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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굼지오름 이미지에서 추사체가 나왔다고?

by 무량화

정상까지 올랐다가 내려와도 한 시간이면 족한 해발 158미터 규모의 낮으막한 단산.


세 봉우리로 되어있으며 박쥐가 날개를 좌악 편 생김새다.


바굼지오름의 기괴한 모양새가 추사체에 영향을 줬다는 추론이 나오는 근거다.


추사체의 특징은 기괴한 아름다움, 추사체가 단산의 기괴한 형태에서 영향받았다는 썰대로다.


해동 제일의 서성(書聖)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추사 김정희선생.

추사체가 향교 뒷산인 거친 단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도 하는데, 변화무쌍 기괴한 필체에 그 설명이 있을 법 하나 글쎄올시다.

향교 대성문 옆에 비스듬 서있는 아취 띈 소나무는 세한도 그림 속 헐벗은 소나무의 모델이라고도 하는데 이 점도 글쎄올시다.

물론 대정마을과 추사를 깊이 연계시키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되지 않는 바 아니지만.

추사체는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의 한자 필체 5체에 더해 추상화 같은 옛 글자까지 취합해 자유로이 구사하는 게 특징이라 한다.

숫제 글씨를 갖고 노는 유희의 경지에 이르렀던 걸까.

속기나 기교가 없는 고졸한 기운이 배어든 가운데 불현듯 툭 치고 들어오는 파격미가 추사체라고들 하는데.

추사의 글씨는 워낙 남겨진 양이 방대해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따라서 그만큼 위작 논란도 많은 편.

추사 김정희가 오랜 기간 유배생활을 했던 대정읍 안성리 적소와 단산은 매우 가깝다.

더구나 유학교육의 모태이던 향교 오가려면 들판 너머로 계속 건너다 보이는 단산이다.

김정희의 추사체와 단산과의 관련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을 법 하긴 하다.

추사체의 특징은 아주 독특해 법도에 구속받지 않으며 서체를 자유자재 넘나들면서 자유분방한 조형미를 보여주니까.

단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파격적인 아름다움이며 변화무쌍함과 괴이함을 넘어 무심의 경지를 나타낸다고 한다.

추사체의 산실이 된 대정마을 사람들은
“추사의 글씨체가 바로 이 박쥐오름의 모양새를 이미지화한 것”이라고 말할 만도 하다.

실제로 8년 3개월의 귀양살이에서 돌아온 후인 만년의 추사 글씨는 '신이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 했으니.


바굼지오름 또는 박쥐오름 혹은 단산이라 불리는 저 오름은 산방산 옆에 위치한 바위산이다.

맨 처음, 추사 적소에서 대정향교를 찾아가는 중에 옆을 따르는 형세 괴이한 산을 만나 주민에게 이름을 물으니 세 개나 된다며 자세히 알려줬다.

봉우리가 셋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의 봉우리는 가장 낮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중앙보다 높은 묘한 산세다.


중앙의 봉우리가 박쥐 머리, 좌우 봉우리가 거대한 날개를 편 박쥐 모습을 연상케 해서 박쥐오름.

일대가 바닷물에 잠겼던 예전 이 오름은 꼭 바구니만큼만 보였대서 바굼지오름.

바굼지는 제주어로 ‘바구니’란 뜻이란다.

조선시대 이르러 ‘대광주리 단’을 붙여 단산(簞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제주 오름이 대개 봉긋 솟은 얌전한 봉우리 형태인데 반해 산세 유독 특이하면서도 기이했다.

방향에 따라 바라보는 각도마다 모습 제각각 별나게 달라서 처음부터 호기심이 일었다.

나지막한 산이라 만만히 여기고 올라갔다가
운동화 차림으론 미끌어지기 쉽상이라 위험하다 싶어 중도에 뒤돌아섰던 적이 있다.

한번 눈에 아로새겨진 곳, 이번엔 정상까지 오르리라 벼르고 물과 간식이 든 배낭을 멘 다음 등산화 조여 신었다.


