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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01. 2024


몇 년 전 극장에서 보았던 <패왕별희>를 티브이에서 다시 봤다. 첸 카이거 감독의 중국 영화다. 그렇게 처음으로 경극의 세계를 접했다. 영상매체를 통해 가장 자기 다운 것을  발굴하여 세계시장에 선보인 제작진들. 동시에 자국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고무시킨 감독의 능력이 퍽 근사했다. 거기에 우희 역의 경극 배우 역을 연기한 영화 속 장국영의 비애 서린 눈빛은 압권이었다.



차이니스 오페라 혹은 베이징 오페라로 해석되는 경극은 연기, 창, 무용, 무술 등의 기예가 총망라되는 종합예술 가극이다. 꽃과 용이며 봉황이 수 놓인 화려 찬란한 의상. 숱한 보옥으로 호사롭게 꾸민 머리장식. 무대 분장도 독특하다. 두꺼운 화장술로 전혀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배역의 성격에 따라 가면같은 분장을 하기도 한다. 경극의 내용은 주로 역대 고사나 불교설화 등에서 모티브 따다가 극본을 만든다. 패왕별희는 초패왕 항우와 그가 총애한 우희와의 사랑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줄거리로 극화한 고전극이다.



덩더꿍 아리랑 가락에 우리가 혼연일체 되듯 중국인이 한결같이 열광한다는 민족 고유의 전통극이다. 그 진수를 맛보기로 펼쳐준 영화 패왕별희는 각기 항우와 우희 역을 맡은 두 경극 배우를 주축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끼니를 해결하고자 유년기부터 극단에 소속되어 혹독한 훈련 속에 고락을 함께 했던 두 소년. 그들은 성장해 성공한 경극 배우가 된다. 하지만 현실의 삶과 극 중 역할을 분리시키지 못한 채 묘한 삼각관계에 얽혀 든다. 거기에 격동하는 중국 근대사와 맞물려 부침을 거듭하는 인생유전을 겪게 되는 그들.



항우 역은 체격 좋은 장풍의가 맡았고 우희는 선이 고운 장국영이 소화해 낸다. 특히 극 중의 우희 역인 장국영의 연기는 몸짓 눈짓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그대로 간드러진 여인이다. 말투도 꼭 여자 같다. 기가 막힐 정도로 여인의 섬세한 감정을 절묘히 표출해 내는 장국영. 질투에 불타 앵 돌아선 모습이며 낭랑한 목소리까지 경극 연기가 아닌 영화 속 실제로도 영락없는 여자다.



원래 경극 배우는 전원 남자들로만 구성되었다고 한다. 유교 사회에서 여자가 무대에 오른다는 자체가 금기사항.  또한 혼성 집단에서 생기기 쉬운 문제의 소지를 원천봉쇄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남과 여가 어우러져 돌아가는 곳. 당연히 필요한 여자 역할은 아담한 체구에 신체적 특징이 부드러운 사람이 배당받게 된다. 그에 따른 꾸준한 훈련에 의해 사내아이가 여자로 다듬어지고 길러지게 된다. 무대에 서면 누가 봐도 착각할 만큼 아리땁고 교태 어린 여자로 변신한 여장 남자배우의 경우,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것은 당연지사다.



우리 어릴 때 떠돈 말 중에 이런  소문이 있었다. 곡마단에서 애들을 잡아가서는 모진 훈련에다 뼈가 굳지 않게 식초를 먹여 별별 묘기를 다 보여주는 거라고. 해서 서커스 구경마저 조심했으며 혹여 곡마단 선도하는 트럼펫 소리에 홀리지나 않을까 겁을 먹었다. 실제 경극단에 들어간 소년들의 나날은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체벌이 다반사였으며 매시간  피눈물 나는 맹훈련의 반복이었다.



영화 속에서 그들의 고되고 힘든 생활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 있었다. 매질을 견디다 못해 극단에서 도망친 어느 소년이 당대 최고 인기 있는 경극 배우의 공연을 보다가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린다. "얼마나 많이 맞았길래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그만큼 배우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험난했으며 고초 심했다. 그럼에도 제 자식을 경극단에 맡겼던 것은 구차한 살림에 입하나 덜려는 가난 때문. 본인 역시 경극 배우로 출세하면 부를 누림은 물론 대중의 선망을 한 몸에 받기에 비참한 집단생활 속 강도 높은 훈련을 참고 견뎌냈으리라.



북경 여행을 준비하며 볼거리 우선순위를 정했다. 상위에 얹은 것이 본바닥 경극 관람이었다. 일 년 내내 공연이 계속되는 이원 극장이란 경극 전용 극장이 있다는 걸 메모해 뒀기에 시간 맞춰 택시를 탔다. 필담으로 우리는 그 장소에 정확히 내려졌고 중국 돈 백 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경극 관람에 제일 좋은 좌석을 배정받았다. 고급스러운 의자 편안한 데다 가족용 원탁마다 약간의 다과가 마련돼 있었다. 뚜껑이 있는 백자 찻잔을 우아하게 기울이며 재스민 차를 마셨다. 이때만은 웬일인지 화장품 냄새이듯 거슬리는 재스민 차도 괜찮게 여겨졌다.



무대 천장에 줄지어 불 밝힌 큼직한 홍등. 휘장도 진자줏빛 비단이다. 중국에서 붉은색은 황실을 뜻하는 고귀한 색으로 대접받는다던가. 더불어 기쁨을 의미한다고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공산당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들었다. 정초에 집집마다 내거는 홍등은 행복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우리의 홍등 개념과는 사뭇 다르지만 한편으론 어쩐지 혁명의 피가 연상되기도 한다.



패왕별희를 볼 수 있길 기대했지만 그날 밤 공연된 작품은 <천녀 산화>와 <조운> 두 편 다 아리송한 경극. 요즘은 여자도 경극 배우 되는 길이 열렸다더니 맞나 보다. 아무리 뜯어봐도 틀림없이 여자인 묘령의 처자가 추는 환상적인 선녀춤에 빠져 보았다. 다른 한편은 금박 수가 찬연한 의상에 보관을 쓰고 등 뒤에다 부챗살처럼 깃발 여러 개를 꽂은 장수 차림 남자 홀로 시종일관 열정적으로 힘찬 연기를 보여주었다.



창과 화살이 넘나드는 묘기에다 어지러운 공중회전이 정신없을 정도로 숨 가삐 진행됐다. 그는 끊임없이 뛰고 구르며 손짓 발짓도 날렵하게 춤을 췄다. 그러면서 노래와 대사를 곁들였다. 어느 땐 호방한 웃음을 하하하 터뜨리고 때로는 괴로운 표정을 짓기도 했으나 도시 뭐가 뭔지는 몰랐다. 만능 탤런트 같은 그가 한 무릎을 꺾고 깊이 머리 조아리는 것으로 그의 무대는 막을 내렸다. 다들 기립한 채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를 보내자 그는 무대 앞으로 달려 나왔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터운 분장 위로 줄줄이 흐르는 땀. 문득 명치끝에서 싸아하니 올라오는 전류 한 자락이 가슴 전체를 휘돌았다. 동시에 코허리가 시큰했다. 길고 긴 인내의 세월. 그는 눈물은 물론 얼마나 많을 땀을 거기 바쳤을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거늘.



여기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그러나 겸손하게 거듭 인사를 한 뒤 머리에 쓴 투구 모양의 보관을 벗어 들었다. 그제야 홍안의 청년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하이칼라 머리가 땀에 흠씬 젖은 채 결결이 빛났다. 감동적이고 숙연한 그 순간. 땀이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이유를 재삼 확인할 수 있었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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