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하늘 어딘가로 깊이 잠적해 버린 날. 게다가 폭풍우 이끌고 바람 거세게 몰아치는 날이면 가만히 집에 있기가 어렵다. 신기 오른 여자처럼 떨치고 일어선다. 우산마저 지니기 힘든 비바람의 광란 속으로.
지병이 또 도진 것이다. 대접으로 들이켜도 내내 타는 목줄기. 갈구함이 어처구니없이 많은 만큼 갈증이 심한 걸까. 종내 채워지지 않는 갈구는 무엇이며 미망이듯 치열한 갈증은 또 무언가. 해갈은 어쩌면 요원한 바람일 뿐.
幻이리라. 산다는 게 한 자락 꿈이라 하듯 부질없는 욕망 역시 잡히지 않는 그림자 같은 것. 그 밖의 세속적인 부와 명예 권세란 한 뼘쯤 기 돋구고 좀 더 살맛 나게 하는 요소들. 그러나 단호한 벽이 예서제서 숨길 조이면 나는, 한갓 문자로만 그친 희망사항과 함께 신음소리로 무너진다.
이윽고 다스릴 수 없는 자아의 반란이 인다. 한순간이나마 온전히 나 자신이고 싶고, 완벽히 자유롭고 싶어 진다. 여지껏의 나 아닌 나를 앞세우고 문을 나선다. 이런 날은 방약무인한 폭군의 기세 같은 바다를 보러 가거나 아니면 미친 듯 울부짖는 숲의 소리를 만나러 가야 한다. 슈베르트의 마왕이 들려주는 음산한 바람과 황망한 말발굽 소리. 악마의 두려운 속삭임. 그러나 감미로운 유혹.
폭풍의 바다에서는 원시의 냄새가 난다. 시조새가 끼룩거리며 나는가 하면 어디선가 공룡 우는 소리도 들린다. 양치 식물군이 숲을 이루고 산봉우리 분화구에서 불이 솟는다. 허나 정신 모아 휘둘러 보면 갈매기 낮게 날고 바람 소리 음울하다. 또한 분화구 대신 바다에서 솟는 파도더미. 집채만 한 덩치가 밀려와 속절없이 부서진다. 성난 갈기 앞세우고 횡포에 가까이 달려와 솟구쳐 깨어진다.
바다 자락 왼통 거둬 무서운 여세로 온몸 내던져 무너지는 파도. 바다가 격렬히 들끓고 있다. 신열에 들떠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차라리 뜨거운 정열이리라. 몸서리쳐지도록 무섭게 뜨거운 정열이리라. 아니 속으로 속으로만 삭이다 드디어는 비등점에 이르러 그만 폭발해 버리는 恨일까.
떠도는 혼이며 가라앉아 앙금진 고적 모두를 훑어 내고자 함일까. 지극히 야수적인 모습을 한 바다. 교양이나 지성으로 덧치장한 위선 따윈 벗고 나신으로 마주 선 바다. 숨 가쁜 자진모리로 휘도는 물굽이가, 광기 어린 몸짓으로 뒤채는 격랑이 해벽에 부딪혀 장렬히 산화한다. 산산이 흩어지는 물보라. 그리고 다시 밀려오는 파도, 파도.
편벽된 고집으로 시종 밀려와 부서지는 저 파도에 참살당하는 바다. 그러나 바다는 영원한 에네르기로 충전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그 앞에 서면 전율과도 같은 쾌감이 낱낱의 신경을 자극한다. 이만큼 혼쾌한 청량제가 달리 있을까. 휘몰아치는 해풍에 젖으며 그렇게 서있노라면 나를 비끌어맨 생활의 질곡과 인습의 제약이 훌훌 포박을 푼다. 비로소 가슴이 후련해진다. 마음이 틔여 온다.
평소에 기품 올올하던 산. 사계의 변화를 묵묵히 수용하면서도 완고하고 신중하던 침묵의 산. 폭풍우는 그 산을 통째로 흔든다. 비바람 속의 숲은 이미 침착을 잃은 채 감각에 몸을 맡겼다. 미세한 잔마디는 물론 둥치까지 온통 관능에 몸을 떤다. 바람의 아우성. 미친 듯 아우성치는 바람. 끝내 속 시원히 터트리지 못하는 속울음을 우는 바람.
마구 휘젓고 할퀴는 바람의 광증에 도리깨질당하는 숲. 잎은 함부로 나부끼고 생살 찢긴 채 꺾여진 줄기. 자유를 지향하면서도 못내 그 뿌리를 떠날 수 없는 모순과 갈등으로 숲은 몸부림치는가. 타악기의 원색으로 난타하는 비. 빗금 긋는 선이 무수한 화살로 박힌다. 산 사태진 골에 선혈로 흐르는 황토. 거기에서 문득 히스크립의 처절한 절규를 듣는다. 히이드 우거진 폭풍의 언덕에 선 그의 충혈된 눈빛이 언뜻 스치는 번개의 섬광을 닮았다.
황급히 달음질치는 안개비. 거센 폭풍에 떼밀려 달아나는 잿빛 구름. 질주다. 채찍도 없는데 한 무리 야생마되어 달리는 구름과 안개 무리. 어릿어릿 환각제에 취하듯 눈을 가리는 농무. 비안개에 싸인 나는 순간 비천상을 꿈꾼다. 無縫의 天衣를 휘날리고자 하나 후줄근 젖어 물이 흐르는 몸. 잘못 간수한 장마철 미역단 꼴로 숲을 나선 나의 몰골은 반쯤 유령이다. 휘적휘적 골목길을 밟는다.
다행히 폭풍우 여세에 눌려 지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언덕 아래 낯익은 집이 풍랑 속 등대처럼 반갑다. 일상 가운데 나는 가끔 빛에서 어둠으로 자맥질해 보고 또다시 어둠에서 빛으로 발돋움해 본다. 그렇게 하면서 한 겹 껍질을 벗는다. 하여 나는 조금씩 견고해지는 것이다. 《86. 여름》
PS:이 글을 옮기며 순간 요셉에게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한창 살림재미에 빠져지내야 할 삼십 중반의 전업주부 의식세계로는 한심스러웠기에. 스스로가 읽어봐도 새삼 그러할진대 당시 이런 아내, 엄마를 겪어내야 한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미쳤군! 소리 안 들은 것만으로도 딴은 요행이며, 와중에도 삐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준 자녀들이 무진 고맙다. 허나 내면에 긁힌 상처 있었다면 어찌 용서를 구할까, 고개 떨궈 참회기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