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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20. 2024

사막을 지키는 조슈아트리

맨 처음 그 나무를 만난 곳은 미서부의 독특한 풍광 중 하나인 죠슈아트리 국립공원에서다.


쟈코메티의 조각처럼 살이란 살은 다 발라내고 오직 뼈만 남겨진 죠슈아트리가 여기저기 죽은 듯 산 채로 

그저 묵연히 서있던 그 공원,


황무지에 선 죠슈아트리의 실루엣으로 하여 영적이면서 초현실적 느낌을 주는 곳이자

서늘한 비장미마저 느끼게 하던 묘한 그곳 죠슈아트리 국립공원.


가령, 구름 한 점 없는 한여름 작열하는 태양 아래였다면 어땠을까.


달도 없는 깊고 푸른 밤, 총총한 사막의 별빛 아래였다면 소회가 어땠을까 싶어 진다.




더러는 육중하게 자란 거목도 있지만


대체로 초라한 골격 끄트머리에 푸른 가시 잎을 앙상하게 달고 있는 기묘한 나무다.


무한 펼쳐진 허허벌판에 거칠 것 없는 눈바람만 윙윙거렸다.


적막강산이 따로 없었다.


사막은 미답의 새하얀 눈에 덮인 채 묵언 정진에 든 구도자처럼 깊이 침묵하고 있었다.


눈이 살짝 쌓여 온 데가 고요히 빛나는 은세계, 그 정도의 적설량에도 곳곳은 진입금지 팻말.


볼거리 천지인 서부에서 굳이 초라하고 남루한 고행승 같은 이 나무 군락을 보려고


먼 걸음을 한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하여 괴괴할 정도로 인적이 드물다.


겨울 서부여행치고는 꽤 특별한 선택지, 이곳을 택한 우리 역시 별나다.


멧새 발자국이 난 눈을 퍼다가 라면 끓여 후후 불며 먹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황량하고 삭막해서 다시 세상 속에 나가면 더 치열히 살고 싶다는


더 열심 내어 살아봐야겠다는 오기 생기게 하던 그곳.


길가 안내판이 붉은 글씨로 경고하듯 이곳은 강력한 지진 지대임을 알린다.


캘리포니아는 태평양을 둘러싼, 세계에서 지진활동이 가장 활발한


환태평양 지진대에 속해있는 곳으로 로스앤젤레스 인근 지역의 지진은


대부분 이곳이 진앙지라고 큰 바위산 앞 표지판에는 씌어있다.


발치가 자꾸만 내려다보였다.


발끝이 왠지 저릿거렸다.


이 가도 가도 끝없는 막막한 황무지에 강성 지진대까지 매복하고 있다고?


황막 강산에 질려 우두커니 서서 그저 우두망찰!



눈 쌓인 겨울에 본 죠슈아 트리나 화창한 봄날에 마주한 죠슈아 트리나 한결같이 고적해 보였다.


거개가 기형적으로 비틀어진 채 활처럼 구부정한 데다 처연스럴 정도로 비쩍 마른 모양새가 왠지 초췌해 보여 짠해지는 그 나무.


특히 석양 비낀 설원에서 마주 한 죠슈아트리는 눈매 퀭한 설산의 고행자 혹은 사막의 은수자를 연상시켰다.


봄이 한창인 날 야생화 무더기 너머로 보이는 죠슈아트리 역시, 철학까지는 아니어도 묵상에 잠기기에 충분하였다.


어떤 나무들은 50피트 정도의 크기였다.


이 나무들은 700년 내지 800년이나 되었다.


조슈아 트리는 매우 성장 속도가 늦어서 일 년에 약 1인치 정도 자란다고 한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대부분의 조슈아 트리는 벌목되었다.


조슈아 트리가 대부분 사라진 점에 대해 사람들은 아쉬워했다.


1936년에 캘리포니아주에 조수아 트리 국가 기념 건조물이 세워졌다.




뭐든 미라로 만들어 버릴 작정으로 타는듯한 열사의 땅이 그의 터전이다.


모진 생명이라서인가, 퍽도 그로테스크하다.


불모지 황야와 같은 척박한 사막을 더 황량하게 만드는 죠슈아트리.  


메마른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키는 작고 단단하며, 줄기 끝마다 돋아난 잎은 가시 같은 침이다.


쭉 뻗어 오른 기둥이란 거의 없이 이리 꼬이고 저리 비틀린 지체.  


외부의 상처로 인해 원 기둥에서 자꾸 가지가 벌어진다니 뻗친 가지가 많을수록 상처가 많았음을, 

풍파에 시달렸음을 의미한다.  


주름 깊은 얼굴에서 삶의 내력이 읽히듯 온몸으로 곤고함과 피폐함을 말해주는 나무.


광야에서 사십 년을 방황한 이스라엘 민족.


그처럼 동부의 몰몬인들이 서부로 오는 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땡볕 내려쬐는 사막을 헤매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 만난 생명의 나무가 죠슈아 트리다.


