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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4. 2024

선조와 인조 사이 광해 -하-

역사는 되풀이된다 하였다.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면 과거의 오류와 비극이 오늘에 다시 되풀이될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겠다. 헌데 시대적 배경만 다를 뿐 광해군에서 인조로 넘어간 그 시절이나, 선거에 패해 정권 실세가 바뀐 요즘이나 하는 짓거리가 한 치 오차 없는 답습이요 빼다 박은 판박이다. 승자독식 현상은 조선시대나 현대나 똑같다. 이긴 자 쪽에서 모든 걸 다 차지해 버린다. 진 편은 국물도 없을 정도를 넘어 끽소리 못하게 만든다. 지금 정권뿐 아니라 과거 모든 권력이 저지른 행태는 거기서 거기 엇비슷하거나 아예 뻔한 공식이요 룰이다.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며 기염을 토하던 정부도 한마디로 역시나였다. 좌건 우건  윗자리에 오르면 내로남불은 관행, 그넘이 그넘 같다. 노선이 달라서인가, 경제분야는 지향점이 두드러지게 다르다. 일당독재국가에서나 통하는 고루 똑같이 잘 사는 평등세상은 자유시장경제 체제하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꿈속의 유토피아일 따름이다. 걸핏하면 외쳐대는 창조경제의 디딤돌이 바로 자유시장경제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기업의 목줄 조여 공장의 원활한 운영은 기대하기 어려운데 생산의 증가 없이 소득주도 성장이라니 허황한 이론은 결국 경제를 망칠 뿐이다. 목적한 대로 정책 방향을 국가 배급경제체제의 사회주의로 바꾸고 싶은 게 감춰진 속내나 아닌지 불안 불안하다.



이에 더해, 선조는 왜란 때 다급히 명나라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난중일기>에서 보았듯 유리한 전세로 이끌기는커녕 명의 해군 치다꺼리하느라 전비부담만 더 커졌을뿐더러 그들이 주는 폐해 역시 엄청났었다. 그럼에도 인조반정을 도운 서인들은 명분과 의리를 내세우면서 망해가는 명나라를 붙들고 천자를 배반할 수 없다며 무조건 대국 떠받들기 바빴다. 그 결과 조정은 주화파와 척화파의 열띤 토론장이 되어 매일 시끄러웠고, 종당엔 인조가 삼전도에서 머리 조아려야 하는 굴욕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얼마 전. 성님나라 중국을 방문한 삼대세습 애송이의 태도야말로 한심지경 아니던가. 하긴 그 나이 수준에 무엇을 바라랴. 싱가포르 무대에서 거들먹거리던 호기 간곳없고 공손히 두 손 앞에 모운 부동자세로 시진핑 앞에 선 꼬락서니라니. 하교 내리면 칙서라도 받아 적듯 메모나 하는 졸장부 아닌가. 주야장천 주창해 대는 주체사상은 간곳없고 도리어 사대주의 사상만 드러낸 그 모습에서, 비굴할 정도로 명나라에 굽신거리다 조선 역사상 가장 큰 패배로 각인된 병자호란을 만나 수모 겪은 인조가 오버랩되었다. 왜 아니겠는가, 한겨울 누루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지 앞에 무릎 꿇고 이마 짓찧던 인조의 굴욕은 진짜 대국을 제대로 분별해 내지 못하고 헛다리 잡은 무지몽매함의 결과였으니.  



험난한 기다림의 세월 끝에 어렵사리 권좌에 앉은 광해는 개혁군주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실리주의 외교노선으로 시대를 앞서 간 왕이었던 그. 광해는 왕위에 오르자 먼저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수습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민초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주기 위해 선혜청을 설치하고 세금제도개혁인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신분 차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뜻하는 대동, 대동소이(大同小異) 또는 대동단결(大同團結) 등이 이르듯 여러 갈래의 세력이 한 덩어리로 뭉쳐 모두가 잘 사는 이상향을 만들자는 의미다.