질펀한 밭둑길 풀향에 취한 채 단산 마주 보며 추사유배길을 따라 걸어갔다.

이름하여 '사색의 길' 일부를 '사유 혹은 명상' 도반 삼아 데불고 기약없는 귀양길 걷던 조선조 한 사대부.

그때까지만 해도 결기 시퍼러이 살아있던 추사는 거친 돌팍길 걸으며 불평을 했다지.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불벼락이 쏟아지기 전까지는, 비단 도포에 기름진 음식이 일상이던 양반님네였으니까.

명문가 출신인 데다 병조참판 위치에서 당쟁의 옥사에 연루되어, 바다 건너 고도로 귀양 오게 된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추사 김정희.

1840년, 치도곤까지 맞고 한양을 떠난 지 한 달여 만에 추사선생은 제주 서남쪽 끄트머리 대정현에 도착하였다.

때는 하늘빛 차디찬 구월이었다.


멀리 보일락 말락 한라산 그려보며 자태 또렷한 산방산 거느린 채 사계 마을 무밭 파밭 사잇길 후적후적 걸어가면서 유배객 처지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을 터.

명문거족 귀하신 몸이 죄인 되어 무명옷에 짚세기 끌고 터덜터덜 걸을 때 성정 꼬이다 못해 얼마나 뒤틀렸을까.

안하무인이던 그는 평소 조롱과 독설 서슴지 않았던 까칠한 성정이니 더더욱 미치고 환장할 노릇 아니었겠나.

나라님이 내린 국법 지엄하니, 들끓는 화기 속으로 꾹꾹 눌러 다지며 삭혀야 할 그의 심사야말로 시끌복잡했겠지.

산방산이 뒤로 물러나자 이번엔 시야 가득 바굼지 오름이 채워졌다.

단산 지키는 방사탑 스치면 저 끄트머리 짬에 대정 향교는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밭둑에서 농사 폐기물이라도 태우는가, 들판에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향교 윤곽이 드러날 즈음, 차도와 마늘밭을 경계 지른 돌담 바윗 전에 전각 무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서예와 금석학의 대가였던 그, 눈에 익은 예의 추사체 전각이 연달아 이어졌다.

김정희는 완당(阮堂) 등등의 호와 자가 무려 200여 개에 이른다고.

당시엔 본명 외에 ‘아명’이 있었고 성인식 때는 ‘자’를 받았으며 그 뒤에는 일상에서 ‘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서재 등 자신만의 공간에 이름을 붙여 당호로 쓰기도 했다.

이런 호사 취미는 주로 문필가 집단에서 성행한 풍조였다.

자세 기우뚱 유지한 채 돌에 새겨진 추사의 낙관을 거푸 사진에 담아댔다.

밭일하던 노인이 허리 펴고 서서 한참을 멀거니 바라보기에 민망스러워 하던 짓 그만두고 걸음을 재촉했다.




세상 천재들 가소로이 여기며 오만하기 짝이 없던 청장년기 거쳐, 나이 쉰 중반에 들어 김정희는 그렇게 절해고도 귀양객이 되었다.

적소에서도 입맛은 살아있어 육포에 민어포에 호두며 잣, 심지어 인절미까지 아내는 철철이 챙겼다는데.

배편으로 오는 도중, 반 너머는 상하거나 썩어버렸을지언정.

그러나 시퍼런 바다에 둘러싸인 외딴섬의 막막함 견디며 그는 비로소 자신을 바닥에 내려놓고 깎아낼 수 있었던가.

9년 남짓의 세월, 대정에서 위리안치형을 감내하면서 생애 역작인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세한도(歲寒圖)를 남겼다.

글은 그림을 꾸미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림이 있게 된 사연이라 하듯, 세한도에는 그림에 곁들인 글이 들어있다.

메마른 선으로 그린 단순소박한 집 한 채와 그 좌우를 지키는 노송과 잣나무가 대치되게 서있는 스산한 그림 세한도.

각고의 신산스런 시간을 거쳐 통렬한 자기 성찰이 이루어지면서 그는 마침내 내면세계와 글씨가 공히 완숙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세한도는 대정에서 5년째 유배생활을 하던 1844년, 그의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이 스승에게 보낸 선물에 대한 답례로 보낸 그림이다.