가물거리는 시야엔 그 나무 형상이 마치 기도하는 선지자 죠슈아처럼 보였을 법도 하다.   


히브리어로 여호수아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뜻이라니 그 배경의 소망이 얼마쯤 헤아려진다.



강한 생명력으로 사막에 뿌리내린 죠슈아트리는 봄이면 소담스러운 꽃을 무더기로 피운다.  


꽃이 지면 꽃 진 자리마다 둥글둥글 열매도 달린다.


인디언들은 꽃과 열매는 식용하고 잎으로 신을 삼는 등, 서부의 인디언들은 그 나무의 거의 전부를 활용했다.


또한 인디언들은 나무의 열매뿐 아니라 씨앗과 흰 꽃까지 먹었다.


그들은 나무의 잎을 엮어 발에 걸쳤다. 신발이다.


나무의 뿌리를 이용해서 바구니를 만들고 옷감을 염색했다.


서부 정착민들은 조슈아 트리를 땔감과 울타리로 이용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빈번하게 나무를 베어내야 했다.





길 잃은 자의 희망.


1840년대 종교집단인 모르몬교도 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서쪽으로 떠났다.


많은 모르몬교도들은 일리노이주에 살았지만 그들은 푸대접을 받았고 결국에는 떠날 것을 강요받았다.


살던 터에서 밀려난 모르몬교도들 사막을 건너고 있을 때 그들은 죽을 듯 목이 말랐다.


타는 목에 생명수요 감로수를 제공한 사막식물이므로.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헤매다가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안내한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대비될 법하다.


광야에서 사십 년을 방황한 이스라엘 민족 역시 그랬다.


그처럼 동부의 몰몬인들이 서부로 오는 동안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땡볕 내리쬐는 사막을 헤매다 지쳐 쓰러지기 직전에 만난 생명의 나무가 바로 조슈아 트리.


가물거리는 시야엔 마치 그 나무 형상이 십자가를 든 사람처럼 보였다니 

조슈아란 이름을 붙임직도 한 일이다.


그때 그들은 한 기이한 나무를 발견했는데 그 나무 가지들은 마치 팔처럼 뻗쳐있었다.


모르몬교도 들은 그 나무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조슈아(여호수아) 같다고 생각했다.


그 나무의 가지들이 길을 계속해서 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대로 따랐다.


그들은 유타 주에서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내었는데 그곳에서 사막에서 보았던 나무와 흡사한 나무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 나무를 '조슈아 트리'라고 불렀다.


과연 조슈아 트리 실루엣은 그래서인지 두 팔 올려 하늘에 간절히 기구하는 모습과도 닮았다.



눈 쌓인 겨울에 본 조슈아 트리나 화창한 날에 마주한 조슈아 트리나 한결같이 쓸쓸해 보인다.


거개가 기형적으로 비틀어진 채 활처럼 구부정한 데다


처연스럴 정도로 비쩍 마른 모양새가 왠지 초췌해 보이는 그 나무,


특히 석양 비낀 설원에서 마주한 조슈아 트리는


눈매 퀭한 설산의 고행자 혹은 사막의 은수자를 연상시컀다.


판화나 추상화 같은 조슈아 트리가 여기저기 죽은 듯이 산 채로 그저 묵연히 서있는 그 공원


언제이고 다시 한번 찾아갈 것이다.


후에 알았는데 유성우가 매혹적이라 하니 언제든 꼭 한 번은


쏟아져내리는 유성을 보러 총총한 별밤 그곳을 다시 찾아가리라 했는데.




 

조슈아라는 위대한 지도자의 이름이 나무와 너무 잘 어울린다.


그곳은 연중 뜨거운 기후만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눈도 오는구나.


눈 속에 꼿꼿이 서있는 나무가 수많은 세월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시간을 견뎌왔을까라는 상상까지 해본다.


어떤 역경이 닥쳐오더라도 삶은 계속되는 법이라는 이치를 깨우치게 하는 것 같은 나무.


문득 마음자리 겸허해진다.

 

또 한 곳, 앤틸롭밸리 인디언 뮤지엄에서다.


조슈아 트리는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기이, 기괴, 기묘하다.


앤틸롭밸리 인디언 뮤지엄 내부에 자연 그대로 구부러진 나무 기둥들이 있다.


건물 외벽 역시 자유분방하게 굽어있는 목재는 죠슈아트리다.


내부의 기둥도, 벽을 가로지른 선반도, 널펀펀한 앉을자리도, 모두 그 나무다.


쓰러진 죠슈아 나무가 풍우에 바래고 씻겨 거친 껍질은 스러지고 속심만 남은 걸 목재로 썼다.


괴기스럽게 일그러지면 질수록 더 강해지고 단단해지는 심.


노트르담의 종지기 콰시모도 같다.


모진 생명이다.


