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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4. 2024

선조와 인조 사이 광해 -상-

한 달여를 콜린성 두드러기로 고생 꽤나 했다.

체질상 평소 땀도 잘 나지 않을뿐더러 사우나 자체를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다.

한국에서야 거의 일상문화로 정착되다시피 한 찜질방이라 당연히 장시간 머물며 과도하게 땀을 냈다.


그 후 온 전신에 두드러기가 돋아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롭게 지냈다.

갑작스런 열 자극으로 높아진 몸 안의 화기가 제대로 순환작용이 안되면서 피부로 열이 올라와 탈이 생기는 콜린성 두드러기.

열사병과 성격은 영 다르지만 둘 다 비슷하게 원인이 온열성이라는 점은 같다.

암튼 열성 두드러기는 체온조절 기능 이상으로 발생하는데, 땀을 내어 체온을 조절하는 신체 기능 이상과 관계가 깊다고 한다.

체온이 올라가면 몸의 자동 시스템이 알아서 땀을 나게 해 체온을 식혀준다.

헌데 땀을 내는 체내 온도조절 체계가 원활히 작동하지 않을 때 피부에 발진이 돋는다는 것이다.

열 순환이 비정상적이 되어 심부(深部) 체온이 1℃ 이상 올라가면 신체 외부의 열도 덩달아 과도하게 높아진다.

이때 열성 알러지인 두드러기를 유발한다는데 사우나로 이런 괴변이 생길 줄이야.

원래부터 진짜 금 이외의 금속 반지나 목걸이를 착용하면 당장 붉은 반점이 돋으며 가려워, 액세서리 따위 전혀 하지 못하는 금속 알러지는 있었다.

점차 나이 들어 갈수록 약간의 스트레스라도 받으면 영락없이 두드러기가 돋았는데 그때마다 들은 말인즉슨 이랬다.

알러지는 원인을 규명해서 그에 따른 근본치료를 옳게 해줘야 한다는 것.

터진 수도관에서 새는 물을 손으로 막아봐야 소용없고 다급한 대로 스프링을 꽉 눌러놓아도 물길은 결국 솟구쳐 나오고 만다.

고로 알러지가 생겼다고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제를 처방받아 복용해 봐도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 셈.

그런 약들은 인체의 과잉 반응으로 인해 나타나는 알러지를 완화하는 데나 사용할 뿐 알레르겐의 근본 원인을 치료해 주는 약이 아니라는 말을 들어온 터다.

발진 초반엔 병원은 물론 약국에도 안 가고 몸이 알아서 스스로 다스리도록 버텼다.

대신 열독을 빼려고 통녹두 삶은 물에 오미자 물 그리고 한방 처방인 황련해독탕을 복용하며 곰탱이처럼 무조건 참고 견뎠다.


혼자 표 안 나게 끙끙 앓으며 증세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으나 아주 서서히 치료 가 되는 한방인 만치 양약처럼 신속한 효과는 기대할 수 없는 일.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에, 작열감에, 불면증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언니에게조차 괴로운 티  안 냈으나 결국 소문은 퍼졌다.

조카까지 알게 되자 젊은 그녀는 요새 같은 대명천지에 답답스레 민간요법에나 기대냐며 막무가내로 병원엘 가자고 했다.

당시 서울에 머물던 중이었고 부산에 사는 아들은 내 상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조카딸이 윽박지르길 병원에 안 가면 아들내미한테 현 상황을 몽땅 다 이르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하는 수없이 내과에 갔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삼일 치 약을 받아왔지만 깊은 잠이나 잘뿐 기대와 달리 발작 같은 소양증이나 피부발진은 차도가 없었다.

그저 어서 속히 미국으로 돌아가 딸내미한테 치료를 받으리라 작정하고 서둘러 표를 바꿔 미국으로 갔다.





침과 뜸과 한약을 병행한 치료 덕에 두드러기 증세가 점차 누그러들며  회복이 됐다


하여간 지독한 두드러기로 인해 화탕지옥 앞에 선 것 같이 들끓어 대는 신체 작열감은 당해본 사람이나 알지 도저히 설명 불가.

전신만신이 거의 불가마처럼 달아올라 얼음팩을 피부에 직접 대도 선뜻하거나 차갑게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즈음, 소양증에 더해 시차까지 겹쳐 줄곧 잠을 설치던 중이라 <서울 역사기행>과 <조선왕조실록>을 붙잡고 번갈아 읽어나갔다.

거기에서 증살(蒸殺) 당한 영창대군을 다시 만났다.

언제 적인지 불분명하나 아무튼 어릴 적에 들은 라디오 연속극 기억도 생생히 났다.

유배지 강화도 작은방에 갇힌 채 뜨거워 죽겠다며 살려달라고 절규하다 비참하게 죽어간 아홉 살짜리 대군 목소리가 떠올랐다.

열독으로 펄펄 뛰면서 문고리를 잡고 버티다 기어코 비명에 가고 만 아이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환청처럼 들렸다.

그간 콜린성 두드러기를 겪으며 고생한 일들에 자연 감정이입이 되니 그 사건이 한층 몸서리쳐졌다.



