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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의 별떨기

by 무량화


단조로울 정도로 밋밋한 남프랑스의 평원들이 끝나자 메마른 바위산이 다 허물어져 가는 성채를 얹은 채 가끔씩 지나가기도 하였소. 교회를 중심으로 모인 자그만 마을과 숲 우거진 낮은 구릉도 스쳐 지났소. 그리고 닿은 곳이 아비뇽이었소. 파리와 니스를 잇는 경유지로서 한때 교황청이 있었던 곳. 70년간이나 로마를 떠난 교황이 지냈던 아비뇽 성과 론강을 낀 중세 마을이 볼거리라는 정도가 사전 지식의 전부였다오. 저만치 고풍스러운 다리가 허물어진 채 걸려있는 강은 묵직한 녹빛이었소. 시내로 진입하는 도로는 한적했고 인적 역시 뜸했소. 그런데 마치 언젠가 와본 듯한 묘한 낯익음, 까닭 모르게 데자뷔 현상이 일어나는 거였소. 가로수는 물론 잘 정비된 중앙분리대에 줄지어 선 나무, 그것은 놀랍게도 연분홍 꽃이 핀 자귀나무였었소. 아마도 난생처음 온 아비뇽이 생경하지 않음은 바로 그 때문이었나 보오.


아! 자귀나무꽃! 반가운 감탄사와 함께 순간, 아비뇽이 친근하기 이를 데 없는 안태 마을 같게만 여겨졌소. 그와 동시에 외숙모 얼굴이 떠오르더이다. 외삼촌네 뒤란 장광 옆에도 잘생긴 자귀나무가 있었고 유월이 되면 그 나무는 은근스러운 향을 풀어냈더랬소. 외숙모 치맛자락을 잡고 졸졸 따라다니던 나는 장을 뜨러 갈 적에도 물론 앞장섰으니 응당 친근한 나무가 되었지요. 윤회의 수레바퀴 돌고 돌아 지금은 어느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계시는지 알 수 없는 외숙모. 아주 오래전 선종하신 분이지만 내 생이 마감되는 날까지 잊힐 수 없는 그리운 외숙모, 그분이 내게 쏟은 사랑의 질량은 모정 못지 않았더랬다오.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한 여인의 한과 무엇으로도 채워질 길 없는 생의 허전함을 어린 생질이 어찌 알리까만, 학교 때문에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일주일을 겨우겨우 참아내던 나였지요.


눈물까지 짐벙대며 보고 싶어 하다가 토요일 오후만 되면 쏜살같이 나는 외숙모를 향해 삼십 리 길 치달리곤 하였다오. 마지막 산모롱이를 돌자마자 소리 높여 외숙모를 부르면서 달음박질쳤고, 그런 나를 맞는 외숙모는 텃밭에 있다가도 빨래를 하다가도 일거리 내던지고는 어린 나를 번쩍 안으며 마냥 좋아하셨지요. 어느 땐 예고 없이 다가가 살그머니 외숙모 등을 싸안아 놀래켜 줄라치면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 왔구나’ 하시며 둘러업고는 빙빙 돌던 분. 유장한 강줄기 같은 세월 거슬러 내 유년의 뜰에 서보면 언제나 청회색 그리움으로 자리한 외숙모. 그래서 해마다 자귀나무 꽃 필 무렵이면 산을 찾지 않고는 못 배기는 나라오. 그렇게 자귀나무 꽃그늘 아래 멈춰 서서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릴 수밖에 없다오.


외숙모는 전생에 나와 어떤 인연이었을까를 가끔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그날 문득, 외숙모가 아비뇽의 수도승이 아니었을까 싶었소. 나는 그 수사님을 발치에서 시봉해 온 시자, 그렇게 줄을 잇고 보니 홀연 묵은 수수께끼 하나가 풀린듯한 기분이었소. 어딘가 낯익은 듯한 거리, 언젠가 꿈속에서 본 듯한 가로가 그런 추측을 가능케 했지 싶었소. 물론 외숙모의 현신이듯 느껴지는 자귀나무와의 뜻밖의 해후가 직접작용을 했을 테지만요. 중세 수사와의 결부가 자연스러웠던 것은, 외숙모가 시골에서는 드문 독실한 천주교인이어서 일거라오. 성당이 세워지지 않은 두메라 외가마을엔 자그마한 공소만이 있었지요. 신부님이 상주하지 않는 공소를 이끈 것은 외삼촌이셨고 사철나무에 싸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던 외숙모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오.


남불 지중해에 가까운 도시 아비뇽에는 물굽이 거대한 론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소. 암록빛 너른 강 건너 저편, 전설에 싸인 고성인양 석양을 받아 한결 고즈넉해 보이는 옛 교황청사를 향해 다리를 건넜소.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황청은 종교시설물이라기보다는 높직이 버티고 선 성곽처럼 견고하고 무뚝뚝하기만 했소. 퇴락한 성채의 프레스코화, 무너져 가는 성벽에서는 짙은 허무가 배여 났소. 한때 권위를 과시하며 위풍당당했을 웅장한 종탑의 위용마저 왠지 허세 부리는 노인처럼 딱해 보였소. 찬란했던 과거 모두가 박제된 채 시간의 먼지로 화해 가고 있는 현장을 지켜보는 쓸쓸함이 문득 들더이다. 그건 아비뇽만이 아니라 역사 유적지마다에서 흔히 드는 추연한 소회였소.

