지만 녹차 성분이 차가운 성질인 데다 살을 빠지게 한대서 세작에서 발효녹차로 바꾼 지 오래됐다.

그러니 이곳 방문이야말로 내게 안성맞춤, 치밀하게 샅샅이 파헤치길 즐기는 나를 위한 맞춤형 공간이었다.

벽돌을 비정형으로 깨서 쌓은 벽체라 자연스럽게 동굴처럼 보이게끔 구현시킨 점 등 섬세한 수작업이 돋보였다.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디테일한 물품들이 한결같이 추구하는 컨셉은 자연친화적인 브랜드철학이 녹아든 것이었다.

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숙성차에 깃든 정성과 시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삼나무 숙성실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결이 살아있는 나무함들과 은근히 번지는 삼나무 향이 심신을 릴랙스 하게 이끌어줬다.

비온 뒤 걷는 숲길, 치유의 숲이나 사려니 숲에 가서다.

깊게 깊게 허파꽈리 죄다 부풀려가며 심호흡할 때 들이마신 그 내음.

넘치는 생명력과 맑은 피톤치드 향 상쾌하게 음미해보았다.

다음에 들어간 녹나무 숙성실은 좀 더 진한 향이 전신을 기분 좋게 휘감았다.

진한 녹색이 뿜어나오는 듯한 산뜻한 향, 그럼에도 저절로 눈 감기게 하는 신선한 내음이 날 매료시켰다.

그 향으로 샤워라도 하듯 한참을 머문 녹나무실이다.

다음은 오크통 안에서 발효 중인 녹차 숙성실이다.

어쩐지 서구 귀족풍인 오크배럴부터가 처음 접하듯 신기한 구경거리다.

와인이나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오크통이 왜 여기? 의아했는데 따는 풍미 부드러운 오크향과 차의 만남 역시그럴싸하다.

봄에 딴 찻잎을 최적의 비율로 로스팅하여 진한 풍미를 입혔다니 센시티브한 향일까.

소비자 취향에 맞춘 프리미엄 브랜드로 아메리칸 오크배럴에서 최장 7년 숙성시킨 고품격 차도 있다고 한다.

이는 연구팀에서 오랜 시간 고민하며 연구 및 실험과 담론을 거쳐 이루어진 결과물들이리라.

올해 오월부터 숙성고를 공개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전에는 전문 인력인 연구실 관계자 외는 금단구역이었다고.

이층에 미디어 아트를 비롯해 멋스러운 티타임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는 건 돌아와서야 알았다.



입맛은 주관적이라 호불호 개인 편차가 있겠지만 내 입맛에는?

삼나무 숙성차는 수수한 맛이 대체로 익숙한 편이라면 녹나무 숙성차는 기대 이상으로 향이 짙었다.

그중 오크통에서 숙성시킨 차가 은근하면서도 깊은 향이 우러나 가장 인상적.

또 하나는 삼나무실에서 오랜 기간 숙성시킨 오설록의 시그니처 발효차인데 ㅌ입맛이 세련되지 못해서인가, 시큰달큰하니 복잡하고도 강한 맛이 나서 내 기호에는 별로였다.

각각의 차 시음 후 밖으로 나오니 흐리던 날씨가 차츰 들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서 녹차밭으로 갔다.

이니스프리 생울타리 지나 판매장이 들어선 제주하우스에 들렀으나 별 볼일이 없어 뻘쭘하니 돌아섰다.

가는 도중 언덕길에 애기동백 붉게 벙글기 시작했고 멀구슬나무 노란 열매 벽공에 멋진 자태 뽐내고 있었다.

저 아래 주차장에서는 소문난 관광지답게 사람들이 무더기 무더기로 밀려들어왔다.

아침나절 붐비지 않을 때를 택해 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서광차밭은 곶자왈 지역인데도 비교적 평지에 조성돼 있었다.

불모지 같았던 돌과 바람이 전부인 제주땅 백만 평 사들여 다듬고 가꿔 유기농 차밭을 일군 선대 회장.

그래서 1979년부터 차 문화를 이끈 선도 주자로 꼽히길 바라는 태평양 아모레인지도.

안개 깊은 날 방문했던 저장성 서호에서 본 광대한 차밭이며 곡선미 아름다운 보성차밭과는 다른 조촐한 분위기.

조밀하게 식재된 차나무 서로 촘촘하게 어우러져 어디서 봐도 나름 아름차다.

언덕길 아래 외따로 서서 거친 바람에 휘둘리고 있는 차나무 한그루, 하얀 꽃 지저꺼분하게 져가고 있었다.

전화기 울려 만날 장소로 떠나기 전, 밋밋한 그대로도 차밭에서 인증샷 하나는 남겼다.

언젠가는 정리해 지워갈 흔적인데 그럼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