대동법은 대지주와 양반들의 반발에 부딪혀 전국에 확산되지는 못했으나, 그가 초석을 놓은 이래 백여 년 뒤에야 겨우 결실을 맺게 될 정도로 힘든 개혁안이었다. 왜냐하면 고금 없이 많이 가진 자나 기득권층은 지닌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온갖 수단방법 동원해 필사적으로 저항하기 때문. 해서 많은 전답을 대지주가 독점한 전라도나 경상도까지 대동법을 펴지 못하고 경기도에서만 실시됐을망정 토지 및 호구조사를 통해 민간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었다.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허준으로 하여금 동의보감 간행을 완성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문화면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 국조보감, 동국신속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서적을 펴냈는가 하면 홍길동전도 이때 출간되었다.



기나긴 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재정과 민생안정을 꾀하는데 힘쓰는 한편 전란 중에 불타버린 궁궐과 종묘를 복구하고 실록이 보관된 사고를 재정비하여 왕실의 위엄을 살렸다. 무리한 토목공사로 후유증도 있긴 했으나, 반면 조선왕실은 대대로 그 덕에 호의호식을 누렸다. 마찬가지로 야당의 끊질긴 반대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를 만들고 보니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린 게 야당세력이었다. 광해는 실리적 외교론을 국정에 반영해 나가면서 왕권강화로 당쟁을 종식시키고자 노력했으며 국방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화기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렇게 파진포라는 개량형 화포와 조총 제조에 박차를 가해 나갔으며 무과 등용을 늘려 군대 양성 등 국방력을 키워나갔다. 전쟁에 깊숙이 참여한 전력도 있는 광해라 직접 전투 훈련과 방어 진지를 참관하면서 현장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했다.



왕이 자주국방책에 대해 주야로 고민하던 당시. 명나라는 후금과의 전쟁에 불리해지자 왜란시 조선을 도왔다는 명목으로 파병을 요청해 왔다. 광해는 전후의 여러 상황을 들어 이를 적절히 회피하나 신하들의 반발은 열화 같았다. 광해군일기에 사관이 적은 바를 옮기면, "명이 조선에 베풀어 준 은혜야말로 머리카락을 뽑아 짚신을 삼는다 하더라도 그 은혜를 갚기에 부족하옵니다."라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그만큼 당시 관료들은 명과의 군신, 부자관계에 얽매여 천자국에 대한 명분론으로 포장된 사대주의 정신이 골수에 박혀있는 유생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1만 3천 군사를 명나라에 보내면서 도원수 강홍립에게 광해는 별도의 방비책을 밀지로 내린다.



광해의 외교전책은 양측 모두와 각을 세우는 것보다는 두 곳 모두의 부탁을 적당히 들어주며 실리를 취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 후에도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두 번 이상 사신을 교환하며 후금과의 외교를 이어나갔다. 광해의 속뜻은 후금과 친하게 지내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들로부터 첩보를 알아내 취약점을 분석하여 그에 맞는 대비를 하고자 함이었다. 실제로 당시 동북아 정세는 후금의 급속한 성장에 따라 한치 앞도 알 수 없었던 격변기, 명은 이미 기우는 해였으며 청으로 바뀐 후금은 떠오르는 태양으로 중원의 판도가 바뀌는 대대적인 정권 교체기였다.



"중국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광해군일기에 기록된 대로 왕이 조정 대신들에게 한 말이다. 유사시를 대비 국방력을 강화하여 내실부터 채우고 안을 튼튼히 방비하되, 충돌보다 외교를 통한 안정을 중시하는 그의 국제 감각이야말로 뛰어났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를 중립 외교로 칭하나 양쪽과 적절한 선에서 맺고 끊는 양면 외교라는 표현이 보다 더 적절하겠다. 중립 외교와는 약간 다른 촛점에서 광해가 하려던 외교는 시대적 대세를 잘 읽고 그에 따른 현실주의 외교, 양면 외교, 명과 후금에게 등거리 외교를 하였던 것. 근대 역사학자들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이 취한 중립적 외교노선이야말로 당시 조선왕조가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정책으로 평가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처신 잘해 훌륭한 공적을 남기기도 하는 반면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 지울 길 없는 오점도 남긴다. 특히 리더의 위치에 선 사람일수록 도드라지게 빛나는 공이 있는가 하면 부끄러운 허물인 과도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 하였듯, 지난 정권의 지도자에 대한 평가도 균형 잡힌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호, 불호가 뚜렷이 갈리는 이승만, 박정희뿐 아니라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전직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일 이백 년이 흐른 다음인 먼 훗날, 후세의 역사가에 의해 재평가될 때가 틀림없이 올 터. 몇백 년이 지나서야, 군으로 전락하고 만 임금 광해에 대한 '포악한 군주일 따름'이라는 오해가 이처럼 풀리듯이.



