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엉겁결에 북경엘 다녀왔다. 아니 내친김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구입한 뉴욕 -한국 왕복 항공권에 덤으로 얹혀 딸려 가게 된 터였다. 진작에 몇 번 다녀온 중국이라 별 흥미야 있겠나, 특별한 기대도 걸지 않았다. 다만 몇 해 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행사 때에 시청각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 화합을 주제로 한 연출이 대단했던지라 내심 변모한 중국이 보고도 싶었다. 쿵! 하며 무언가가 심장을 치받는 듯한 기분이 들만큼 충격적이었던 올림픽 개폐막식. 그 이후 여러 면에서 눈부신 성장을 했으리란 예상은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호기심 없이 '기회가 거저 주어졌으니 그냥 가보자'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생각하고 떠났던 곳이다.
한국에서 살 적에 다녀온, 90년대의 북경과는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달라진 풍경들. 우후죽순처럼 솟은 건물의 높이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거리 곳곳의 조경이 잘 다듬어져 있어 도시 품격을 제대로 완성시켰다는 느낌에다 전과는 달리 거리가 아주 깨끗해졌다. 국민의식이나 생활수준이 월등 향상되어 있음이 한눈에 띄었다. 예전보다는 거리질서가 잘 잡힌 것도 달라진 점이다. 사람들 차림은 깔끔했고 표정은 자신감에 차있었으며 저마다 당당하니 활기차 보였다. 차도를 따라 물결 져 흐르는 차량의 대부분이 이름 있는 고급 외제차라 놀랍기도 했다. 특히 현대자동차가 택시의 주류를 이루며 거리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어 반가웠다.
사람(물결 밀려오듯 떼 지어 다니는 중국 인민들) 구경만으로도 멀미가 날듯한 유명 관광지.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무용시극이라 이름 붙은 금면왕조라는 뮤지컬을 관람한 것은 북경에서 건진 예상 밖의 수확이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떠난 여행이라 진작에 그리도 호평을 받았다는, 중국이 대내외적으로 자신 있게 내건 문화상품인 최대 뮤지컬이건만 처음엔 관람이 전혀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요금이 680위안에서부터 120위안, 최저 후진 좌석이라도 40불은 지불해야 하니 가이드 상술에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하긴 라스베가스 최대 호텔인 윈이 간판으로 내세우는 '르 레브' 쇼를 백 불 넘게 주고 보긴 했다. 캐나다가 자랑하는 태양의 서커스도 필라델피아 특별공연에서 백 불짜리 좌석에서 구경한 적이 있다. 한국의 대형 뮤지컬 무대도 18만 원에 관람했는데 외려 그에 비하면 저렴한 편인 금면왕조. 헌데 처음 장면부터 단연 타의 추종불허, 비교불허, 과연 굉장했다. 그 한편, 북한 아동들의 일사불란하던 카드섹션이 겹쳐지며 전율이 느껴졌다.
가령, 경극이라면 모를까 북경에서 무슨 쇼구경이람? 시극이란 여행안내지 설명에 툴툴거리며 어거지로 차에 실려가면서도 내심 시큰둥했다. 허나 환락곡이란 곳의 전용극장에서 만난 금면왕조는 한마디로 쇼킹~ 탄성이 절로 터지지 않을 수 없는 대단한 스케일의 퍼팩트한 무대였다. 색채감각이 뛰어난 데다 물량공세에 능한 장예모의 연출작다웠다. 조잡한 싸구려 저가품이나 만들어내는 세련되지 않은 중국이라는 선입견이 한방에 무너졌다. 그들이 지닌 힘, 그 무한잠재력에 오싹 전율이 일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겁나도록 엄청난 스케일로 압도해 오는 스펙터클한 무대뿐만이 아니다. 정교한 세트에 최첨단 조명, 화려한 의상, 완벽한 연기가 펼쳐내는 환상적인 뮤지컬이 바로 금면왕조였다.
고대전기를 바탕으로 했으면서 현대적 기법을 동원, 화려 찬란하게 꾸며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대는 웅장하고 몽환적이었다. 매혹적이면서 입체적이고 역동적이었다. 친절하게도 무대 정면 휘장에 한글로 깔리는 자막이 있을 정도로 얼마나 한국 관객이 많은지 우리의 경제성장 수준을 실감하기도 했다. 안내글에 '이는 중국의 이야기이다. 먼 옛날의 로맨틱한 전기이며 머나먼 역사의 기억에서 주워온 파편이다.' 이처럼 첫마디부터 중화사상으로 똘똘 뭉친 자긍심을 스스럼없이 표출해 냈다. 극 내용 자체도 최면 걸듯 슈퍼 파워로 부상하며 무한대로 뻗어나갈 중국의 번영을 상기시켰다. 그럴수록 가일층 경계해야 할 차이나가 아닌가.
스토리 자체는 극히 상투적이다. 금가면의 여왕이 통치하는 금면왕조는 평화를 누리며 살다가 이웃한 청가면의 남면왕조와 전쟁을 치른다. 승리자 금면 여왕과 용감했으나 전쟁에서 패배, 사로잡힌 남면왕은 달빛 교교히 푸른 밤 사랑에 빠지고... 그 태평성대에 몰아닥친 대홍수로 위기에 처한 국가. 사랑하는 님과 백성들을 도탄에서 건지기 위해 여왕은 스스로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친다. 여왕은 죽어 찬란한 금빛 태양새가 되어 세세대대 금면왕조의 번영을 지켜준다는 그렇고 그런 스토리다. 허나 그 안에 담긴 음험한 메시지를 주변국들은 새겨들어야 할 줄 안다. 공고히 그리고 은밀히 동북공정 서북공정을 펼쳐나가고 있는 차이나 당국이다.
