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께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고 하셨소. 소나무 ·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다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 ·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는 소나무 · 잣나무이외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오.
...후략
이 편지를 받잡은 이상적은 감루를 금치 못했다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중략
이번 사행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 분들께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후략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 조진조 진경용 등 16인과 자리를 함께한 다음 <세한도>를 내보였다.
그들은 세한도의 고고한 품격에 취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 간의 소중한 인연과 인간적 의리에 감격하였다.
하여 그들은 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讚文)을 다투어 써 내렸다.
이상적은 이 글을 모아 10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는 길에 곧바로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 뵈어드렸고.
그 후에 추사의 문하생이었던 김석준의 찬문과 오세창·이시영·정인보의 그림 감상문이 뒤에 이어붙여졌다.
세월이 한참 흘러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에게 전해졌다가 최초의 추사 연구가인 일본인 교수의 손으로 넘어가게 됐다.
종전 직전, 폭격기 공습이 잦은 동경으로 위험 무릅쓰고 찾아간 서예가이자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 선생 덕분에 세한도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거액을 들고 가서 석 달여 우여곡절 협상 끝에 가까스로 세한도를 손에 넣었으나, 정치하다 자금 압박을 받아 그림을 손세기에게 넘겼다고.
손세기의 장남인 손창근은 세한도를 소장하다가 이를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178년 만에 세한도는 고향으로 향했는데 잠시 제주국립박물관에 돌아와 추사 특별전을 연 바도 있다.
무성한 무밭을 가로질러 향교에 이르렀다.
전에도 수선화에 석양 스미던 오후 녘에 왔었는데 이번 또한 기와지붕에 기우는 햇살 불그레 어리인 시각.
해설사의 말마따나 경내 우람한 고목과 현판 글씨체 빼고는 다 고증에 따라 근자에 새로 들어섰다는 향교 건물.
세종 2년에 설립돼 대성전· 명륜당·대성문· 동재·서재· 실하게 들어선 향교였다고 했다.
하건만 현재는 건물 형태로 미루어 철저한 고증 대신 엉렁뚱땅 급조된 어설픈 복원품처럼 가비얍게 보이더라는.
천재는 하늘이 낸다고 하지만, 그에 걸맞게 자신의 피나는 노력 또한 따라주어야 대성하게 되는 것.
추사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갈아 닳게 했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피력한 대로 그만큼 스스로를 부단히 연마해 왔다.
적소에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고 오로지 붓에 의지한 채 처절한 귀양살이의 고독과 절망감을 다스렸다.
그뿐 아니라 위리안치형을 받았음에도 적소와는 한마장 거리인 대정 향교에 나가 그는 지방 유생들에게 글과 서예를 가르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