나무의 풍장(風葬)일까, 그리하여 백골 드러낸 죠슈아트리.


기둥 저만치 굵어지자면 얼마만큼의 역경을 참아냈을 것이며,


어느 정도의 고난을 감내했을 것인가.




보호수로 지정돼 자기 집 울안에 있는 나무라도 함부로 베어낼 수 없는 그 나무는


나무라고는 하나 오래 묵은 유카와 용설란이 혼재한 식물이다.


정확히는 선인장의 일종이다.


그로테스크한 형태다. 


원주민들은 '기도하는 식물'이라 불렀다니 나무 자체 분위기가 사뭇 종교적이다.


고행하는 수도자처럼 뼈만 남은, 그보다는 가시관을 쓴 이마처럼 처절해보이는 나무.


불모지 황야와 같은 황막한 사막을 더 황량하게 만드는 조슈아 트리다.


아주 조금씩 자란다, 일 년에 고작 2센티 정도씩만.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기도하는 나무다, 조슈아 트리는.



쭉 뻗어 오른 기둥이 거의 없이 이리 꼬이고 저리 비틀린 지체.


외부의 상처로 인해 원 기둥에서 가지가 벌어진다,


뻗친 가지가 많을수록 상처가 많았음을, 풍파에 시달렸음을


주름 깊은 얼굴에서 삶의 내력을 읽듯 온몸으로 말해주는 나무.


천년을 산다는 조슈아 트리. 나무 같은 기둥과 줄기에다 잎은 가시 같은 침이다.


사막에 사니 선인장 같으면서도 선인장과 유카의 중간 쯤 형태다.


척박하고 황량한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키는 작고 단단하며 뒤틀린 모습이다.


강한 생명력으로 사막에 뿌리를 내린 식물.


영적이면서 초현실적 느낌을 주는가 하면 비장미 그 자체인 나무다.


황무지, 황야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감탄사 절로 나오게도 한다.


겉으로 보기엔 불모지 쓰임없는 나무 같지만, 사막에 적응해 살아가는 이런저런 동식물들의 보고이기도 하다.


방울뱀으로부터 새들 목숨 보듬는 둥지 틀게 해주는 나무. 


히브리어로 여호수아는 ‘하느님이 반드시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대로다.


그런 배경을 가슴에 품고 이곳을 찾는다면 남다른 느낌이 전해온다.




선두에 서서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여호수아.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기 힘든 메마른 황야를 건너왔다.


거기서 버텨내려니 척박하고 강건하지 않을 수 없을 터다.


3천 피트 고지에서 자생하는 나무의 태생적 한계.


그런즉 한층 더 야무지고 옹골차다.


삶, 천형처럼 숙명처럼 견디고 받아들여 오늘도 묵언수행 중인 나무. 


자코메티의 조각처럼 오직 뼈만 남겼다.


하필이면 왜 이리도 거칠고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땅


뭐든 미라로 만들고야 말, 타는듯한 열사의 땅인지.


바람에 나부끼며 노래하는 잎사귀들의 사치는 애진작에 버렸다.


에너지 소모시키는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알뜰히 발라냈다.


봄이면 메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는 소담한 꽃이 핀다.


꽃이 지면 열매도 달린다.


인디언들은 그 모두를 생활에 알뜰히 이용했다고 한다.


사막에 사니 선인장 같지만 용설란과 유카의 중간쯤. 


일 년에 아주 조금씩 고작 2센티 정도 자라며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끝없이 기도드리는 나무 죠슈아트리.


원주민들도 '기도하는 식물'이라 불렀다니 나무 분위기 자체가 누구의 눈에나 종교적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이만큼 장관을 이룰 때까지의 시간들..... 생각할 수록 숙연해진다.


곁을 스쳐간 무량한 일월들 헤아려 나이테로 새겨두지 않고


빈 마음으로 하냥 무심하게 서있는 죠슈아트리.


문정희 시 '사막에서 만난 꽃'이 홀연 생각난다.




눈부신 맨살 드러낸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몇 년째 묵언 중인 스님을 만났다


햇살 부서져 흰 것뿐인 벌판에


기괴하게 몸을 튼 사라쌍수나무


기쁜 웃음 만발한 바위로 앉은


청화스님, 눕지 않고 그대로 십수 년이라


서울서 간 나에게 백지 내밀던


사막에 핀 한 송이 꽃...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기 힘든 메마른 사막.


황야는 무진 척박한 땅이다.


그럴수록 더욱더 속내 강단지고 옹골차진다.


더구나 3천 피트 고지에서만 자생하며


그늘 한점 없는 불볕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는 죠슈아트리.




삼라만상 생명 있는 모두들 산다는 건 참으로 지난한 일임에 틀림없겠다.


풍화되고 백골만 남은 자연 그대로의 죠슈아트리 고사목에서 태백산 주목이 연상된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닮은 꼴 두 나무에서는 어쩐지 맑은 풍경소리가 날 것만 같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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