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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인 박차정의 충의(忠義)

by 무량화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하여 이름 지어진 釜山은 지형이 남해바다와 임해있다.

부산진성 수영성 동래성 다대포성이 그러하듯 성문마다 모두 바다쪽 왜를 겨냥해 단단히 방비책을 세웠다.

그럼에도 무능한 왕조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백성을 저버린 꼴이 되었고 국력 쇠미해진 조선은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서명으로 체결된 이른바 을사늑약.

그들 다섯은 을사오적으로 불리며 두고두고 증오의 대상이 된 역사의 죄인들이다.

매국 대신들이 서명하므로 주권을 탈취 당하게 되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서 주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이 맹렬하게 전개되었다.

저마다 민족의식이 고취되면서 각처에서 우국지사들이 의거에 나서 의병들 봉기해 투쟁하였으며 애국계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 모든 저항운동의 바탕은 충의에서 비롯된다.

충(忠)은 올곧은 마음이다.

허식 없이 자기의 온 정성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가운데(中)에서 우러나는 마음(心)이 충(忠)이란 글꼴을 이룬 이유다.

충심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정성스럽고 진실된 마음가짐이며 절개와 의리를 지켜 지조있게 행동하는 대쪽같은 자세이다.

충의로운 분의 삶은 대부분 자기희생이 따랐으니, 고난을 무릅쓰고 순사(殉死)하였으며 편안히 일생을 마친 경우가 드물다.

정몽주 성삼문 이순신 유관순 같은 분들의 일생을 떠올려보면 충의의 뜻이 쉽게 와닿을 터다.

을사조약(乙巳條約) 체결후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당시 반일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21세기에 웬 상소문?

인터넷에 '시무7조'란 글이 조용히 그러면서 뜨거운 화제거리로 회자되는 데는 그럴만한 근본원인이 있으렷다.

오늘날 충의(忠義)의 덕은 자기의 능력과 정성을 다하여 생업에 종사하면서 정직하게 세금내며 백성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또한 백성에게 신망 얻는 위정자의 충의는, 국법을 준수하며 진실로 국가의 미래를 위해 희생적으로 직분을 다하는데 있다.


박차정 의사(1910~1944)는 부산 동래 출신으로 아버지는 박용한(朴容翰)이고 어머니는 김맹련(金孟蓮)이다.


위 사진이 나타내듯 표정 강직한 부친은 경술국치의 울분으로 끝내 자결했으며, 강단있어 보이는 모친은 재산을 팔아 아낌없이 독립자금으로 썼다.


숙부인 박일형, 외가 친척들인 김두봉 김약수를 비롯, 오빠인 박문희와 박문호가 항일 운동에 뛰어든 그런 집안 내력이 있다.


열다섯 살 되는 해 이미 조선소녀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동래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재학시절,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수차 감옥을 드나들게 되었다.


이때 일신여학교의 <교지>인 일신 2집에 발표한「철야(徹夜)」라는 소설은 이 시기 박차정의 항일의식을 잘 나타낸 글로 평가받는다고.


여학교를 마친 후 상경하여 여성들의 좌우합작 민족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하면서 활동의 폭을 넓혀나갔다.


1930년 오빠의 권유로 중국에 망명하여 북경 화북대학(華北大學)을 졸업하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핵심단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결혼했고 1932년에는 남경으로 옮겨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부 교관으로 교양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의 지원단체인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여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하였다.


1939년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강서성 곤륜산(崑崙山) 전투에서 입은 어깨 총상의 후유증으로 독립 직전 해에 35세의 나이로 숨졌다.


유해는 해방 직후 송환되어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에 안장되었다.


김원봉의 두 번째 부인이며 근우회와 부녀복무단에서 활동했던 박차정 의사.


박차정은 여성이나 당당한 의사, 총을 들고 무력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의롭게 눈을 감은 의사(義士)다. 안중근의사, 윤봉길의사처럼.


무기를 들지 않고 맨몸으로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지키며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은 열사(烈士)다. 유관순열사처럼 말이다.


박차정 생가를 찾은 지난해 구월, 그러나 진작에 그 가계에 관한 이면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영화 <암살>에서 다룬 바 있는 약산 김원봉은 지난해 광복절날 또 한차례 소환당한 이름으로 박차정의 남편이다.


오라버니의 오랜 동지이자 일제 항거 운동에 관한 한 이념적 동지였던 그들은 열두살 나이 차이 마저 극복한다.


약산은 첫 아내와 헤어지고 그렇게 스물한살 박차정과 결혼하는데 자녀는 없는 걸로 나타났으며, 박차정 사후 세번째

로 다시 결혼해 아들을 두었다.


1919년 아나키즘 계열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을 창설해 단장이었던 그는 1948년 김규식선생과 같이 남북협상에 참가했다가 북에 남는다.


국가 검열상, 노동상을 겸임하며 직접 지휘 하에 남한내의 경제 혼란 및 선거 방해 목적으로 간첩을 남파시키기도 했던 그.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로력훈장을 수여받았다.


동족상쟁의 참담한 육이오를 치른 뒤인 1953년 '조국해방전쟁(한국 전쟁)에서 공훈을 세운 지도일꾼'으로 받은 훈장도 있다.


