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의 봄 들녘

2018

by 무량화

한국의 봄은 남도에서부터 온다.

제주 유채꽃에 이어 구례 산동마을의 산수유 기별 오자마자 섬진강가 매화 향 풀린다.

잇따라 산자락마다 진달래 피고 하동 벚꽃이 꽃구름 이루면 곧이어 등운곡에 비밀스러운 등꽃 터널이 열린다.

꽃축제가 무르녹을 즈음에야 연연한 라일락이며 새하얀 찔레꽃 청향 더불어 수줍게 봄 마실 나온다.



뉴저지의 봄은 눈 속에서 피는 크로커스 수선화로부터 열린다.

길가 민들레 돋아나면 개나리 휘늘어지고 목련화 벙글면서 숲 속에 희고 붉은 도그우드 꽃 선연한 자태 드러낸다.

밥풀떼기꽃 능수벚꽃 봄인사 전하자마자 체리꽃 겹벚꽃 시샘하듯 마구 터지면서 바야흐로 등꽃도 피기 시작한다.

숲 언저리에서 인동초 향 번지는가 하면 찔레꽃도 무더기로 피어나 분냄새 같은 향기로 은근 유혹을 해댄다.



캘리포니아에서의 꽃마중은 들쑥날쑥, 늘 날씨가 좋으니 대중도 없고 순서도 없어 굳이 봄맞이라 이름하기도 어설프다.

살면서 여태껏 보아왔던 바대로 봄의 막이 오르면 봄꽃들이 차례로 줄지어 질서 있게 등장하는 게 아니다.

계절의 경계도 뚜렷지 않은 데다 꽃조차 자유분방, 도무지 제멋대로라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꽃들마다 달력 무시하고 저 피고 싶을 때 그냥 핀다고나 할까.

자두꽃 아몬드꽃에 이화 도화가 만개했다 꽃비 되었건만 이제야 수선이 청신한 봉오리 열고 뒤뜰 등꽃도 폈다.

이곳은 사철 부켄벨리아 열정적으로 피어있고 재스민꽃 레몬꽃 온데 지천이니 실상 봄 마중하기조차 열적다.

정월도 이울기 전에 목련 개화하더니 시절 앞당겨 지금 한창 라일락 향긋하며 덩굴장미도 열나게 피기 시작한다.

앞뜰엔 수선화 옆에 장미화, 뒤뜰엔 등꽃 덩굴 아래 장다리꽃 제철이라 벌 나비 분답다.

지난해 3월 야생화 언덕의 눈부시던 파스텔화 전경을 봄 들머리부터 그리도 기다렸으나 올핸 예년 같지가 않다.

비라고는 겨울철이나 좀 내릴 뿐인데 겨우내 가물었으니 들녘 메마를 대로 메말라 사막화 현상만 부채질...

파피 루핀 골드필드 피들넥 모든 야생화 삼월 들녘에 한껏 흐드러지게 불어라, 봄바람.



봄바람 타고 갈만한 곳이 있다. 건너다 보이는 산 하나 넘으면 레오나 밸리가 기다린다.

밸리에 있는 엘리자벳 레이크 못 미쳐 서쪽으로 난 도로를 타고 가면 Bouquet Canyon이 나온다.

거기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 PCT) 구간의 일부인 산길 트레킹하고자 나선 걸음이다.

고향 뒷동산같이 유순한 산세 이어진 흙길을 걷노라면 심신 평온해지는 곳.

헌데 푸르게 봄물 오르는 전원 풍경에 취해있다가 그만 들머리 길목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저만치 엘리자벳 레이크가 해묵은 버드나무와 느티나무 거느리고 나타났으니 말이다.

봄비가 자주 내린 덕에 좌측 호수는 어느 때보다 저수량이 풍부했으며 주변엔 생기가 넘쳐났다.

엘리자벳 레이크 로드 삼거리에서 랭커스터로 넘어가는 우측 산등성이에

아지랑이 아른거리듯 고운 색감이 감돌고 있음을 본 것은 바로 그 순간.

바로 차도 옆으로 색색의 주단필을 펼친 양 비스듬한 언덕 가득 야생화 축제가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멀리서는 연연한 파스텔화였지만 급한 마음에 엎어질 듯 내달아 가까이 다가서 보니

점묘법으로 그린 화사한 수채화 화폭 여기저기 물기 머금은 채 펼쳐져 있었다.

대형 캔버스를 채운 퍼플빛 루핀이며 라벤더, 주황 파피, 연미색 크림컵, 진노랑 골드필즈 등등....

그런데 라이카는 그만두더라도 디지털카메라도 아닌 폰으로 찍어댄

사진 솜씨가 영 형편없어 참으로 미안하구나, 야생화들아.



팜데일 인근의 레오나 밸리(Leona Valley)는 체리 밸리(Cherry Valley)다.

유월 체리 시즌이 되면 주말 축제가 펼쳐지며 퍼레이드 열리는 등

산간마을 레오나 밸리 2차선 도로는 해마다 인파로 붐빈다.

초입의 빌라 델 솔(Villa del Sol) 체리 팜을 비롯해 십여 군데의 체리 농장 외에도

아몬드, 포도, 아시안배 과수원이 주위에 산재해 있는 농장 지대인 레오나 밸리다.

진달래라도 피었음직한 우리네 시골 정경 같은 전형적인 농촌인 레오나 밸리에 들어서면서부터

뜻밖에도 이미 철 지난 줄 알았던 아몬드꽃, 체리꽃도 만나는 횡재를 했다.

기온이 인근 타 지역에 비해 15도나 낮은 지형적 특색 덕이었다.

그나저나 지금사 꽃 피운 체리나무, 언제 도톰하게 체리 키워 빨갛게 익힐거나.

토요일 오후, 잠시 봄바람 쐴 겸 마실 나왔다가 애초 계획한 산행은 못했지만

감사하게도 밀밭 이랑에 일렁이는 초록 물결도 보았고

꼼지락거리며 새순 촉 틔워가는 포도밭 행렬도 스쳤다.

무엇보다 들꽃들이 선사한 야생화 향연이야말로 이 봄의 특별 보너스로

나 어제 심. 봤. 다! 2018

Elizabeth Lake Rd, Leona Valley, CA93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