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하늘과 바다 & 노오란 유채꽃길

단상

by 무량화


서귀포 어디나 유채꽃이 절정기를 맞았다.

노랑노랑 부드러이 파도치는 유채꽃밭은 새파란 바다와 강렬한 색채 대비를 이룰 때 더 눈부시다.

에 배경은 수석처럼 잘생긴 성산일출봉이다.

게다가 인심 좋게도 대단지로 가꿔 무상으로 시혜를 베푸는 장소가, 광치기해변과 식산봉 내수면을 바라보며 끝 모르게 펼쳐졌다.

과연 명성은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이쯤은 돼야 유채꽃 명소로 명함 디밀만한 여건 아니랴.

여리여리 연한 햇병아리처럼 이쁘고 고운 유채꽃.

푸르디푸른 바다와 색의 조화를 이뤘다.

대기 모처럼 투명하기에 나선 걸음, 바람 고요하고 하늘 화창한 날이기 망정이다.

파도 심하게 몰아치는 날이라면 아마도 유채꽃은 청순가련형 캐서린이겠고, 남성적 에너지 넘치는 바다는 사랑을 놓치고 포효하는 히스클리프 같겠다.

이 생각이 문득 든 까닭은 웨딩 촬영을 하는 커플을 보면서다.

이제 더 이상 신부는 고전 속 앳된 신부가 아닌 서른 훨씬 넘긴 당당한 커리어우먼 스타일이고 외려 신랑이 수줍다.

세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급변하고 있다.

세태 또한 올드타이머 인식으로는 일반적인 추세나 풍조가 낯설다 못해 진기하다.

왜 아니 그러할까.

남아선호사상에 길들여진 세대 여성은 어머니의 생애를 통해 칠거지악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았으며 수동적이어야 했고 일방적 순종과 자기희생을 당연시했다.

물론 용감하게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생을 개척해 나간 당찬 여성도 있긴 했으나, 40년대 생 대부분은 알게 모르게 거의가 다 조선시대를 살지 않았을까.

60년 들어 회사나 직장에서 여성은 차 준비 같은 허드렛일을 하는 김양, 이양으로 불리기 예사였다.

교직에나 있어야 선생님 대접을 받으니 여고에서 대학진학자 다수는 사대나 교대를 택하던 시절.

격변의 70년 즈음, 촌에서 상경한 처자들이 공장에서 미싱 돌려 남동생 학비를 대던 게 당연시되던 당시였다.

근자 재점화된 해외입양인 수출과 관련된 문제도 바로 이 지점과 맞물린다.

산업화를 통한 경제성장만을 최우선시했던 7~80년 무렵, 농촌 인구가 도시의 공장으로 유입되며 사회경제적 약자인 젊은이들의 해이해진 성 풍조 결과가 낳은 서글픈 풍속도.

고도성장만을 추구했던 국가 사회적 무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달콤한 결과에 안주해 온 우리의 침묵도 죄였음을 반성해야.



이 같은 급격한 사회 변동이 가져온 과도기적 극심한 혼란을 거쳐 올림픽이 열린 이후부터 명실공히 여권신장의 기틀이 마련된 한국이다.

국제 행사를 통해 한국 사회가 더 개방적으로 변모했으며, 기존의 가부장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여성의 사회 진출과 활동을 적극 장려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높은 교육열 덕분에 다양한 분야에 여성 고학력자가 준비돼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아무튼 불과 50년 안팎에 이뤄진 변혁이다.

하긴 미국조차도 여성해방운동이 목청 높여 투쟁해서만 이루어졌다기보다 세탁기, 청소기, 냉장고 등 가전제품이 보급되면서다.

1920~1930년대 일이다.

집안일로부터, 부엌 가사노동으로부터 벗어나며 여성들의 사회참여는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특히 여성들의 명실상부한 힘은, 2차 대전으로 남자들이 징집돼 전선에 배치되면서 텅 빈 공장 노동자를 여성으로 대체하면서부터다.

전후 가정으로 되돌아간 경우도 있지만 이로써 여성 인권 신장과 경제사회 활동 참여의 확대 기회로 이어지는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

미국도 1950년대 들어서야 여성의 참정권이 허락됐으니 말해 무엇하랴.

1920년에 이미 헌법은 수정 제19조가 비준되며 법적으로 허용됐으나 이렇듯 한참 후에야 겨우 백인여성도 투표를 하게 됐다.

모든 여성들의 실질적인 투표권 행사는 1965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고.

이는 흑인인권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와 겹친다.



3년간 끌어온 육이오로 피폐해진 산하, 한국은 궁핍하기 짝이 없는 매우 초라한 나라였다.

전쟁의 참화로 아프리카보다 더 열악한 후진국이 돼 해외 원조를 받아 고픈 배와 영양 결핍을 채워야 헸다.

실제로 국민학교 다닐 적에 교실에서 우윳가루와 옥수숫가루 배급을 받았다면 딴 나라 얘기라 할까.

운크라(UNKRA)라는 영어가 찍힌 장정 키만 한 둥근 통에서 나눠주던 탈지유를 누런 봉지에 받아온 우리.

우유를 물에 타 마시면 배탈이 나, 주로 묽게 개어서 양은 도시락에 넣어 밥솥에서 익혀 간식 삼아 먹었다.

오죽하면 그 무렵 처음 맛본 요깡의 매끄러운 감미에 녹아 지금껏 기호식품이 된 연양갱이라면 이해되려나.

점방에서 파는 왕사탕과 셈베이 외에 바둑껌이나 미루꾸, 드롭프스는 장날이나 돼야 구경했다.

군 소재지 읍내에서 아버지가 유지라 기와집 이고 산 우리 형편이 이러했다면 일반적 생활 수준이 어떠했을지 짐작될까?

위고비라나 뭐라나 살 빼려 목숨 걸고 다이어트하는 시대의 풍요 속에서야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궁핍을 겪다 보니 내핍생활이 몸에 밴 우리 세대다.

허기져 맹물로 배를 채워야 했던 그런 세월을 살아낸 우리, 그래도 그 시절의 순수가 좋았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 누리며 살았으니 복된 삶이었다.

더구나 일 년 앞을 예측키 어려운 AI시대에 이르자 거듭 그 축복이 감사하게 여겨진다.

참으로 생각의 가지는 제멋대로 벋어나간다.

웨딩사진 촬영을 보다가 사유의 세계는 예까지 흘러와버렸다.

유채꽃길 걷던 중에 어쩌다 샛길로 빠져도 너무 빠져버렸다.

아름다운 꽃에 대한 결례라 이만 서둘러 마무리.

성산 유채꽃의 환대 고마웠어요.

- 26/4/1 현재 성산유채꽃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