반면 중세풍이 그대로 남아있는 광장을 둘러싼 곳곳 골목마다 각종 포스터가 어지러이 붙어 있었소. 도로에 널린 종이 쪽엔 무언가 행사를 알리는 안내글들로 가득 찼고 활기 감도는 거리는 생기발랄했소이다. 전위적인 광고지와 고전적인 포스터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으며 요란한 원색 물감이 자극하듯 도전하듯 시선을 이끌기도 하였소. 우스꽝스런 표정을 한 피에로 사진과 로맨틱한 분위기의 여배우 얼굴도 제각금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오. 한마디로 아비뇽은 커다란 연극 무대 같았소. 각기 주어진 역할에 따른 의상을 갖추고 그에 걸맞은 표정을 지으며 물결 져 흐르는 사람들로 술렁대는 거리. 그 속의 나 또한 인생이란 한바탕 연극에 울고 웃어야 하는 배우, 배역을 제대로 소화 못 시키는 서툰 배우일 따름.


이맘때의 아비뇽은 매년, 축제로 크게 붐빈다고 누군가가 설명해 주었소. 초여름에 열리는 연극축제는 널리 알려진 것으로 각국의 연극학도들이 모여 가설무대를 꾸미고 자유로이 작품 발표회를 연다고 하였소. 광장에 들어서자 이미 혼잡은 극에 달해 있었는데 귀청을 흔드는 트럼펫 소리며 아지 못할 타악기 소리가 원시의 리듬으로 쿵쿵 울려왔소. 그로테스크한 청동 조각이 선 광장 중앙에는 연극 무대가 한창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었소. 그 밖에 마술을 벌이는 무리, 팬터마임을 하는 사람들이 둥근 원을 이룬 관람객을 확보하고 열연 중이었소. 연극무대 옆에 대기하고 있는 팀원 가운데는 로마시대 복장을 한 사내, 궁정의 왕족처럼 치렁한 차림을 한 노인도 서있었소. 웃통을 벗은 젊은 남자에 요상한 깃털 장식을 단 가죽옷의 흑인까지 퍽이나 다채로워 연극은 그만두고라도 사람 구경만으로 흔이 빠질 지경이었소.


그뿐 아니라 골목마다 벌여 놓은 좌판의 장사치와 구경꾼이 각자 소리 높여 떠들어 대는 소리, 소리의 홍수 속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소. 은 제품이며 구슬 공예품과 목각품 등 토속적인 장신구를 팔고 있는 집시풍의 여인이 호객을 하며 헤픈 웃음을 날리고 있었소. 그 앞에서 잠시 기웃거리다가 사람들에 떠밀려 어둠살 내리는 광장을 나서며 돌아본 풍경은 혼란과 무질서판 그 자체였소. 하긴 우리의 야시장과 별로 다를 바 없는 풍물. 결국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슷비슷 어디인들 크게 다를 바 있겠소이까.


숙소에 돌아왔을 때는 아비뇽의 밤이 꽤 깊어졌더이다. 한참 떨어져 자리 잡은 숙소까지 광장의 소란이 들릴 리 만무하건마는 잠은 오지 않았소. 여러 생각이 교차되는 바람에 괜히 뒤척거리다가 잠을 놓쳐버려 침상을 벗어나 창가로 다가갔소. 커틴을 제치고 창문을 여니 푸르스름한 야기가 전신을 감싸며 그 숨결 어딘가에 묻은 자귀나무 꽃향을 전해 주는 거 같았소. 감동을 하면 우리는 하늘을 우러르지요. 그날, 하늘을 보니 아주 아름다운 별밤이 열려있더이다. 주인집 아가씨를 밤새워 지키던 어느 목동이 바라본 별송이처럼, 야청빛 밤하늘에는 프로방스다운 맑고 영롱한 별떨기들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오. 1993


그로부터 이십여년이 지나 내가 사는 곳은 랭카스터. 뒤란에 심은 자귀나무가 연분홍 꽃을 피워 올렸소. 뉴저지에서 데려올 땐 회초리처럼 가느다란 묘목이었는데, 그새 밑둥치가 장정 팔목만큼 굵어졌다오. 하고많은 나무 중에 자귀나무만을 챙겨 온 까닭은 부부화락의 상징성 때문이 아니었소. 5학년때 자주 가서 놀았던 담임선생님 경대에 놓인 코티분, 자귀나무꽃이 분곽에 새겨진 그 분가루의 고운 향이 생각나서도 아니라오. 유년기 외갓집에의 그리움이 담긴 향수 어린 나무이자, 오래전 유럽여행에서 잠시 들른 아비뇽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 깃든 나무라서였소. 1993년 여행을 다녀와서 쓴 글을 펼쳐보니, 그때의 필름은 사라졌어도 기억은 남아 다시금 은은한 향기로 떠오르는 아비뇽. 다시 한번 그곳에 가보고 싶어 지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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