아직도 유명 관광지조차 안내 팸플릿 인심이 야박스럽다 못해 여전 궁상스러운 중국. 극장에서 달랑 한 장 내준 초라한 광고 전단지에 깨알같이 쓰인 설명문대로다. 서사적인 중국 고대신화를 현대적 기법으로 버무려 재연시킨 무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장엄 화려하여 메이드 인 차이나 맞아? 할 정도로 매 장면마다 입이 벌어지는 장관의 연속이었다. 꿈결처럼 아름다운 음악, 왕가 여인들의 고혹적인 발레,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의 전쟁 장면. 서커스같이 펼쳐지는 완벽한 아크로바트 묘기, 살아있는 흰 공작을 머리에 이고 추는 군무. 달빛 교교히 흐르는 밤의 깊은 숲 정령들, 희생적인 죽음으로 하늘에 오르는 금면여왕의 신비로운 최후까지 판타스틱하게 관객들을 홀렸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떠내려갈 정도의 큰 홍수로 물바다가 되는 세트야말로 압권이었다. 실내 무대에서 실제로 수백 톤의 물이 홍수 져 범람하는 경이로운 장면에 이르자 저절로 신음 같은 감탄사가 터지고 말았다. 화교들의 자금을 들여와 중국 최정상급 스태프진들이 2년에 걸쳐 국가적 사업으로 만들어냈다는 뮤지컬다웠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적절히 결탁시켜 포장한 그들의 문화상품 속으로 홀린 듯 빠져들면서도 중국 정부 당국의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영 께름칙하고도 불편스러웠다. 구경 중에 자꾸만 북한의 완결무결해서 무섭고도 끔찍한 매스게임이 떠오르기도 해, 더더욱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사회주의 국가의 상징인 붉은 별과 오성홍기가 펄럭이며 들려주는 섬뜩한 국가관을 보는 것 같아서 그 상징성에 전율하고, 또한 국력신장의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 같아 거듭거듭 전율이 일었다.
이 뮤지컬이 영감을 얻어 차용한 황금 마스크만 해도 그렇다. 중국 남서부 쓰촨 성 삼성퇴 유적지에서 발굴된 금 가면을 모티브로 삼았는데 그들 표현인즉 문화적 원류에 대한 탐색이란다.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자랑스레 황허문명을 내세우는 중국이다. 그럼에도 제9의 불가사의한 문명권이라 칭해지는 신원불명의 민족이 만들어 낸 금 가면이다, 한족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알 수 없는 어떤 종족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모티브로 택한 것이다. 속내 진짜 이유는 그들 자취조차도 중국 역사에 확고히 편입시키고자 하는 속셈이 깔린 것이리라. 증발되듯 사라진 제국 그러나 중국땅에 엄연히 존재해 온 민족의 하나였던 금 가면의 나라다. 그것을 수용했다는 것은 곧, 현재 중국이 한족을 제외한 55개 제각각인 소수민족을 하나로 아우르려는 국가정책과도 맞물리는 계산 아니랴.
그들 스스로 G2를 논한다, 이 시대 자타가 공인하듯 미국과 더불어 초강대국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해 가는 중국의 위상이다. 그들은 글로벌 시대를 겨냥해 진즉에 중국판 CNN을 제작하여 방송 중이기도 하다. 일찍이 나폴레옹이 그 나라는 잠을 재워야 한다고 했던 그 중국이다, 이제 잠에서 깨어나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게 날로 달로 강해지고 비대해지는 중국이다. 반면 중국 바로 곁에서 수천 년을 부대끼며 살아온 인접국 한국이다. 우리나라는 정치 경제 외교 군사 문화 여러 측면에서 중국과의 마찰이 불가피한 지정학적 숙명을 안고 있다. 중국이 펼치는 음흉한 동북공정이 아니라도 이처럼 여러 면에서 분쟁과 갈등이 생길 소지가 다분한 데다 북한 문제와 연결되면 더욱이 중국이란 나라는 우리와 골치 아프게 얽히는 나라다. 오늘 인터넷 뉴스에서 '중국의 반도체 산업, 한국을 추월할 만큼 비약적인 발전'이란 제하의 글을 읽다 보니 그날의 뮤지컬이 문득 생각나며 이런저런 상념들에 잠기게 한다. -2012-
<혹시나 하고 동영상을 검색해보니 금면왕조는 여전히 공연을 이어가는 중. 문화상품화되어 관광객을 대상으로 아직도 우려먹고 있다는데 깜짝 놀랐다. 저 당시는 극장 내에서 레이저 빔을 쏘며 강력 규제하는 사진촬영인지라 광고전단인 카탈로그 외에는 모든 사진 유출이 금지됐던 시절. 당초엔 밖으로 나온 사진이 거의 없었으나 현재는 금면왕조가 통째로 돌아다니기에 동영상과 화보를 제대로 옮김. 한반도가 과거에 중국의 일부였다는 사관을 가진 시진핑에게 빌붙으려는 쓸개 빠진 작자들도 공존하는 우려스러운 이 나라. 설마 그들 속국으로 살고 싶은 건 아니겠지.... >
https://brunch.co.kr/@muryanghwa/530 티베트를 통해 중국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