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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 주, 기명색이 펼치는 빛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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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화
Aug 3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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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의 상징, 아치스캐년
아치스의 음성 메아리이듯 울림 아득하다
물경 3억 년 전 바다가 육지 되다
물과 바람만이 나를 빚는다
사암인 황톳빛 암벽군 괴이고 고인 듯
누리 만년 우뚝 서서 광년을 되새김질했노라
부드럽고 강건하게, 섬세하고 거칠게
무궁한 일월을 새겼노라
나 이대로 세세생생 오연히 유타의 광야를 지키리니
생성과 소멸 침식과 풍화를 숙명처럼 껴안고서.....
하루를 배웅하는 시간, 해질녘이다.
해거름 무렵의 자투리 시간에 산책하듯 천천히 아치스에 올랐다.
바위에 걸터앉은 그림자마저 길게 늘어진다, 안 그래도 나른해지는 시각이다.
사람들은 제각금 선정에 든 듯 침묵하고 빛은 아늑하니 부드러우며 공기까지도 안온한 게 아주 평화롭다.
고요로이
잠시 멈춤, 온전한 쉼의 순간이다.
기를 쓰고 용을 써봐야 백 년, 우주적 안목으로야 하찮은 시간이다.
https://brunch.co.kr/@muryanghwa/221
마주한 서녘 지평선 위로 얇게
깔아 둔 구름장 사이 해가 기운다.
숫기 없
는 처자처럼 구름 뒤에 살짝 숨어서.
해넘이라 하던가.
냉정하게 싹둑 잘라 일몰이라 부르기엔 어쩐지 매몰찬 것 같아 입만 달싹거리며 '음~해가 지는군' 한다.
이럴 땐 깍듯한 단어 태양이 아니라 어감 부드러운 우리말 '해'가 어울린다.
그러나 유타에서 만난 선셋만은 노을이란 연한 언어보다 석양이 걸맞지 싶다.
전체적 배경의 규모가
스펙터클 하면서도 거친 까닭이다.
석양의 무법자를 노을녘 무법자라 번역했다면 도통 어울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우스꽝스럽겠지.
'황혼'은 늙수그레 허리 굽은 노인을 떠올리게 하므로 이곳과 격이 맞지 않을 거 같고.
변산의 낙조대에 대한 선연스러운 이미지로 인해서인지 '낙조'는 왠지 황해 바닷가라야 짝을 이루는 느낌이고.
홍시빛으로 익어가는 석양 운운하는 시를 썼던 게 중등학교 시절.
겉멋에 취해 들었을 뿐 그땐 석양과 황혼과 낙조와 해넘이 중 시의적절한 단어 선정도 할 줄 모르는 치기 어린 시기였다.
해의 잔영이 완전
스러지고 나자 이윽고 색색가지 빛의 향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오로라나 무지개만이 가슴을 뛰게 하는 건 아니다.
시시각각 색감 달리하는 서천, 고즈넉하면서도 장엄하고 아련하면서도 강렬하다.
이렇듯 기명색은 따뜻하면서도 숭고하다.
대자연이란 무한대의 캔버스 그 화폭 가득 미묘하니 섬세하게, 부드럽고도
광포하고, 차분한가 하면 대담하게, 거침없이 자유자재 붓질을 한다.
걸림이 없는 저 무애의 경지!
뛰어난 명장 그 뉘라서 이토록 완벽한 신의 작품을 흉내라도 낼 것인가.
빈센트 반 고흐는 아를르에서 본 풍경의 아름다움을 1%도 자신의 화폭에 담아내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고흐의 고백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어느 문장가의 어떤 글, 선율, 그림, 사진이 감히 자연을 옮기면서 표현상의 만족을 욕심내랴.
산불이 번지는 듯하고 용암이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큰 너울이 몰려오는 듯하고 새떼의 군무와도 같은 석양빛.
마지막 빛의 무리가 화려하게 펼쳐둔 주황빛 주단을 거두며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 때까지 천변만화하는 서녘 하늘.
여간해선 멈출 것 같지 않던 빛의 축제가 이윽고 멎자 서서히 사방에 어둠살 내린다.
하루의 여정을 마친
만족스러운 느긋함,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윽한 응시와 포용을 동시에 허락하는 어둠.
참 편안하다.
지금 내가 서있는 삶의 자리가 바로
여기 짬이겠구나. 시간대도 아주 마침맞고.
지난
발자국들을 둘러 본다.
내게도 희망찬 아침이 있었고 빛나는 젊음의 한때가 있었으며...
달큰쌉쌀한 중년기를 넘어 고뇌와 갈등으로 들끓던 장년기라는 혼돈의 시간도 보냈다.
뿐인가, 뒤늦게 미국 와서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일에 매여 고인 물처럼 정체된 채 지내야 했던 예상 밖의 과정도 내 생의 일부로 겪어냈다.
곧이어 청남빛 밤하늘에 보석 알갱이처럼 별들이 하나둘 반짝이며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영롱한 별 무리 사이로 잠시 후 미리내 은물결도 보얗게 흐를 것이다.
일몰 시각은 8시 45분,
열 시경이면 찬연한 별밤의 신비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2016
델리게이트 아치에서 손 흔드는 개미만 한 존재인 우리 일행, 유타에서 우리는 바닷가의 닳고 닳은 조개껍데기처럼 작디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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