궁벽한 처지 되어 귀양살이하는 자신인데도 사제의 연 잊지 않고 진기한 책을 보내주는 제자가 얼마나 고마웠으랴.

추사가 읽고 싶어 했던 중국 책을 어렵사리 구해서 보내준 이상적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냈던 편지가 세한도이다.

짙은 먹물만을 사용해, 한겨울에도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의 고고한 절개를 표현한 세한도.

문인화의 진수로 평가받아 현재 국보 180호가 됐다.

오른쪽 늙어 기울어져가는 소나무를 왼쪽 젊은 소나무가 받쳐 주며 더불어 곧게 서서 간결한 집 배경이 되어 준 그림.

추사는 그림 왼쪽에 적혀있는 해서체의 화발(畵跋)에서 작품을 그리게 된 연유를 적어 보냈다.


.. 전략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공자(孔子)께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고 하셨소. 소나무 ·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다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 ·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는 소나무 · 잣나무이외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오.

...후략



이 편지를 받잡은 이상적은 감루를 금치 못했다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중략

이번 사행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 분들께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후략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 조진조 진경용 등 16인과 자리를 함께한 다음 <세한도>를 내보였다.

그들은 세한도의 고고한 품격에 취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 간의 소중한 인연과 인간적 의리에 감격하였다.

하여 그들은 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讚文)을 다투어 써 내렸다.

이상적은 이 글을 모아 10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는 길에 곧바로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 뵈어드렸고.

그 후에 추사의 문하생이었던 김석준의 찬문과 오세창·이시영·정인보의 그림 감상문이 뒤에 이어붙여졌다.

세월이 한참 흘러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에게 전해졌다가 최초의 추사 연구가인 일본인 교수의 손으로 넘어가게 됐다.

종전 직전, 폭격기 공습이 잦은 동경으로 위험 무릅쓰고 찾아간 서예가이자 고서화 수집가였던 손재형 선생 덕분에 세한도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거액을 들고 가서 석 달여 우여곡절 협상 끝에 가까스로 세한도를 손에 넣었으나, 정치하다 자금 압박을 받아 그림을 손세기에게 넘겼다고.

손세기의 장남인 손창근은 세한도를 소장하다가 이를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178년 만에 세한도는 고향으로 향했는데 잠시 제주국립박물관에 돌아와 추사 특별전을 연 바도 있다.

무성한 무밭을 가로질러 향교에 이르렀다.

전에도 수선화에 석양 스미던 오후 녘에 왔었는데 이번 또한 기와지붕에 기우는 햇살 불그레 어리인 시각.

해설사의 말마따나 경내 우람한 고목과 현판 글씨체 빼고는 다 고증에 따라 근자에 새로 들어섰다는 향교 건물.

세종 2년에 설립돼 대성전· 명륜당·대성문· 동재·서재· 실하게 들어선 향교였다고 했다.

하건만 현재는 건물 형태로 미루어 철저한 고증 대신 엉렁뚱땅 급조된 어설픈 복원품처럼 가비얍게 보이더라는.



천재는 하늘이 낸다고 하지만, 그에 걸맞게 자신의 피나는 노력 또한 따라주어야 대성하게 되는 것.

추사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갈아 닳게 했고, 천 자루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피력한 대로 그만큼 스스로를 부단히 연마해 왔다.

적소에서도 그는 붓을 놓지 않고 오로지 붓에 의지한 채 처절한 귀양살이의 고독과 절망감을 다스렸다.

그뿐 아니라 위리안치형을 받았음에도 적소와는 한마장 거리인 대정 향교에 나가 그는 지방 유생들에게 글과 서예를 가르쳤다고 한다.


추사가 손수 썼다는 해서체 '의문당' 현판(진품은 대정읍 추사관 소장)이 걸린 동재를 한참 올려다보았다.

