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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에 진 봉이김선달

by 무량화

손주가 방학 동안 한국 본가에 갔다가 개학이 되어 돌아왔다. 아들이 보낸 선물을 펼치니, 비행기 짐칸에 넣지 말래서 끌어안고 오느라 힘들었다는 신라토기 외에 차가 두 상자나 있었다. 아들은 내 취향과 식성을 잘 알뿐만 아니라 기호도 비슷하다. '마시는 골동품'이라고도 하는 04년 산 차순호원차는 윈난 성 남쪽 보이현이 고향이다. 울멍줄멍 솟은 높은 산이 란찬강과 어우러져 사시사철 운무가 흐르고 일교차도 심한 곳이다. 이처럼 차나무의 자생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고육대차산의 무공해 차를 선별, 우전의 어린잎을 정선하여 만든 중국명차다. 맑고 깨끗하면서 달달한 식물성 향이 서려있다. 보이차는 숙성의 산물이다. 와인이나 위스키가 그러하고 장맛 역시도 오랜 숙성기간을 거치면서 깊은 맛을 빚어낸다.



겉포장을 열자 대나무통이 나온다. 대나무 속대를 쓰는 이유는 습기를 막고 잡냄새를 여과시키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란다. 고가의 차일수록 보관방법이 까다로운데 건조하고 냄새가 없는 장소로 직사광선이 쪼이지 않는 서늘한 곳이어야 한다. 속뚜껑을 열자 차를 싼 습자지 중앙에 파란 글씨로 瑞貢天朝라고 찍혀 있다. 이것은 청나라 광서(光緖 11대 황제 1894년) 20년에 황제의 하사품으로, 황실에서 차를 공물로 바친 차 씨 가문에 내린 편액에 쓰여 있던 글귀라고 한다. 이는 ‘조공 차의 고향’이라는 영예를 얻게 된 계기가 된다. 반면 쇄국정책을 단행하여 영국과 아편전쟁을 벌였던 도광황제의 슬픈 역사가 서려있는 차이기도 하다. 다른 통에 든 일조녹차는 중국 산동성 바다를 낀 일조지역에서 생산되는 녹차로 몇 년 전 녹차박람회도 열렸던 곳이다. 일조녹차는 이미 개봉한 국산 녹차가 아직 많기에 포장을 뜯지 않았다.


보이차는 격식대로 다기 일습을 갖춰 제대로 마시는 방식이 예법에 맞겠다. 허나 보통은 주전자에 물을 끓여 보이차 덩어리를 엄지 손가락 한마디만큼을 떼어서 다호에 넣고 끓는 물을 부어 잠시 기다렸다가 첫물은 따라 낸다. 이는 먼지 등 불순물을 걸러내고 소독하는 의미에서도 그러하지만 속 깊은 고삽미(쌉쌀하니 떫은맛)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처음의 떫은맛이 가시고 난 후에 입전체에 퍼지는 특이한 향과 단맛이 돌면서 침이 고이는 묘한 현상 때문에 인기를 끄는 보이차. 홍차보다 색이 짙고 맛은 은은하다. 중국 차의 역사는 서기 225년 제갈공명이 남방을 정벌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방에 원정 온 장병들은 물이 맞지 않아 풍토병이 생겼는데 현지인들이 차를 끓여 주자 복용 후 건강이 회복되었다. 이에 공명은 차나무를 많이 심도록 장려하여 오늘날 중국이 차 문화국이 될 기틀을 마련했다고. 물론 황톳물 출렁대는 탁한 황하가 그러하듯 중국의 수질이 안 좋은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이 즐기는 기름진 음식 역시 차생활을 일반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다.


나는 생래적으로 커피가 맞지 않아 전혀 안 마신다. 30대 초 어떤 모임의 어려운 자리에서 엉겁결에 커피를 마시고 밤을 꼬박 새운 적이 있은 다음부터 통 입에 대질 않는다. 수면장애와 상관관계가 없다는 보고도 있지만 희한하게 같은 카페인이 함유되어 있는 녹차는 괜찮다. 그러나 전형적인 소음인이므로 찬 성질의 녹차는 보리차, 둥굴레차, 결명자차, 영지차, 구기자차, 우엉차와 함께 내 체질에 도움이 되질 않는다. 해서 되도록 삼간다. 아는 시인은 차라리 열매를 볶아 사용하는 커피가 낫지, 새봄을 맞아 겨우 돋아나는 어리디 어린 새잎을 채취해 녹차를 만드는 게 마뜩지 않다고도 했다. 아무튼 내가 안 마시니 우리 집엔 커피가 없어 미국인 친구가 와도 보이차를 대접하곤 한다. 그들은 오히려 고풍스러운 다구를 사진으로 담으며 낯선 동양적 아취를 더 즐기는 눈치다.



