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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5. 2024

샌 미카엘 미션ㅡ 대천사의 영욕

캘리포니아 미션

돌로레스 미션에서 해남 대흥사 부도밭을 떠올렸다면 미션 샌미카엘에서는 천년고찰의 일주문이 연상되었다. 한길가까지 마중 나와 외따로 선 종탑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이제부터 천천히 이야기가 있는 샌미카엘 미션으로 들어가 본다. 정식 명칭은 Mission San Miguel Arcangel이다. 부르기 쉽게 미션 샌미카엘이라 칭한다. 가톨릭 용어는 통상용어와 달리 라틴어, 스페인어, 영어가 뒤섞여 더러 혼란을 준다. 미국 가톨릭 계에서는 신부를 Father라 부른다. 스페인어로는 padre가 되겠다. 한술 더 떠 대부를 미국인들은 아예 God Father로 격상시킨다.



맨 처음 미션 샌 미카엘 터를 잡은 Fermin de Lasuen 신부와 Sitjar 신부는 사탄을 물리치는 대천사를 뫼신 자리가 만고풍상을 겪을 줄 짐작이나 했을까. 그 지역은 수원이 풍부하고 사방으로 들이 넓어 Salinan 원주민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1797년 열여섯 번째 미션을 봉헌해, 첫 세례자를 배출할 당시만 해도 그들은 벅찬 희망에 부풀었으리.



안정이 겨우 될 무렵 대화재로 첫 미션 건물은 소실되었다. 다시 어도비 벽돌로 재건, 교회를 중흥시킬 때까지 여러 신부들의 노고와 원주민들의 피땀이 바쳐졌을 터. 그 도중 Cabot 신부가 인근에서 유황 온천을 개발해 원주민들의 고질인 관절염 치료에 도움을 주었다. 얼마 후 미션은 멕시코 정부의 란초스(Ranchos) 정책에 따라 폐쇄당하고 프란치스칸들은 떠났다. 멕시코 정부는 이주민의 정착을 독려하여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개인에게 국유지를 불하했다. 영어의 랜치(Ranches)에서 파생된 란초스는 매각된 토지에 딸린 가축까지 포함됐기에 이후 목장이라는 의미로 고착되었다.



세속화 이후 미션은 퇴락의 길을 치달려 황폐화되고 만다. 주인 없는 난파선에는 쥐떼가 들끓기 마련이다. 쓸만한 물자는 이미 지역 수비대장이 싹쓸이해 갔다. 나머지는 너도 나도 집 짓는데 쓰려고 재목감이나 벽돌을 거둬갔다. 정성 들여 제단에 그림을 그리고, 창마다 유리 대신 무두질한 양피로 다듬었던 미션은 마구잡이 약탈 이후 서서히 잊혀졌다. 흙벽은 빗물에 무너지고 목재는 삭아갔고 지붕은 내려앉았다. 적막강산으로 인적 끊긴 채 방치된 미션은 영락없이 귀신 나올 것 같은 형세로 몰락했다.



그 와중 흥청대는 골드러시를 타고 센트럴 캘리포니아가 급부상하며 미션 샌미카엘은 호텔로 개조된다. 지역 수비대장인 바예호 장군의 딸 가족이 호텔 경영자로, 그녀의 남편 William Reed가 미션을 손에 넣는다. 동서양 어디나 대격변의 혼돈기를 수습하는 책임자가 양심적인 경우도 있는 반면, 사사로이 욕심을 채우는 숭악한 파렴치한도 나온다. 일확천금에 눈먼 세상은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편법으로 미션을 얻은 리드 일가가 양피와 금을 집에 쌓아놓고 산다는 소문이 돌며 떼강도의 표적이 되어 그곳에서 무참스레 몰살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점점 더 미션은 공포스런 유령의 집으로 변해간다.  



1859년 가톨릭 교구에 반환된 미션은 부분 보수를 해가면서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고요히 혼자 머물며 비움을 실천하려는 수도사들이라도 견디기 어려운 시기였다. 다행히 유황온천을 개발하며 마을이 형성된 인근 파소 로블레스가 와이너리로 명성이 높아지자, 그 지역 신자들이 미션 샌 미카엘의 궁색한 살림을 그런대로 도왔다. 묘하게 돌고 도는 윤회의 고리요 인과의 결과였다. 그러나 다시 엄청난 수난이 미션에 닥쳐 완전히 초토화시킨다. 영고성쇠를 거듭하는 존재의 무상함이여.



탐욕스러운 인간의 검은 손길을 간신히 벗어난 미션도 어마무지한 자연재해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2003년 일대를 강타한 대지진으로 우여곡절 속에서 힘겹게 버텨온 삭은 육신은 그대로 붕괴되고 말았다. 모래성처럼 허망히 무너진 폐허를 복구하는 데는 자체 모금과 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조각 진 파편을 퍼즐 맞추듯 모아 대대적인 성형수술로 봉합시킨 모습이 현재의 누더기 진 미션 샌 미카엘. 천신만고 끝의 회생이다.

