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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6. 2024

21세기 딴 세상 깡깡이 마을

부산 구석구석

바로 전날, 초현대식 마린시티를 다녀온 뒤라서 더 극명하게 대비되는 걸까.

영도다리를 건너 찾아간 깡깡이마을은 부산 영도구 대평동 남항동 일원에 위치했다.

자갈치 시장이 마주 보이는 곳이다.

건너다 보이지만 영도대교 남항대교가 맞닿아 있다.

자갈치의 피란민 가족상 일별하고 다리 건너 영도에 닿으면 영도다리 상징물이 기다린다.

영도다리 기념 현판과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그것이다.



낙후된 마을에 문화니 예술이니를 덧칠해 놓는다고 본래의 남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흰여울마을, 감천마을, 초량이 그러하듯 아직도 이리 누추한 동네가 있다는 게 의외였다.

마린시티와 같은 최첨단 생활환경과 깡깡이마을이 아무렇지 않게 동시대에 공존하고 있다니.

가난은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 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구차한 삶의 현장과 맞닥뜨리자 아연해졌다.

빈부 차이 극심한 양극화 현상이야 자유시장 경제 체제에 살면서 수시로 목도하였지만 여긴 더 심했다.


이럴 수가... 역사란 여기에 이르러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

불과 십여 년 만에 부산에서 최고의 지위를 점한 마린시티.

그에 반해 백여 년이 넘는 마을 역사와 이야기가 녹아있는 대평동의 오늘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원래는 대풍포라는 한적한 포구였던 곳이다.

1876년 부산포가 개항하며 일본인이 들어와 매축권을 얻어 대평동 남항동 일대를 시가지로 바꿨다.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선박을 만든 다나카 조선소가 이곳에 들어서며 마을은 크게 번성했다.

다양한 선박부품 가게들이 집중적으로 들어섰고 한창 경기가 좋을 때는 개나 소나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 했다던가.

실제 골목을 돌아다녀 보면 선박 일과 상관없이 살아온 경우,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단어 천지라는 걸 느끼게 된다.

넓디 너른 세상이라 심지어 한국 내에서도 미처 아지 못하는 낯선 풍물투성이다.



수리받기 위해 들어온 배 외벽에 붙은 조개를 떼어내고 녹 벗겨내는 망치 소리가 강철 판에 부딪히며 깡깡 소리 그치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붙여진 이름이 깡깡이마을이다.

밥벌이로 그 일이라도 얻어걸리려고 몰려든 이들은 농지를 잃고 헐벗은 채 떠돌던 가난한 조선인이었다.

이후 한국전쟁이 터지며 피란민들이 입에 풀칠하고자 그 작업에 달라붙었다.

원양어업이 호황기일 때는 마을도 활기 넘쳤으나 불황과 더불어 수리조선소가 덩달아 쇠퇴하며 슬럼화가 진행됐다.

문화예술을 매개로 퇴락한 마을을 부활시키는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부산시는 여기서도 착수했다.

감천마을에 이어 두 번째 대상지가 된 셈이다.

부두의 계류장에는 낡은 배들이 순번을 기다리며 대기 중이고, 십여 곳에 달하는 수리조선소는 현재도 운영 중이다.

주말이라 일터 문은 닫혀있었으나 지금은 깡깡이마을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부분이 동남아에서 온 근로자들로 채워졌다.

때깔 안나는 일 따위 거들떠도 안 보는 한국인은 녹슨 뱃전 긁어내 페인트칠하며 공해에 노출되는 잡역부는 죄다 마다한다.

세월이 흘러 흘러 윤기 나게 잘 사는 나라가 된 한국이나 우리 역시 하와이로 서독으로 중동으로 80년도까지 돈 벌러 나갔다.

근대 조선산업의 근거지에서 선박 수리의 출발지로 자리 잡으며 역사문화자원 및 근대산업유산을 간직한 이 마을.

온데 벌겋게 슨 녹이 드러나고 페인트 냄새 서려있는 마을, 납작한 채로 낡아빠진 골목을 돌아보는 내내 마음 묵지그레해졌다.

돌아오는 길, 어느새 노을이 지며 하늘과 바다는 홍시빛으로 아련히 익어가고 있었다.

선명하게 드러난 도시의 빛과 그늘, 결코 가벼울 수 없는 그 의미 곱씹게 만드는 깡깡이마을의 민낯을 눈으로 직접 한번 확인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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