선조의 열넷이나 되는 아들들 중, 단 한 명 적장자였던 영창대군이다.

정실에게서 난 아들은 대군이며 후궁에게서 난 아들은 군으로 봉해지는데 왕비의 후사는 도무지 종무소식이었다.

후궁 소생만 득시글하다가 선조 나이 오십도 넘어서 왕비가 죽고 계비로 맞은 인목왕후에게서 얻은 귀한 적손이 영창대군이었다.

선조의 경우, 상왕 명종이 적출 없이 죽자 중종의 서손인 후궁 소생 아들의 아들이었던 그가 운 좋게도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처럼 처음부터 선조는 근본적으로 방계 승통이 아니라는 태생적 콤플렉스를 지닐 수밖에 없는 왕이었다.

해서 그는 특히 자신의 후계자만은 적손이길 오매불망 꿈꿨던지도 모르겠다.



선조의 재위 기간은 41년간이었다.

붕당정치 시대를 열어 당파싸움에 의한 사화를 도래케 한데다 두 번의 왜란을 겪으며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한 대외 의존적인 인물.

선조는 우유부단하고 의심까지 많은 왕이었다.

왕비인 의인왕후는 골골거리며 병석에 누운 채 아무리 기다려도 자식을 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별수 없이 후궁 소생 중에서 세자를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기 시작했다.

좌의정이던 정철은 어려서부터 자질 영민한 광해군 혼(琿)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허나 꿍꿍이가 따로 있던 선조의 진노를 사면서 그만 삭탈관직되며 귀양을 간다.

이후 세자 책봉 문제는 감히 그 누구도 표면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와중인 1592년, 20만 대군을 앞세운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어붙여 곧장 한양까지 함락되었다.

급기야 선조는 종묘사직과 백성을 버리고 허둥지둥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여차하면 명나라로 도망칠 계산 아래 압록강 바로 앞에서 엉거주춤 머문 선조는, 만일의 경우 후사를 대비하기 위해 급히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조선반도 남쪽 지역에 분조(비상시에 임시로 조정을 나눔)를 만들어 광해군에게 적군이 날뛰는 후방을 지키라며 아들 등을 떠민 비겁한 아비 선조.

7년여를 끌던 임진, 정유왜란은 충무공의 대활약과 문반 출신 의병들의 봉기로 점차 제압되어 갔다.

이에 더해 광해군이 조선 팔도를 뛰면서 백성들을 보듬으며 동고동락 합심해 나라를 굳게 지킨 결과 마침내 왜군은 물러난다.

심지어 인육을 먹는 사태가 발생했을지언정 그나마 나머지 백성들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전국토는 황폐화되었지만 그래도 나라의 기틀만은 보전할 수 있었다.  

자칫하면 적의 포로가 되거나 망명객 되었을 선조는 천만다행 환궁하게 되고, 왜란 후 난리 끝에 첫 왕비가 죽자 그 경황 중에 새 장가를 들게 된다.

배필은 인목왕후 김 씨, 열아홉 나이에 오십 넘은 선조의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치른다.

이때 1575년생인 광해군은 나이가 서른 가까웠는데, 한참 어린 계비인 서모가 마침내 1606년 적장자 격인 영창대군을 낳는다.

동시에 세자 광해군의 입지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1567년 생인 선조가 늦으막에 젊은 신부를 맞아, 기다려 마지않던 적장자를 비로소 얻었으니 임금의 총애 극진했을 터.

그런데다, 실제로도 선조의 의중은 자못 미묘해지며 변소 갈 때 급한 마음과는 영 다른 마음이 들게 된다.

안 그래도 왜란을 겪는 동안 백성과 함께 고통 나누며 신망 얻은 광해군에게 민심이 쏠려있는 게 영 찜찜하던 선조.

임금도 임금이지만, 왕비는 자신의 아들인 영창을 세자로 책봉하고 싶은 심정 굴뚝같아 얼마나 왕께 채근했으랴.

눈치 빠른 신하들은 왕실의 속내를 간파하고 암암리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선조 역시 대신들에게 공공연히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허나 영창이 두 살 되던 해 선조는 일 년여를 병중에 있으며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러왕위를 광해군에게 선위 한다는 교지를 내리나, 당시 영의정이던 서인 유영경은 이 교서를 감춰버린다.

한편 광해군을 지지하던 반대파인 북인 정인홍(남명학파 거두) 등이 이 사실을 알고 선조에게 고한다.

하지만 이미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선조는 그대로 운명하게 되고 인목대비가 대신 광해군 즉위 교지를 내린다.     

1592년 세자로 책봉된 이래 살얼음판 같은 16년을 견뎌낸 그.

광해군 나이 서른넷에 이르러 드디어 조선 15대 임금 자리에 오르니, 재위를 향한 우여곡절의 긴 수난 여정은 여기서 일단 마무리된다.




임진왜란을 두렵게 치른 선조와 병자호란을 호되게 겪은 인조 사이를 산, 빛나는 바다란 이름의 광해.

광해군 혼(琿) 그는 폭군인가 현군인가, 15년 1개월간에 걸친 재임 시의 공과를 짚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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