물론 그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광해의 과오이자 다수의 정적을 두게 된 배경이기도 한 일들이 즉위와 동시에 벌어지는데.. 광해는 왕위 계승과정에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서인 유연경 등 반대파를 숙청하기 시작한다. 당시 조정은 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터에서 고락을 같이하며 용맹을 떨친 의병출신 거개를 광해는 등용했었는데 이는 당연지사이리라. 정인홍을 필두로 남명선생에게 수학한 제자들이 대부분인 그들의 사고는 자주적이고 실리적인 면이 다분했다. 반면 인목대비를 낀 영창대군파인 서인은 율곡과 퇴계 문하생으로 유교적 명분과 의리에 목숨 건 사대주의자이자 보수적 기득권층으로 북인에게 빼앗긴 정권탈취에 혈안이 된 인물들이었다.   



오래고도 긴 세자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왕권에 얽혀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던 광해다. 즉위한 해인 1608년 명나라에서 왕위 계승에 대한 진상조사단이 왔다. 모멸감에 떨던 광해는 줄곧 왕좌를 넘보던 동복형 임해군을 그때 제거해 버린다.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인 광해군에게 형인 임해군이 있었으나 그는 본래 성정이 고약하기로 소문난 자라서 왕의 재목으로는 결격사유가 많았었다. 세자책봉조차 이른바 대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던 당시, 선조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을 제친 채 둘째를 세자로 삼을 수 없다며 임명칙서 보내기를 미뤘던 명이다. 이런 트집을 잡는 명에 대한 광해의 분노가, 왕위를 도둑맞았다며 자신을 비방하고 다닌 형의 처사에 그여히 폭발하고 만 것.



영창대군도 1613년에 일어난 '칠서(七庶)의 옥(獄)'을 빌미로 유배시켜 죽게 한다. 모종의 음해공작 같기도 한 '칠서의 옥'은, 강남의 논다리족처럼 양반가 서얼 출신 일곱이 모여 저지른 사건이다. 떼 지어 화적질을 하며 허랑방탕 지내던 중 문경새재에서 은상으로부터 은을 강탈하고 살해한 사건의 피의자로 그들이 잡혀오면서 비롯된다. 일찍이 1415년 태종은 양반가 자식이라도 첩 소생은 관직에 나갈 수 없다는 법을 만든 이후 그들은 벼슬길이 막힌 자들이었다. 죄인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벌인 사건이라는 자백을 받아낸다. 그 일로 김제남은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시켜 귀양 보낸 다음 증살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기에 이른다.



이 사건을 명분으로 내건 무력정변이 1623년 3월에 일어나는데, 사전에 반란군과 내통한 훈련대장 이홍립이 궁궐문을 열어줌으로 반란은 쉽게 성공을 거두게 된다. 결국 광해는 이복형의 아들인 한 조카가 주도한 계해정변(인조반정)으로 왕좌에서 강제로 축출당하고 만다. 정변의 명분으로 내세운 광해군의 죄상은 크게 나눠 두 가지다. 하나는 천자의 나라인 명을 배반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화친을 도모한 외교정책이었다. 다른 하나는 계모일지언정 모후인 대비를 핍박하고 형제를 살해(廢母殺弟)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계해정변은 서인의 정권찬탈 쿠데타에 다름 아니고 개인적 원한에서 비롯된, 말 그대로 반정일 뿐인 인조반정인 셈이다.



