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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베어 레이크에서의 하룻밤
by
무량화
Aug 3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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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엔젤리스에서 세 시간여 걸리는 샌버나디노 카운티의 빅베어 레이크 리조트.
딸내미가 아빠 생일을 맞아 마침 휴가철 되기에 미리 하룻밤 예약을 해놨다는 휴양지다.
여름철엔 호수에서 낚시를 하거나 카누 제트스키 카약등의 수상스포츠를 즐긴다.
겨울에는 스키와 눈썰매장으로 이름이 나있으며 사철 숲 속의 하이킹 코스가 기다리는 곳.
빅베어 레이크 가는 길은 아흔아홉 구비도 넘을듯한 구절양장 길이다.
7천 피트 가까운 산꼭대기를 향해 구불구불 꼬불탕 길을 유연하게 운전하는 딸내미.
뒷좌석에 앉은 엄마가 안전벨트하고도 손잡이 꽉 틀어쥐고 가니 운전자가 괜히 더 긴장된다나.
황야같이 메마른 산중턱과는 달리 오를수록 짙푸른 침엽수림이 울울창창하다.
손에 땀이 나도록 굽이굽이 얼마를 달렸을까.
리조트 단지가 보이며 눈꽃마을이란 한글간판의 산장 스쳐지나 드디어 정상중의 정상 파란 호수가 펼쳐진 목적지에 닿았다.
달력 그림에서나 본 것 같은 아름다운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뷰리플을 넘어서 와우~판타스틱!
폭이 1마일에 길이가 7마일이나 된다는 거대호수가 새파란, 무진장 새파란 가슴을 활짝 열었다.
차로 한바퀴 도는 데만도 거의 삼십 분이 걸린다.
딸내미는 아빠의 기대만땅인 송어낚시 포인트를 찾기 위해 다시 한바퀴 더 돈다.
곳곳에 마련된 편의시설과 야영지, 통나무 오두막집, 예쁜 별장지대가 펼쳐져 있다.
흔히 만나게 되는 곰돌이 나무조각들, 출렁댈 것 같은 오래된 나무다리, 하얗게 호수를 가르는 제트스키 물살, 오리 떼...
아주 오래전 이곳은 세라노 인디언 부족이 곰이며 온갖 산짐승과 어우러져 살던 마을이란다.
예약된 산장을 찾아가는 동안, 마술처럼 나타나는 양옆의 온갖 상점이며 우체국이며 소방서며 생활하기에 불편 없이 모든 것이 갖춰진 시가지.
초중등학교까지 있는 그럴듯한 타운이다.
꿀 먹은 곰이란 이름의 산장이 우리가 머물 곳.
여장을 풀고 본격적인 낚시 행보에 나선다.
송어며 베스며 메기가 잘 잡힌다니 매운탕꺼리까지 준비해 뒀다.
허나 미리 훌훌 김칫국부터 마셨던가.
낚시 라이선스 13불에 낚시도구 빌리는데 15불, 거기다 밑밥을 사서 호수로 나가
한나절 낚싯줄 드리우나 입질도 못 받은 채 얼굴만 끄슬리고 허탕.
낚시 고수 완전 헛물켰다.
그간 우린 호숫가 모랫벌에 자리 펴고 누워서 선탠 하면서 빛나는 태양, 하얀 구름 띄운 창창한 하늘과 찰싹대며 물결치는 소리 즐겼다.
솨아~~ 잣나무 스치는 바람소리 들으며 완전하고 온전한 휴식을 누렸다.
여태껏 내 여행개념 내지 여행방식이란 게 유치하다못해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여기저기 낯설고도 새로운 많은 곳을 둘러보며 부지런히 눈도장 찍어대야 했고 유명 풍물 배경 삼아 인증샷 남겨야만 했는데...
아니면 패키지여행 따라다니며 벅차고 피곤한 강행군 일정 소화하느라 늘어져버리곤 했는데...
90년대 태국을 갔을 때였다.
파타야 해변에서 느긋이 독서삼매경에 빠져있는 외국인을 보자 내심 의아했다.
아니 여행 와서 고작 책이야? 했더랬지.
직접 즐기며 맛 음미해 보니 그게 제대로 즐기는 휴양지에서의 휴가였더라는.
옐로스톤에서부터 며칠째 신문도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세상 물질문명과 연결된 모든 끈을 놓아버렸다
잡다한 세상사 잊고 아무 생각 없이 머리 말갛게
비운 채로 휴가를 위한 휴가, 여행을 위한 여행만을 즐기기로 하였다.
여름 성수기를 지난 터라 산장의 밤은 우리만의 독무대, 지글지글 바비큐를 하고 참나무 장작불을 피워 캠프화이어를 하고
천년약속이며 매화향기며 복분자술로 녹작지근 할랑하게 기분 풀렸다.
사족이지만 엘에이에 살면 술꾼 될 우려가 있을만치 벼라별 한국산 술이 흔한 데다 아주 착한 가격대.
술 사기도 편하거니와(동부처럼 리쿼스토어가 따로 없이 아무 글로서리에서나 구입) 값도 저렴해 어찌나 신통하던지.
이름만 보고 멋지다 싶으면 이것저것 마구 샀더니 옆에서 보고 어이없어하는 남편.
이튿날은 물가 대신 산행을 택했다.
하이킹 코스를 따라 고운 흙길 맨발로 걷다 보니 나 또한 자연의 일부로 동화된 듯.
곰 발바닥 그림이 이끄는 이정표 따라서 한바퀴 도는 동안, 잘 생긴 거대 암석 만나 기어코 올라가서 참선도 잠시.
잣송이 물고 가는 흔해빠진 다람쥐. 야생화도 산새소리도 놓치지 않았는데 다만 큰곰마을 호숫가에서 곰만 못 만나봤다.
점심에 야영지에서 끓인 라면 맛은 지난겨울 죠슈아트리 국립공원에서 눈 녹여 끓인 라면만큼 그 맛이 각별했다.
문득 그 편의성으로 하여 라면 개발자가 불현듯 고맙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또 하나 사족을 달자면 모닥불 피운 뒤 참나무 숯이 하도 소담하니 좋아 물 부어 식힌 다음 뉴저지로 갖고 왔다.
지금은 탈취제 겸 습기 제거제로 100% 활용하며 빅베어에서의 행복감을 수시로 반추한다.
빅베어 레이크에서 일박이일 휴가를 즐기고 아쉬운 발길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연봉이 끝없이 발아래 깔리던 하늘길.
그리고 고급 별장지대이던 아름다운 애로우헤드 레이크의 경관, 추억함에 고이 저장되었다.
무엇보다 모닥불 피운 그 밤, 산장에서의 하루는 그야말로 제대로 즐긴 멋진 휴가였다.
돌이켜보니
정녕 편안하고 행복한 여행의 진수를 누렸던 빅베어 레이크였구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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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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