악과 대적하는 대천사 이름을 빌린 미션 샌 미카엘. 온갖 영욕을 겪고 파란만장의 역사를 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따금 한국에서 풍경마저 미동도 하지 않는 정적 속 고색창연한 절을 찾을 경우. 으레 퇴락한 단청, 닳고 닳아 반들반들 목리 드러난 문설주, 이끼 푸른 석탑, 기와골에 돋은 잡초와 기우뚱한 해우소며 허물어진 흙담가에 흐드러진 망초꽃을 만나곤 했다. 고찰의 정적 속 무채색 낡음이 평온하니 호젓했다면 미션 샌 미카엘 분위기는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부터 들었다. 첫눈에 든 낯익은 세라 신부 동상과 담황색 지붕을 휘덮은 이끼는 반가웠으나 마당 어귀에 놓인 대포가 들뜬 기분을 이내 잦아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일대는 수자원이 풍부해 농사를 짓거나 과수를 가꾸기 적합했다. 포도나무 올리브나무도 있었던가, 석회로 땜질을 한 정문 곁엔 올리브 유착기가 서있고 풍우에 빛바랜 마차는 마당가에서 삭아간다. 모둠살이는 대체로 평온하고 풍족했으며 규모가 컸음을 짐작게 하는 연자방아와 큼직한 화덕도 보인다. 분수대는 의젓한 풍모로 미션의 격을 높여준다. 땅에 누운 맷돌 옆에는 새봄을 기약하는 수선 촉이 파랗게 올라왔다.

 
미션 내부로 들어갔다. 실내는 좀전까지도 격전을 치른 듯 어수선하다. 정리가 덜 된 전시실, 원주민인 살리난 부족이 남긴 왕골 공예품 몇 점이 진열돼 있다. 다음 전시실은 벽과 창살마다 문양을 그려 넣는데 쓰인 물감 말라버린 그림 공방이다. 절집을 장식한 단청과 탱화처럼 미션 곳곳에는 유난히 그림 치장이 많았다. 광물성 안료 중에는 산호세에서 채취한 주홍색 주사도 있고 멕시코에서 가져온 돌에서 코발트블루를 얻었다. 선인장 즙도 이용했고 석회며 숯이나 황토에서 취한 천연안료들이 전복 껍데기에 담겨있다. 인근 해안에 전복이 흔한 듯 카멜 미션에서도 얼굴 크기 전복패가 널렸었다.  


침침한 조명, 퀴퀴한 먼지 냄새,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회벽은 곧 무너질 것만 같다. 거미줄이 얼굴에 걸릴듯한 작업실에는 포도주 발효 장치며 직조기가 있고, 양초 제조틀이 문명생활에 가까이 다가갔음을 일러준다. 그을음으로 우중충한 식당을 지나자 어둑신한 침실, 탁자 위에는 책과 두루마리 필기도구가 널려 있다. 양피로 바른 창문은 비가 들이쳐 얼룩지고 헐어 반쯤은 너덜거렸다. 주술 걸린 박쥐가 날아오를 것 같이 냉하고 음습한 기운을 그나마, 구석자리에 서서 칼 높이 치켜든 다이내믹한 미카엘 천사 상이 희석시켜 준다.

 
너무 매끈하고 세련되게 꾸며진 옛것에도 거부감이 들지만, 켜켜로 쌓인 시간의 먼지가 온데 떠도는 괴괴한 분위기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이상하다. 가야고분 발굴장도 흥미롭게 따라다니고 경주 불탑골 답사팀을 쫓아다닌 전력이 있음에도 왠지 이 분위기는 께름칙하다. 한때 흥성했던 과거의 영화는 간데없고 빗물 얼룩진 천정과 흙벽, 예스러운 운치를 고스란히 간직했건만 마음을 아늑하고 평화롭게 해 주기는커녕 은근 등 뒤가 오싹거려진다. 후원으로 나왔으나 역시 손볼 곳 투성이라 심란스럽다. 웃자란 나무와 잔디보다 더 무성한 잡초가 멋대로 뒤엉켜 괴기 영화 세트장같이 황량하고 을씨년스럽다.


지금도 사용된다는 채플은 대성당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작고 협소했다. 양 벽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목판에 양각돼 좌우로 배치돼 있다. 미션 샌 미카엘에서 가장 주목할 곳이 제대 위의 그림이라는데 어둠 속에서 아무리 올려다봐도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 Esteban Munras라는 스페인의 유명 화가를 초빙해서 살리난 원주민과 함께 그린 'All seeing Eye' 란 작품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헤아리시는 자비의 하느님 눈, 섭리의 눈이란다. 전지전능자의 만능의 영안이련만 경외감보다는 비의(秘義)가 담긴 것처럼 보이는 데다 온유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그런 기분에 옭말린 채 숱한 살리난이 잠들어 있는 세미트리까지는 둘러볼 엄두가  도시 나지 않는다. 마침 일몰 시각도 가까워져 서둘러 미션을 뒤로하고 어둠살 내리는 길 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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