지금 시각으로 본다면 광해는 사대주의자들과 정치적 이념이 다를 뿐 오히려 현실적 안목을 가졌던 현군. 인조반정은 광해가 겨우 국내외적으로 다져놓은 안정기반을 무너뜨린 반란에 불과하나 역사는 철두철미 승자의 기록이다. 광해군일기라는 실록을 편찬한 사람들은 서인세력이었으므로 당연히 광해는 악정을 펴다 쫓겨난 군주로 비하 왜곡시켜 기록될 밖에. 무력정변으로 권좌를 차지한 능양군은 1615년 신경희의 옥사 당시 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에 의해 죽임을 당한 능창군의 친형이다. 원래 선조는 인빈 김씨의 소생들을 각별히 총애했기에 세자 책봉 역시 그녀 소생인 신성군이나 정원군을 의중에 둔 터였다. 신성군이 일찍 죽자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이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된 데다가 군왕의 자질을 갖고 있다는 평을 듣던 인물이었다. 그 바람에 능창군은 왕권에 위협되는 인물로 지목되어 제거됐고, 과거의 원한이 인조반정의 또 하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일평생 진심으로 믿을 사람이라고는 누구 하나 곁에 없었던 외로운 군주 광해. 어머니나 외가의 그늘막도 없을뿐더러 동기간도 없는 혈혈단신 외톨이. 왕 위해 목숨 바칠만한 충신, 어떤 경우라도 죽음 불사하며 왕을 지킬 수 있는 완벽한 자기편을 만들어 놓지 않아 역모에 당하고 만 왕. 이 대목에 이르면 자연히, 온갖 추잡한 죄목을 뒤집어쓰고 무고하게 탄핵당한 박근혜를 떠올리게 된다. 설령 그녀에게 과가 있다 할지라도 그 정도 막무가내로 대역무도한 죄인으로 몰아간다는 건 정녕 아니라고 본다.



친정아버지가 북인이란 이유로 출신성분 들먹이며 왕비 유 씨를 폐하라는 상소가 올라왔을 때 광해는 나도 북인이니 같이 폐하라, 당당했던 왕. 그는 측근들 하나 없이 창졸간에 권좌에서 밀려나면서 죽어 마땅한 죄인 되어 폐세자 내외와 부인과 함께 강화도에 위리안치된다. 당시 이십 대 중반이던 아들 내외와 아내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유배생활의 불행을 누르고 묵묵히 운명을 받아들인 광해다. 광해 이혼은 18년에 걸친 귀양살이를 초인적 인내심으로 의연히 견뎌내고 1641년 67세를 일기로 제주도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숨을 거두기 전 그는 어머니 공빈 김씨의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 살 때 어머니와 사별해 모성의 따뜻한 품을 모르고 자란 광해는 구중궁궐에서 비 맞은 새처럼 춥고 외로운 유년기를 보내며 다만 학문에만 정진했다. 가장 맛있는 음식이 무엇인가를 묻는 선조의 질문에 어린 광해가 모든 음식의 기본이 되는 소금이옵니다, 라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광해였다. 그만큼 생각이 깊고 영특하긴 했지만 아버지는 후궁 소생인 그를 눈여겨보거나 별로 귀애하지 않았는 데다가, 심지어 왜란 후엔 왕권과 관련해 아버지로부터 심한 시기질투의 대상까지 되고 만다.



세자 시절부터 측근 참모로 의병장이 되어 곁을 지킨 이이첨은 광해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렇게 대사헌 직에 오른데다 세자빈의 외조부가 되며 온갖 권세를 누렸다. 허나 뒷날 반정 기미를 알면서도 역모를 왕에게 알리기는커녕 슬쩍 눈 감아버림으로 마지막 판에 광해를 배신한다. 가계도에도 나타나다시피 왕은 뭇 후궁을 거느린 적 없으나 단 하나 누이처럼 어미처럼 의지한 여인 김개시도 똑같았다. 열여덟 나이의 세자가 거처하던 동궁 나인으로 들어온 김개시는 조선조 장녹수, 정난정과 더불러 요부로 불리긴 하나 일면 상황판단이 정확하고 눈치 빠른 영악한 여자였다.


