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안개 내리는 지리산 화개골 차밭을 기억한다. 초의선사가 거처한 일지암을 찾았을 땐 숲을 헤매는 자욱한 눈안개와 만난 적이 있다. 다산초당에서는 시야가 흐릴 정도로 뿌옇게 몰려오는 안개비에 젖었다. 잠시 스쳐 지난 보성다원에 흐르던 깊은 안개. 그리고 어느 겨울 제주 설록원엔 이미 봄의 입김이 안개이듯 스미고 있었다.
용정차의 산지를 찾기로 한 그날 아침. 항주 시가는 아물아물 안개에 취해 몽롱했다. 항주를 감싸 흐르는 전단강이 있어서인가. 시내 복판의 서호가 만들어 내는 안개인가. 우윳빛 안개에 싸인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신선 노닐듯이 사는 차나무. 기후 온후하고 강우량이 많은 곳이 차의 산지로 적격이라 했다. 그래서인지 차와 인연 된 곳에 으레 운무가 따른다. 찻잎이 향그럽게 피어나기 위해선 알맞은 습기가 필수인지 모를 일이다.
서호천에 용정차를 달여 마시며 안갯속에 자란 죽순을 수시로 즐겨 미녀가 많이 난다는 항주. 저장성의 성도(省都)이자 화동지방 굴지의 도시답게 시가는 정비된 고층빌딩과 붐비는 인파로 활기가 넘쳤다. 비록 아황산가스로 공기는 메케했으나 우리도 고도성장의 뒤안길에서 익히 경험한 냄새가 아니던가. 가로수가 잘 가꿔진 도시라는 첫인상에 이어 상해나 소주에서 만나지 못했던 산과도 비로소 상면했다. 모처럼 숲 푸르른 산을 대하니 호흡이 다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항주의 명소는 꽤 여러 곳이었다. 첫 번째 볼거리는 육화탑. 산허리에 자색 띠처럼 여전스레 안개가 걸려 있는 아침을 달려, 13층 높이의 탑이 웅자를 드러낸 산기슭에 이르렀다.
중국은 땅만 너른 게 아니라 민족성 역시 호방해 작은 것엔 여간해서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궁성을 지었다 하면 천 칸에 이르고 성을 쌓았다 하면 만리에 닿는다. 탑을 올려도 하늘을 찌를 듯 규모가 엄청 크다. 숫제 무작스럴 정도다. 어마어마한 힘의 결집 앞에 압도당하기도 하지만 비인간적 횡포가 자행되었을 절대권력의 만용에 분노가 일기도 한다. 일일이 사람의 손이 이룬 결정체들. 그 당시 건축기술인들 변변했을 것이며 그런 만치 여기 투입된 노동력은 얼마였을까. 공사 중 죽어간 사람은 또 얼마였을까.
사철 언제나 아름답다는 서호는 예상외로 평범한 호수였다. 황량한 겨울이라서 일까. 경국지색이라는 미모의 서시(西施)에게서 이름을 따온 서호건만 별로 눈에 띄는 풍광이 아니다. 하긴, 봄날 버들가지 사이로 여울지는 꾀꼬리 노래를 듣는다거나 수면에 수 놓인 연꽃밭을 본다면 경탄이 나올 법하다. 호수를 가로질러 길게 뻗은 둑, 소제(蘇提) 위의 돌다리는 그런대로 운치로웠다. 유람선을 탄 한 시간 여. 싱겁기 그지없는 뱃놀이를 감칠맛 나게 해 준 것은 비상하는 물새 떼의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안개 너머 유유자적 떠오르는 원앙 무리는 점점의 섬보다 더 시(詩)적이었다.
영은사를 찾았을 땐 한낮. 운강석불을 본뜬 대불상의 마중에 이어 비래봉 산속 동굴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한결같은 솜씨도 솜씨려니와 도대체 누가 무슨 원력, 어떤 재주로 박쥐같이 동굴 벽에 붙어 힘든 끌질을 했을까. 그중 무참히 얼굴이 뭉개진 불상들이 눈길을 끄는데 이는 문화혁명 당시 홍위군의 광란이 저지른 짓이라 한다. 종교를 아편이라 매도한 그들. 신앙대상인 불상 파괴가 합당한 일이라고 그들은 판단했던가. 결국 문화재 훼손으로 나타난 몰상식과 무지막지함은 두고두고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차게 만들 것이다. 세계최대인 석가여래좌상이 모셔진 영은사 대웅전은 장엄한 데다 닫집의 정밀한 구조는 물론 배후의 조각군이 입을 벌어지게 했다.
용정촌 어귀에 이르니 안개같이 깔린 저녁 이내 속에 차밭이 소복이 엎드려 있다. 항주 남쪽 수려한 용정산 봉우리에 늘 구름 머물고 안개 끼는 지역적 특색으로 해서 용정차는 태어난다. 특히 그 잎이 진녹색을 띠고 향기가 유다르다는 용정차. 안계 철관음과 더불어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용정차는 서호천의 물맛과 함께 항주의 명물이다.
이름이 차 공장이지 특산품 가게 수준의 이층 건물에 들어서자 조선족 안내인의 용정차 설명이 유창하다. 기름진 음식을 즐기는 중국인의 식생활 습관에도 불구하고 차를 상용하므로 고혈압과 동맥경화에 걸리지 않는다는 그들. 거기다 알칼리성체질을 개선시키는 효능은 물론 항암효과가 탁월하다는 녹차 중의 녹차라는 용정차다. 일찍이 차의 이론가 육우가 다경(茶經)을 쓰면서 차 문화의 초석을 다진 이후, 차는 중국인의 생활 속에 고루 확산되었다고 한다.
평소 격식 두지 않고 편하게 녹차를 대해온 나로선 차가 지닌 오묘한 경계를 제대로 알 리 없다. 그런만치 차 맛을 옳게 분별할 줄 몰라서인지, 일급 용정차나 화개산 세작이나 향과 빛이 흡사한 것 같다. 굳이 신토불이를 들먹일 것도 없이 중국산 용정차가 아니라도 나름대로 괜찮은 국산 차도 여러 종류다. 겉멋 들린 사람들이 차 한잔 놓고 부리는 허영은 풍류랄 수도 없잖은가.
차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역사에 등장해 왔다. 실제로 남부지방 곳곳엔 진작부터 차밭을 가꾼 흔적이 남아있다.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로부터 차 씨를 가져와 심기 시작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차의 유래를 더듬곤 한다. 그러나 죽로차의 고향 김해에서는 수로왕비 허 왕후가 인도에서 갖고 온 물품 중에 차도 포함됐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신라 이전에도 차가 있었으며 다만 널리 보급된 것이 불교가 성한 신라시대였으리라는 유추다.
조상께 제(祭)를 올릴 때도 다례(茶禮)라 하여 쓰인 차. 뿐만 아니라 화랑도는 차를 통해 통일정신을 가꾸었으며 다선일체라 해서 선을 하는 스님들이 즐겨 온 차. 조선조에는 문사나 선비들이 근근 차의 맥을 이어 오늘에 이르렀다. 근자 들어 커피로 통하던 차 문화가 차츰 우리의 전통차로 자리바꿈 하는 현상은 바람직스러운 일이다. 여행에서 돌아와 모처럼 격식 갖춰 찻상에 차려 본다. 솔바람 소리를 내며 물이 끓자 천천히 분청다기에 차 한잔을 우린다. 안개 촉촉한 차밭이 어른거리는 차빛이 곱다.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