몇년지나 김일성과의 정치 암투에서 패배하여 1958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로 대의원 권한이 박탈되며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의 사망에 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으나 정치범수용소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일찌기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독립군을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범석장군은 '김원봉 일파는 자기세력 확충에 혈안이 되어 옌안(延安)과 내통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의열단 단장이자 광복군 부사령관에 오르기도 했던 약산의 경우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는 이력이 있긴 하다.


허나, 광복 후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상훈 수여 이력까지 있어서 국민정서에 위배되는 인물이라 국가유공자 서훈에서 배제됐다.


저간의 사연이 이처럼 복합적으로 얽혀 감정의 결이 착찹한지라, 선뜻 포스팅을 하고 싶지 않기에 차일피일 미뤄뒀던 생가 방문기다.


부산 수필계의 원로인 박문하선생은 외과의사 수필가로 박차정의 바로 아랫동생이다.


그의 두 형님과 누이가 혁혁한 독립운동을 한 혁명가 집안이건만 드러내놓고 밝히기를 꺼린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바 있었다.


새내기 시절, 목필동인인 김병규박사님이 초창기 부산수필문단에 대한 회고를 하시며 박문하선생 일대기를 들려주셔서 내력은 대략 안다.





우하 박문하(1918~75)는 처한 시대 상황이 그러하기도 했지만 유독 인생 굴곡이 자심했던 분이다.


부친이 일제에 항거하여 자결하므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바로 이 터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그리 유복하지도 평안치도 못했으리라 짐작된다


맏형 박문희는 신간회에 관여하다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둘째형 박문호도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옥사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해 여자의용군 대장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박차정은 그의 누나다.


박문하 역시 모친을 따라 중국에 망명했다가 일제로부터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미성년이란 이유로 본국에 송환됐다.


아무 의지가지 없는 몸이라 청도 운문사에서 은둔하기도 했으며 독학으로 의학 공부를 해서 의사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미 형과 누이마저 독립 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나버려 홀로 시련을 이겨 내며 공부해서 외과 의사가 되었던 입지전적 인물인 박문하선생.


부산 동래 수안동에서 병원을 개업해 한손에는 청진기, 한손에는 펜을 들고 수필을 쓰며 부산문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예나이제나 대체로 글쟁이들은 경제관념이 희박해서인지 주머니가 얇은 편이다.


당시 의사였던 그는 문단의 어려운 재정을 음양으로 도왔고 문인간 친목 도모에도 힘을 기울여 늘 흔쾌히 지갑을 열었다.


부산의 작고 문인을 재조명하는 사업에도 앞장서는가 하면 수필을 자주 발표하며 아주 활발하게 문학활동을 했다.


겨우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가 했으나 대학 다니던 장남이 서울에서 내려온 친구들과 해수욕하던 중 익사사고로 잃게 된다.


그 참척의 아픔을 술로 달래다보니 진찰실에 소주병이 떨어질 날이 없었다는데 결국 간암으로 58세에 눈을 감았다.


이 가계의 막내인 박문하선생의 수필, 교과서에도 실렸던 <약손>을 끝으로 싣는다.


약동래인 박차정의 충의(忠義)라는 딱딱한 제목의 글은 부드러운 수필로 마무리 짓는다.


약손/박문하



여섯 살 난 막내딸이 밖에서 소꿉장난을 하다가 눈에 티가 들어갔다고 울면서 들어왔다.


어린것들에게는 제 아버지라도 의사라면 무서운 모양인지, 아프지 않게 치료를 해 주마고 아무리 달래어도, 혹시 주사라도 놓을까 보아서 그런지 한층 더 큰 소리를 내어 울면서 할머니에게로 달아나 버린다.


할머니는 손녀를 품안에 안으시고는 아픈 눈을 가만히 어루만져 주시면서 자장가처럼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는 것이었다.


“까치야 까치야 네 새끼 물에 빠지면 내가 건져 줄 터이니 우리 민옥이 눈의 티 좀 꺼내어 다오.”


어린것은 어느 새 울음을 그치고 할머니의 품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어 버린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연세가 여든을 넘으셔서 고목(古木) 껍질처럼 마르고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 의사들이 가지지 못한 신비한 어떤 큰 힘이 하나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옛날에 우리 집은 무척 가난하였기 때문에 우리 형제(兄弟)들은 병이 나도 약 한 첩을 써 보지 못하고 자라났었다.


우리 형제들이 혹시 병으로 눕게 되면 어머니는 약 대신에 언제나 그 머리맡에 앉으셔서는 저렇게 “까치야 까치야…….”를 외시면서 우리들의 아픈 배나 머리를 따뜻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그 아픈 배나 머리가 씻은 듯이 나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머니의 손을 약손이라고 불렀었다.


나는 문득 내 손을 펼쳐 보았다. 진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현대(現代)의 약손이라고 일컫는 의사의 손이다. 그러나 미끈하고 차가운 내 손에는 아무래도 무엇인가 중요한 것 하나가 빠져 있는 것만 같았다.


어린 손녀의 아픈 눈을 어루만져 주고 계신 어머니의 손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손에서 슈바이처보다도 한층 더 뜨겁고 진한 체온과 정신을 새삼스레 가슴 속 가득히 느꼈다. 그리고 고목 껍질 같은 어머니의 손이 오늘따라 자꾸만 모나리자의 손보다도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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