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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손

by 무량화

아침 신문에서 양복 입은 부시맨을 보았다. 콜라병 하나로 세계인을 폭소케 한 칼라하리 사막의 자연인. 그가 한국에 왔던 모양이다. 예의 그 순박하고 천진스런 웃음과 함께 대담 기사가 C일보에 실려있다.


단순한 몇 마디의 언어 사용. 하긴 마음과 마음이 통하면 묵언으로도 교류는 이루어지고 눈빛만으로 뜻은 전달되는 법이다. 현란하게 포장되고 미묘하게 꾸며진 말로 우린 얼마나 속고 속여왔던가. 순일한 그네들 삶이 정녕 부럽기만 하다.


먹을 것 따라서 부락은 수시 이동. 뿌리박은 생활이 아니니 무엇에도 걸림 없고 달리 욕심내 갖출 것 역시 없다. 맨발에 벌거숭이로 사는 그에게야 필요한 게 다만 건강한 사대육신뿐이다. 죽음은 늙으면 그저 죽는 것. 해가 떴다 지듯이 그렇게 스러지는 것. 종교나 신앙도 없다 했다. 빌고 원할 소망이 없는 동시에 아무런 근심 걱정 두려움도 없는 순백의 자아가 마냥 부럽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건 숫자감각이 거의 제로라는 점이다. 자신이 몇 살인지 조차 관심 안 가지는데 하물며 재산이야 따져 무엇하리. 어린 왕자의 말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숫자에 골몰하고 물신과 황금만능주의를 신봉하는 문명인. 삶은 도전 안에 있고 위기 안에 있다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숨 가삐 살아야 사는 듯싶은 현대인. 그에 비해 빈손이어도 전혀 불편치 않고 부끄럽지 않은 부시맨. 문명과 행복지수의 함수관계를 생각게 했다는 대담자의 끝마무리 말 그대로 과연 누가 더 잘 사는 삶일까. 왠지 나는 무위자연인, 그의 대자유가 한없이 부러워진다.


요즘 들어 부쩍 기승부리는 불만족감. 자꾸만 춥고 허기가 졌다. 그럴수록 점차 왜소해지는 느낌이다. 종내엔 아득한 점으로 의미 없이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에 초조해졌다. 장마철 소금통처럼 눅눅히 젖은 기분. 의기소침, 무력증, 병이었다. 처방도 까다로운 병이었다. 충족될 수 없는 소유욕 때문에, 늦출 수 없는 집착 때문에 어둠에 갇혀 버린 한갓 속물인 나를 건너다본다.


사람의 욕심이란 바닷물을 들이켬과 같다던가. 마실수록 더욱더 가중되는 갈증. 그래서인가. 자꾸 목이 마르다. 늘 목이 탄다. 분명 생활은 향상되 가고 안락해졌음에도 한결 심해진 갈증을 느낀다. 채워지고 또 채워져도 가셔지지 않는 기갈. 만족을 모르는 탐욕.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탐심. 좀 더 좋은 글로 주목받고자 하는 자기 현시욕. 좀 더 영광과 평안을 누리고 싶으며

... 바라고.. 원하고.. 끝없는 욕망. 끝 모를 욕구.


속물근성이 속속들이 밴 철저한 시정배인 나. 마음 투명한 양 말은 그럴 듯 맑게 하지만 철두철미 오욕락에 얽혀 사는 내가 아닌가. 주어진 복덕들에 만족하고 감사하기보다는 근사한 배경, 당당한 지위, 잘 꾸며진 거실 따위에 몰두하며 내심 선망 보내온 나였다.


상대적 개념인 중산층. 비교 대상에 따라 나는 더러 자족을 느낄 경우도 있고 심한 우울에 빠질 적도 있다. 낮게 자리매김해 둔 외형이나 물질이 때론 사람 참 치사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묘한 것. 다만 평가나 측정기준이어선 안 되겠지만 혼자 초연히 색즉시공 공즉시색 할 수야 없는 일.


가끔씩 이런저런 인연으로 또는 감상 자체가 좋아서 전시회를 찾곤 한다. 얼마 전에 본 도예전에서도, 전각전에서도 퍽 마음 끌어당기는 작품을 만났지만 섣불리 다가설 수가 없었다. 웬만한 그림도 호당 십만 원 이상. 작품 값 단위가 워낙 높아 내 수준으로는 엄두 낼 형편이 아니다. 그럴 때 슬그머니 가벼운 내 손에 화가 나고 속이 상한다.


그뿐 아니다. 우리나라 곳곳 가고 싶은데 맘 내키는 대로 아직은 다 못 가는 입장. 하물며 세계 각국 나들이야 걸림이 훨씬 많다. 제약하는 게 하나 둘 아니다. 시간, 위치, 생활여건 전반이 발목 묶는다. 좀 빠르고 늦음의 차이일 따름이지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자위로 얼버무리나 헌데 그게 언제랴싶어 시무룩해진다. 하다못해 괜찮은 소품 가구 앞에서 조차 이리 따지고 저리 재며 주춤대야 하는 자신이 참 못나 보이기도 한다. 무엇 하나 시원시원 선뜻 용단을 못 내림은 성격에 기인하는 점도 있겠지만 그만큼 구속받는 게 많음이다.


현실과 욕구가 타협하지 못할 때 한 발짝 뒤로 비켜서면서 나는 심한 무기력감을 느끼며 나 자신에 짜증이 난다. 나는 언제나 느긋해질 것인가. 안달복달하지 않고 여유만만해질 것인가. 높아야 한다는 이상은 바닥에 처박아 두고 눈만 저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기형의 내가 싫어진다.


어느 바닷가 가난한 노부부와 금고기 얘기가 떠오른다. 누려도 누려도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끝. 마침내 無로의 환원. 그 덧없는 갈구의 종점. 인간을 만들었다는 창조주의 실수인지 심술인지 탐욕제동기는 애초부터 없었던가. 적절한 욕망은 역사 발전의 밑거름이었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조율한 능력 결여로 늘 저 건너에 있는 행복. 모두가 허덕거리며 찾고 또 구하는 것. 마침내 기갈증에 지쳐 쓰러지면서도 종내 버리지 못하는 명예와 부귀와 권세, 그 한 줌의 꿈.


초월이나 해탈 이전의 본디 자유인 부시맨이 진정 부러울 따름이다. 91, 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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