세자와 가까웠던 그녀는 우연히 선조의 눈에 들어 성은을 입고 특별상궁이 되나, 개시는 이후로도 외톨이 광해를 보살피면서 유능한 조력자 역할을 하며 그의 편이 돼주었다. 왕위에 대한 위협이 끊이질 않아 경계심이 고조돼 늘 불안하게 지내던 광해는 점점 국정운영조차 폐쇄적이 되어갔다. 이런 광해를 푹 싸안고 최측근으로 군림하던 김개시. 광해 재위 당시 마음껏 권세의 단맛을 본 개시는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철저히 왕을 배신하고 반정 세력과 손을 잡는다.



그렇게 광해를 내치고 정권을 잡은 인조의 삶은 어떠했던가. 광해군 시대 득세했던 대북파 2백여 명을 모두 숙청해 씨를 말리므로 인조 이후 남명학파는 완전히 맥이 끊기고 말았다. 퇴계와 율곡학파인 서인은 승승장구 득세하며 붕당정치의 폐단을 키워나가 조선후기까지 사색당파의 정쟁을 이어가게 만들었다. 인조는 반정 정권이 들어선 지 채 일 년도 안 돼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부하가 일으킨 난리를 만난다. '이괄의 난'이라는 반란 사건이 터지자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주하기도 했으니, 국가 기강은 땅에 떨어졌고 당연히 백성들은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인조 2년 무렵 병조에서는 누차 국경수비의 필요성과 그 준비를 주청 했지만 "오랑캐 추장(누르하치)은 하찮은 자에 불과한데 수비할 생각만 하고 싸울 생각은 왜 안 하느냐? "며 힐난만 하고는 간단히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민생은 더더욱 피폐해지며 민초들의 원성은 드높아갔다. 다시 얼마가 지난 후인 1636년 병자호란이 터졌다. 그토록 비하한 누루하치 휘하가 침공해 오자 아무 대책 없이 부랴 사랴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된다. 국태민안은커녕 그는 두 아들이 청에 인질로 잡혀가 아홉 해씩이나 볼모생활을 하게 했으며 죄 없는 백성은 무수히 노예로 끌려가게 만들었다. 특히 50만에 이르는 여인들의 수난사가 벌어져 '환향녀'라는 비극을 낳게 한 무능한 군주 인조.


종당엔 후궁 조소용의 이간질에 휘말려 볼모로 끌려갔다 겨우 귀국한 소현세자를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독살하는 극악한 면마저 보인다. 당시 세자가 들여온 서양문물을 왕이 옳게 수용했더라면, 아니 그가 살아있어 왕위를 승계했다면 조선은 일본 명치유신보다 훨씬 앞선 2백 년 전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선진국이 될 수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역사에 붙여보는 if는 무의미하.



인조는 강탈한 왕좌에서 초장부터 신하의 반역으로 고초 겪은 데다, 적장 면전에서 치욕스레 무릎 꿇은 유일무이한 왕이 되고 말았다. 그뿐인가, 왕의 자리을 두고 친아들을 시샘해 가차 없이 제거했으며 세손을 비롯 이리디 어린 손자들과 며느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용렬해빠진 왕이었다. 탁상공론에나 능한 서인 정당의 눈 어두운 국제정치 감각에 편승해 친명배청주의를 고수했던 외눈박이 왕.


결국은 호란을 불러 전국토는 쑥대밭이 되는 등 그의 재임 내내 조선 경제는 파탄지경을 면치 못했다. 따라서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으니 선조와 마찬가지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왕으로 각인된 인조다.

둘의 성군을 제외하면 이씨 조선왕조는 말도 안 되는 세습제에 의해 방만하게 국가경영을 하면서 어둠의 세력과 결탁한 음모와 왕권을 차지하기 위헤 혈육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르며 그렇게 어거지로 이어져갔다. 인조 역시 눈에 띄는 치적도 남기지 못한 채 고통으로 점철된 왕 자리를 26년이나 잡고 있다가 둘째 아들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5세로 눈을 감았다.


조선왕조실록 사진을 올려놓고 전편에서는 알레르기 얘기로 서두가 길었다.  이번 역시 다른 주제, 그러나 전혀 엉뚱하지만은 않은 요즘 정국과 관련된 개인적 견해나 관점을 대입시켜 보는 것도 의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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