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하 역시 모친을 따라 중국에 망명했다가 일제로부터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미성년이란 이유로 본국에 송환됐다.
아무 의지가지 없는 몸이라 청도 운문사에서 은둔하기도 했으며 독학으로 의학 공부를 해서 의사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미 형과 누이마저 독립 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버려 홀로 시련을 이겨 내며 공부해서 외과 의사가 되었던 입지전적 인물인 박문하선생.
부산 동래 수안동에서 병원을 개업해 한손에는 청진기, 한손에는 펜을 들고 수필을 쓰며 부산문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예나이제나 대체로 글쟁이들은 경제관념이 희박해서인지 주머니가 얇은 편이다.
당시 의사였던 그는 문단의 어려운 재정을 음양으로 도왔고 문인간 친목 도모에도 힘을 기울여 늘 흔쾌히 지갑을 열었다.
부산의 작고 문인을 재조명하는 사업에도 앞장서는가 하면 수필을 자주 발표하며 아주 활발하게 문학활동을 했다.
겨우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가 했으나 대학 다니던 장남이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과 해수욕하던 중 익사사고로 잃게 된다.
그 참척의 아픔을 술로 달래다보니 진찰실에 소주병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는데 결국 간암으로 58세에 눈을 감았다.
이 가계의 막내인 박문하선생의 수필, 교과서에도 실렸던 <약손>을 끝으로 싣는다.
약동래인 박차정의 충의(忠義)라는 딱딱한 제목의 글은 부드러운 수필로 마무리 짓는다.
약손/박문하
여섯 살 난 막내딸이 밖에서 소꿉장난을 하다가 눈에 티가 들어갔다고 울면서 들어왔다.
어린것들에게는 제 아버지라도 의사라면 무서운 모양인지, 아프지 않게 치료를 해 주마고 아무리 달래어도, 혹시 주사라도 놓을까 보아서 그런지 한층 더 큰 소리를 내어 울면서 할머니에게로 달아나 버린다.
할머니는 손녀를 품안에 안으시고는 아픈 눈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시면서 자장가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는 것이었다.
“까치야 까치야 네 새끼 물에 빠지면 내가 건져 줄 터이니 우리 민옥이 눈의 티 좀 꺼내어 다오.”
어린것은 어느 새 울음을 그치고 할머니의 품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어 버린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연세가 여든을 넘으셔서 고목(古木) 껍질처럼 마르고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 의사들이 가지지 못한 신비한 어떤 큰 힘이 하나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옛날에 우리 집은 무척 가난하였기 때문에 우리 형제(兄弟)들은 병이 나도 약 한 첩을 써 보지 못하고 자라났었다.
우리 형제들이 혹시 병으로 눕게 되면 어머니는 약 대신에 언제나 그 머리맡에 앉으셔서는 저렇게 “까치야 까치야…….”를 외시면서 우리들의 아픈 배나 머리를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그 아픈 배나 머리가 씻은 듯이 나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머니의 손을 약손이라고 불렀었다.
나는 문득 내 손을 펼쳐 보았다. 진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현대(現代)의 약손이라고 일컫는 의사의 손이다. 그러나 미끈하고 차가운 내 손에는 아무래도 무엇인가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어린 손녀의 아픈 눈을 어루만져 주고 계신 어머니의 손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손에서 슈바이처보다도 한층 더 뜨겁고 진한 체온과 정신을 새삼스레 가슴 속 가득히 느꼈다. 그리고 고목 껍질 같은 어머니의 손이 오늘따라 자꾸만 모나리자의 손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