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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도 그 별빛

by 무량화

한 여름. 섬으로 향했다. 온갖 소리와 낱말들일랑 뭍에 떨구고 훌훌히. 가벼운 행장으로 나서고 보니 스치는 풍경 모두가 온전한 기쁨으로 다가섰다. 언제나 자연은 그득 차서 넘치는 감동, 그 자체였다.



바람과 구름이 먼저 마중 나와 환대해 주었다. 격의 없이 손 내밀어 악수 청하는 짙푸른 빛깔들. 후끈 단 흙냄새도 기분 좋았다. 태생이 촌사람이라서인지 회귀본능 때문인지 언제라도 자연은 마냥 편안한 느낌으로 싸안아 준다. 대지는 끝없이 관대하고 무엇이든 수용해 들이는 모성(母性)이자 그 어떤 사물에나 친화력이 남다르다. 또한 안온하다. 사는 일이 고단하고 힘겨울 때 나직이 어깨 낮춰 엎드리고 눈 감아 보라. 오체투지 기도하는 자세도 마찬가지다. 그때 우리는 아지 못할 큰 힘으로부터 위안의 다독거림을 받곤 하지 않던가.



성하의 녹음 속에서 매미가 목청껏 뜨거운 생명을 노래했고 풀 내음은 미어지게 차창 가득 밀려왔다. 산야는 한껏 건강했다. 넘쳐나는 에네르기로 절정에 달한 근육질의 힘. 그 낌새에 오감이 하나씩 눈뜨면서 푸르게 생동하기 시작했다. 풋풋하게 아주 풋풋하게.



전라도 강진 마량 포구에서 차를 배에 싣고 바다 건너 이름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섬 사이를 헤쳐나갔다. 섬과 섬 사이는 그야말로 지호지간(指呼之間). 수영에 서툰 사람일지라도 잠시 헤엄치면 건널 수 있을 것 같이 주변에 흩뿌려진 섬이 많았다. 그중 방목하는 염소 떼가 산자락에서 메- 메- 거리는 한적한 섬 조약도에 닿았다. 세상과 연결된 줄은 오직 배뿐인 섬 안의 도로는 좁디좁은 비포장으로 온통 황토 먼지를 일궈댔다.



여섯 가구가 모여 사는 마을엔 토박이 아이들이 없었다. 젊은이는 죄다 도시로 떠나가고 남은 사람이라고는 노인뿐. 그래서 더욱 고적하니 활기 잃어 가는 섬. 파도 소리조차 잔잔한 해변에는 외지에서 온 휴가객들이 원색의 텐트를 쳤다. 여름 한철 반딧불처럼 잠시 일다 사위는 생기였다.



여과 없이 내리 꽂히는 태양. 해풍에도 기세 꺾이지 않는 불볕 따가운데 인근에는 나무그늘마저 변변치 않았다. 폭양에 쫓기듯 서둘러 찾아든 민박집 마당 가득 고추잠자리가 날았다. 이글거리는 땡볕이 돌담 휘덮은 호박덩굴을 후줄근하게 만들었다. 짜브러져 가는 잿간에 기어오른 박덩굴도 신색이야 매일반이었다. 이른 저녁상은 보양식 대접 외에도 푸짐했다. 빡빡한 된장찌개에 열무김치, 소쿠리 채로 물에 흔들어 내놓은 텃밭의 풋고추가 달았고 들깻잎은 그 향이 한결 진했다. 민박집주인 내외는 일가붙이처럼 살가웠다.




설핏 해가 기울자 맹렬히 공격해 대는 섬모기 등쌀에는 당할 재간이 달리 없었다. 모깃불 대신 군데군데 모기향을 피우고 부채질로 연신 모기를 후쳐댔다. 그 사이 서서히 밤은 깊어갔다. 절기가 마침 백중을 며칠 앞둔 터라 달이 밝았다. 아직은 다 차오르지 않은 달. 송편 모양의 달이 서쪽하늘에서 서늘히 빛났다. 금성이 그 곁에 하나 겨우 돋아 있었다. 풀벌레 소리 자욱한 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드러난 뒷동산의 실루엣이 운치로웠다.



