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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박사, 표정으로 굳은 내적 고뇌

by 무량화 Aug 15.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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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에 싸 안긴 금강공원에서 머잖은 주택가 골목에 위치한 우장춘 기념관을 찾았다.


원예 학자 우장춘 박사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생전 육종 연구에 몰두하였던 옛 원예시험장 자리에 건립된 조촐한 기념관.


잘 다듬어진 정원수 그늘에 맥문동 보라색 꽃이 폭염 아래 수굿했고 우물 주변을 지키는 문무석 곁에는 상사화  호젓이 피어있었다.


기억할만한 유품이나 남겨진 자료가 적어, 안에 들어가도 친필 노트와 현미경 외는 별로 볼거리가 없긴 다.


1~2층 전시관에는 평소의 활동 모습이며 약력과 연보 등 사진 패널이 대부분인데 그런대로 성의껏 그분을 기린 뜻이 가상하게 여겨졌다.





밖으로 나와 기념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실체적 흔적을 유추해 볼 수 있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자취인 기념관 앞에 보존된 우물 자리.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라는 뜻의 '자유천'은 한 시절 지역민들이 의존하던 식수터였다.

모친이 임종하였을 당시 양국 간의 문제로 그는 장남이면서 어머니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못했다.

이때 들어온 부의금으로 그는, 물이 절대 필요한 농장에 우물을 파서 연구소는 물론 물로 어려움을 겪던 마을사람들과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우물 이름을 자유천이라 짓고 바윗돌에 글씨를 친히 새겨 세웠다 하니 사모곡 같은 절절한 마음이 읽히는 자리다.

매일 아침 그는 우물 주위를 소제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할 정도로 애틋한 정을 기울였다는 샘이 남아있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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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입구에 선 우장춘 박사 흉상은 무뚝뚝하면서도 우직스럽고 투박진 표정이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은 보는 이마저 마음 무겁고 착잡하게 만든다.

왜 아니 그러하랴.

얼의 꼴이라는 얼굴에 새겨진 그의 표정에서 질곡의 역사가 헤아려지며 내적 고뇌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격변기 대한 제국의 궁궐 한가운데서 일어난 엄청난 소용돌이,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일본을 견제하고자 러시아와 손잡았던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우범선을 아버지로 둔 그다.

아버지 우범선은 고종 당시 신식 군대인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근무한 강경 개화파였다.

사건 후 일본으로 망명한 아버지는 조선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함으로 여섯 살 때 부친을 잃는다.

그 후 일본인 어머니 슬하에서 가난과 고난이 겹친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다.

절반은 일본인, 절반은 한국인인 그가 조선인의 성과 얼을 지키며 살 수 있었던 데는 민족주의 정신을 심어준 주윗분들의 배려 덕분.

그는 실제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 장학금을 받아 1916년 도쿄제대 부설 농학부 실과에 들어가 1919년 졸업을 다.

졸업과 동시에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하여 1937년 퇴직할 때까지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육종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때 배추 속(BRASSICA)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종의 합성 이론’을 제시하며 세계 각국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종의 합성 이론은 아직까지도 배추 유채 양배추 같은 십자화과 식물 연구논문마다 필수적으로 인용되는 유전학의 고전 논문이라고 한다.

그는 이로써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조선계로 분류되는 신분상, 여러모로 받게 되는 제약에 따라 말단에서 돌던 농림성을 떠나 그는 종묘 회사에 연구원으로 입사한다.

여기서 특별대우를 받으며 십자화과 식물에 대한 연구에 진력하다가 태평양 전쟁 후 퇴사했다.

바로 그때 신생 독립국으로 자리 잡아가던 한국 정부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농업 생산량 증진을 위해 우 박사 귀국 운동을 벌였다.

한일 간에 국교가 없던 당시 불법체류자를 자처, 수용소에 들어가 한국으로 추방되는 송환선을 타고 1950년 한국으로 들어왔다.

일본에서 태어나 50년간 일본인으로 살아온 그가 어머니를 필두로 아내와 자녀들 모두를 남겨두고 홀로 한국행을 결심한 배경은?

이대통령의 적극적인 러브콜에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간 어머니 나라에서 영농 연구 경력을 쌓아 왔지만 앞으로는 가난한 아버지 나라에서 농업발전을 돕는 일에 헌신하겠다는 다짐이 생길 법도.

그의 심저에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한국에서 아버지의 잘못을 속죄하며 남은 생애를 봉사하려는 마음이 컸을 터이다.

이 대통령이 범시민 환국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세계적인 최고 학자를 모셨으나 그는 귀국하여 부산 원예고등학교 부속 연구실에서 오로지 곡식과 무 배추 등 씨앗을 개량하는 종자산업 개발에만 진력하였다.

동시에 오염된 농작물로 인한 기생충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국에서 처음으로 청정 재배를 시도했으며 대관령 감자도 정착시켰다.

1959년 사망 시까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 중앙 원예기술원장, 원예 시험장을 역임했으나 직함 관계없이 항상 흙과 함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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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혀도 끝내 꽃 피우는 길가의 민들레를 좌우명 삼았다는 그는 연구실에서 고무신을 신고 일하는 소탈하고 부지런한 농부였다.

농림부 장관 제의도 마다한 채 오직 흙과 더불어 육종개발에 힘쓰며 후진을 길러 한국 농학의 기초를 다져놓았다.

한국에 정착해 몸소 묵묵히 일에만 전념해 온 스승을 보아온 제자들은 우장춘 학파가 형성될 정도로 우 박사를 기리고 존경했다.

그들은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닌 실질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연구에 헌신하라'고 가르쳤다며 스승을 회고한다.

근래 들어 재조명된 우장춘은 조국에 헌신한 열렬한 애국자라기보다 과학 휴머니즘에 입각해 사람에게 봉사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이곳 방문으로 나부터 그간 잘못 입력되었던 오류 하나를 바로잡게 되었다.

우 박사가 한국에 돌아온 직후 대중 강연에서, 교토대 기하라 히토시가 만든 씨 없는 수박을 육종학의 한 사례로 발표했다.

1953년 그의 연구소에서도 씨 없는 수박을 재배해 일반인들에게 선보였는데, 이것이 와전돼 씨 없는 수박 개발자로 인식되었다.

우장춘 박사의 과학적 업적은 국제적 수준의 연구인 `종의 합성 이론’이지만 우리가 기릴 실질적 업적은 따로 있다.

전후 배곯은 국민을 위해 육종사업에 치중, 다수확 벼 보리 감자 배추 등 우량종자를 개발해 기아에서 벗어나게 해 준 점이다.  

눈 감기 직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전달되자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해 주었다"며 눈물 흘렸다는데 사후엔 사회장 예우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사회장이었고 마땅한 예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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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 2동 850-48번지 우장춘로 62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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