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y 13. 2024

구름과 세탁기

카미노 스토리

먼동이 틀 무렵 멜리데를 뒤로했다.

구름 사이로 해가 솟아오르자 온후한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갈리시아 지역의 루고 주를 지나 꼬루냐 주로 접어드니 풍경만 약간 달라진 게 아니라 지방색도 확연히 달랐다.

목축업보다는 임업과 농업 위주로 변하며 대규모 농장주의 주택은 규모도 커지고 반듯했다.

대지 비옥한 이곳 역시 길가마다 안개꽃 닮은 자잔한 야생화 흔하며 연하고 오동통한 고사리 지천으로 깔렸다.

홀로 또는 두셋 이서 조용히 걸어가던 도로는 카미노 종착지가 가까워질수록 단체팀이 늘며 소란스러워졌다.

숲길이나 샘가는 무리 지은 사람들의 왁자한 소음으로 말갛게 고여있던 고요가 허투루 흩어지기 일쑤였다.  

사색의 시간을 놓친 대신 언어가 다르고 국적이 다른 숱한 사람들과 섞이며 고개 주억거려졌다.

'카미노를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란 말이 비로소 실감됐다.




뭉게구름 양떼구름 두둥실 가벼운 구름 중에 비 머금은 난층운은 서로 속도 경쟁이라도 하듯 빠르게 이동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자유롭고자 떠난 여정, 어깨에 깃이라도 돋은 양 날아갈 듯 홀가분한 기분으로 카미노를 걷는 나.

문득 강론 시간에 들은 한 말씀이 떠올랐다.

딴에는 똑똑하다고 자신하는 젊은 순례자가 길을 걸어가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노 순례자를 만났다.

스승님, 진정한 순례자가 되기 위해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노인은 자애로운 시선으로 젊은이를 마주 보며 말했다.

진정한 순례자가 되고 싶다면 자네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원수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섬기게나. 그렇게 한다면 자네는 진정한 순례자가 될 것이네.

젊은이는 지혜로운 노인의 조언대로 살 자신이 없었기에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그 자리를 떠났다.

내려놓는다 했으나 아직도 꼭꼭 끌어안고 있는, 비운다고 하면서 여전히 덜어내지 못한,

품은 거 죄다 털어내겠다 하고도 여태껏 틀어쥐고 있는 내 안의 애집과 응어리들이 빤히 들여다 보였다.   

구름 속에 든 비 언제이고 소낙비 되듯 한바탕 빗줄기 되어 그 모든 것 다 쏟아낼 수 있었으면...

그림 같은 작은 마을에 들러 쉬엄쉬엄 성당 몇몇 구경하고 4차선 대로를 따라 현대적인 도시 아르수아(Arzua)에 닿았다.

도로는 붐볐고 선거철인 듯 포스터로 도배된 벽 앞을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지나쳐 갔다.

어느 나라나 정치판이라면 짜증을 넘어 염증이 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광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함성이 생기로워 모처럼 사람 사는 느낌이 제대로 들게 하는 아르수아였다.

옛 수도원 탄탄한 석조건물을 개조한 알베르게는 외양부터 중후하니 근사했다.

볕 잘 드는 깔끔한 침상, 너른 휴게실의 안락한 의자, 세탁실엔 손빨래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세탁기가 나란히 설치돼 있다.

낡은 토담집과 마주한 뒤란 빨랫줄, 와이파이 등 편의시설도 두루 잘 갖춰져 있었다.

다만 이곳 역시 주방은 있으나 현지 상인들의 경제활동을 돕는 차원에서 직접 조리할 수 있는 조리시설은 치운 상태였다.

역사적인 볼거리라고는 성당 외엔 따로 없는 작은 동네라서 한가로이 배낭 정리를 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졌다.

널어 두었던 양말이 생각나 부리나케 뛰어내려가보니 다른 사람들도 허둥지둥 빨래를 걷고 있었다.



구름이 모여들면 비가 오게 마련이란 말은 근거 확실한 상식이나 종종 무시해 버리는 우리.

당장 햇살 좋다고 세탁하며 건조기를 사용하지 않았나 본데, 젖은 옷 여기저기 걸쳐두며 낭패스러운 표정들이었다.

창밖은 금방 어두워졌다.

작가의 이전글 멕시코인의 자부심, 싱코 데 마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