학생들 기숙사 격인 동재에 '의심 나는 것을 묻는 집’이라 새긴 그분 뜻이 무엇이었겠는가?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항상 깊이 참구하고 곰곰 숙고하여 의심 들면 질문하며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였을 .

그를 흠숭하며 따르는 문하생이 하도 많아 "추사 문하에는 3천의 선비가 있다."는 말 역시 과장만은 아니리라.

흥선대원군을 비롯 이상적· 강위· 허련 같은 대가를 제자로 둔 추사선생, 적소에서도 숱한 이들이 대학자 문하로 모여들었다고.

강기석· 강도순· 김여추· 김좌겸· 이시형· 홍석우 등은 이때 글을 배우러 찾아온 제주 각지의 선비들이었다.

그들은 향후 19세기 제주의 인문학과 문예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며 지역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고.

황폐한 외딴섬 탐라의 문화를 개척한 것은 추사로부터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게 된 연유가 아마도 여기 있을 것이다.


향교를 뒤로 하고 초입에 자그마한 절이 돌아앉은 바굼지오름으로 접어들었다.


전번처럼 단산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름에 올랐다.

단산사 절 오른편 뒤로 길이 나 있는데
오솔길 지나 이마 위 바위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였다.

얼마간은 마른풀 서걱대는 숲길이지만 이내 나타나는 앙바튼 바윗길.


오래전 남해 사량도 옥녀봉 오름길처럼 가파른 공룡 능선 두드러지진 않은 등산로이지만 시작부터 험한 암벽은 고압적이었다.

로프가 드리워져는 있으나 그렇다고 오르기 겁날 만큼 경사도가 심하진 않았다.

현무암이 어디서나 그렇듯 표면 자체가 까칠까칠해 미끄럽지는 않아서 살살 오를만하였다.

이 코스만 지나면 첫 전망대에 닿으므로 폐타이어 층계 둘 딛고 올라서자 넓은 대정 들판과 모슬봉, 사계해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호흡 고른 다음 본격적인 산행에 나선다.

바위 틈새 길이 나오면서 새소리 청량한 솔숲길, 잡목 어우러진 오솔길, 어두컴컴한 대숲길도 지나게 된다.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다시 벼랑길이 두어 곳,

조심조심 로프에 의지해 비탈진 급경사 구간을 네 발로 기어오르다시피 한다.

그러자 서남부 지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360도 파노라마 뷰를 선사해 주는 정상부에 비로소 닿게 됐다.

동으로는 눈높이 같아진 산방산, 서로는 모슬봉, 남으로는 형제섬과 송악산.

북으로 시선 돌리자 대정마을 저 멀리 군락 이룬 뭇 오름들까지. 날씨가 받쳐주는 날 정상에 서면 마라도와 가파도가 선명히 보이고 한라산 자태 또렷 보이고도 남으리라.


더 이상 길은 나있지 않았다.

모슬봉 꼭대기에 걸렸던 해도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전면에 설치된 안내판 사진을 실제와 일일이 대조해 본 뒤 하나씩 도장 찍듯 사진에 담아뒀다.

좀 전에 걸어온 대정 들녘 양배추밭, 무밭, 브로콜리밭....

각각의 밭자리마다 색도 달라 동색 계열로 꾸민 조각보 같았다.


산 정상에 올라 하계를 바라보노라면 모든 게

아리땁고도 가여워지는 이 심사는 뭔지......


바굼지오름 그 단산의 동쪽 능선인 뾰족한 돌산은 완전 수직 절벽길로 진입금지 구간이다.

탐방로 벗어나면 곧장 낭떠러지 벼랑이겠다.

그럼에도 위험 무릅쓰고 함부로 모험에 도전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하나, 락클라이밍이 가능할 정도로 암벽 날카로워 아찔하기만.

이제 다시 온 길 되짚어 천천히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가벼이 하산로로 뒤돌아서자 보금자리에 깃든 까마귀가 까악깍댔다.

가쁜 숨 몰아쉬긴 했지만 오를 때보다 내려가기는 금방이었다.

대정고을 향해 벌판길 걷는데 건너편 숲에 어린 금빛 노을이 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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