물을 덮어쓰고 나니 새 정신이 드는 듯했다. 젖은 수건을 목에 건 채 뜰 한가운데로 나섰다. 쇄락해진 심신이라 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졌다. 그러면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아! 어쩌면 그리도 별빛 요요(耀耀)한 지. 그새 밤하늘 가득 총총한 별천지를 이루어 놓았다. 마술사가 잠깐만에 손수건에서 비둘기를 만들어내 날리듯 순식간의 일이다. 보석 상자를 열어 아청빛 우단 위에 갖가지 보석을 함빡 쏟아놓은 것처럼 찬란한 밤하늘. 아니면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먼 도회의 야경이 그러하리라.



아득한 꿈이자 지향하는 이상이기도 한 별. 우주의 무한한 바다에는 수많은 별이 태어나고 소멸한다. 그러면서 밤마다 별들의 향연, 별의 심포니를 펼친다. 아름답고도 신비롭게. 도시의 밤하늘에서는 그리도 희미하던 별빛이 말갛게 씻은 얼굴로 저마다 영롱히 반짝대고 있다. 별은 그대로 보석이다. 다이아몬드뿐이랴.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 캣아이 외에도 오만 종류의 보석이 제각각 크고 작은 밝기로 어우러져 밤하늘을 호화롭게 장식하고 있다. 몇 년 전 프로방스 지방을 스쳐 지나다 만났던 밤송이 닮은 별. 알퐁스 도오데를 떠올리게 한 그 별밤 이후 참으로 오랜만의 해후다.



도시에서도 물론 밤은 온다. 아파트 창 너머로 어둠이 깔리고 달이라도 휘영청 떠오르는 밤이면 습관이듯 시선은 하늘로 향했다. 누군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은 굳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 했다. 그러나 도회의 밤하늘엔 고개 젖혀 바라볼 명징한 별빛이 없었다. 공허하게 또는 막막하게 빈 하늘. 가끔 구름이 흘러가고 그 아래 붉은 네온의 십자가가 반짝댈 뿐인 도시의 밤하늘. 별은 매연과 스모그에 쫓겨 가물가물 숨죽인 채였다.



메마르게 비어버린, 동화를 잃어버린 도시의 밤하늘과는 전혀 다른 환상의 세계를 펼치고 있는 조약도의 별빛. 크기나 빛남으로 구분되는 일등성 이등성 삼등성… 굳이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찬연한 보석 아니던가. 쏟아질 듯 그득한 별 별 별. 사태진 별 무리 한켠에 안개꽃 흩뿌린 듯 하얗게 흐르는 미리내는 또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격인지. 모처럼 별에 한껏 취해 밤 이슥도록 야기(夜氣)를 만끽할 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 앞뒤로 흘러내린 산자락 초목들이 이슬에 흠씬 젖어 싱그러이 나붓거렸다. 돌담의 호박잎도 잿간의 박잎도 힘차게 깨어나 있었다. 삼라만상이 새롭게 되살아난 생기 넘치는 아침. 문득, 초롱초롱한 별의 정기가 밤새 이슬로 내려 온누리의 지친 생명을 일바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6

사진 모두 픽사베에


* 아들 혼사를 앞둔 해 여름이었다. 남편 친구 내외와 넷이서 남해 작은 섬에 갔다. 인륜지대사를 치르려면 체력을 보강해둬야 한다며 우릴 위해 친구가 염소 한 마리를 잡았다. 물론 우리가 도착하기 전 민박집 쥔장이 약재를 넣고 탕으로 다 준비해 놓았다. 그걸 먹어내겠나 싶었는데 상에 차려진 보얀 국물과 살을 맛나게 먹었던 기억. 보양식 덕분인지 그해 가을 아들 결혼식을 잘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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