아주 오래전 항주를 여행하며 용정차를 사 왔고 한창 세간의 인기를 모으던 철관음도 사봤으나 내 기호에는 평소 마시는 화개녹차에 미치지 못했다. 용정차는 녹차이고 철관음은 우롱차의 하나로 반 발효차다. 둘 다 살을 내리게 하므로 마른 사람에겐 적당하지 않은 차였다. 해서 요즘은 보이차와 대추차를 번갈아가며 끓여두고 냉장보관했다 마신다. 보이차는 발효차로 묵은 세월의 아취가 풍기는 향기와 은근히 감미롭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독특한 맛을 가지고 있다. 보이차는 성품이 온화하여 녹차처럼 차지 않으며 홍차처럼 진하지도 않다. 와인이 그러하듯 입안에 한 모금 물고 살짝 입안에서 돌려가며 음미한 후 목으로 흘러 보내면 깊은 향이 입안 가득 기분 좋게 감돌며 보이차의 참맛을 느끼게 해 준다. 보석 엠버를 닮은 등황색 투명한 빛깔은 음미할수록 눈이 행복하다.


그동안 마시는 물은 당연히 생수였고 별다른 생각 없이 생수를 계속 사다 마셨다. 시대 따라 크게 유행을 탄 정수기도 사용해 봤지만 100% 완전하지는 않을뿐더러 여기저기서 문제점이 불거졌다. 생명 자체인 물을 믿고 마실 수 없다 보니 그래도 생수만은 괜찮겠지 싶어 병물을 사 날랐다. 그렇게 아무런 의심 없이 깨끗한 음용수로 각인되어 애용했던 생수가 어느 날 불현듯 봉이김선달 작품으로 다가왔다. 20세기 최고의 마케팅 성공작이라는 생수가 아닌가. 봉이 김선달 뺨치는 물장사 숫법이다. 실제 시판 생수의 약 40%가 수돗물을 정화한 물이라는 데다 생수의 원가래야 2리터 당 1불에도 못 미친다는데 아차 싶었다. 정수한 수돗물에 미네랄을 첨부한 음료 정도가 생수이므로 차라리 수돗물에 차를 넣고 끓이면 생수보다 안전하다는 얘기가 옳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LA 수돗물은 적어도 정기적으로 품질검사를 받는다. 검사 항목은 총 45개에 이르며 미생물, 건강상 유해 영향 무기/유기 물질, 심미적 영향 물질 등 항목별로 세부적인 기준치가 세워져 있으며 매일 이 검사를 통과한 수돗물만 합격 판정을 받은 다음 수도관을 타게 된다. 이 수돗물에 보리차나 옥수수차를 넣고 끓이면 수은, 구리, 망간, 카드뮴, 크롬 등 중금속 성분이 차에 흡착돼 그 양이 현저히 감소된다고 한다. 이렇게 끓인 수돗물을 냉장고에 차게 식혀 보관하면 수돗물 내의 용존 산소량이 증가하고 세균 번식도 막는 역할을 한다고. 더구나 생수 물병인 페트병은 알다시피 석유에서 뽑아낸다. 이 페트물병이 직사광선에 노출되면 발암물질의 일종인 아세트알데히드, 포름알데히드나 프탈레이트 같은 환경호르몬이 녹아 나온다니 아예 독수로 변한다. 안심이 안 되기는 미세 플라스틱도 마찬가지다.



학교 갈 적마다 필히 유리 물통을 챙겨 간다. 그간은 생수였으나 요즘 들어 빛 고운 물을 담아가니 무슨 차냐고들 묻는다. 대추에 생강을 넣고 끓인 거야, 하면 남미계통 사람들은 자기네도 감기 기운이 있을 때 그렇게 끓여 레몬즙을 짜 넣고 마신다고 한다. 보이차의 경우는 그냥 홍차라고 얼렁뚱땅 대답한다. 더러는 향까지 맡아보곤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아마 맛을 보라고 한다면 입에 머금고는 어쩔 줄 몰라하며 이마를 찡그릴지도 모른다. 흠! 이제 나의 생수시대는 막을 내렸다. 대신 더운 철에는 시원하게, 추울 때는 따뜻한 물을 물병에 담아 가 수시로 다향 음미하며 아득한 이상향을 꿈꿔볼지니.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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