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내미가 벚꽃 잎 휘날리는 계절에 잠시 다녀갔다. 한국을 떠난 지 사반세기 만이다. 김포공항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출국했는데 이번엔 인천공항을 통해서 입국했다. 영상으로만 본 인천공항과도 첫 상면을 한 셈으로, 입국심사 시 담당직원이 매우 놀라워하더라고. 그도 그럴 것이 24년 만의 방문객에게서 대학 갓 졸업한 스물 초반의 소저 얼굴을 유추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부모와 함께 떠난 이민이라 딸은 구태여 방한 필요성을 못 느끼고 지내왔다. 또한 미국땅에 정착하느라 그간 而立, 不惑의 시기를 분주하게 내달려 와 짬도 없었고. 그러다 삼 년째 서귀포살이를 하는 엄마가 깊이 매료돼 있는 섬생활이 궁금해 잠시 들렀던 것. 여름휴가 때나 여유시간 넉넉히 잡아서 다녀가라 했지만 우리 식구는 저마다 한고집 한다. 사전에 미리 꼼꼼하게 모든 일정을 짜가지고 왔기에 짧은 동안이지만 제주섬 여러 곳을 훑을 수 있었다.
아들이 동생 도착 전날에 와서 쉬고는 새벽같이 공항으로 딸내미를 픽업하러 갔다. 오랜만의 귀국인데 현수막은 내걸지 않더라도 백지에 축 환영! 글자 정도는 써가지고 가자고 했다. 도르르 말아쥔 종이는 펼칠 새도 없이 금세 딸내미와 마주쳤다. 비행기에서 밤새 잘 자고 왔다며 피곤한 기색은 전혀 아니 보였다. 우리는 제주시청 근처 아는 식당에서 뜨끈하고 얼큰한 해장국으로 요기부터 했다. 안전한 큰 차를 렌트해 운전을 도맡은 아들은 검은모래 해변인 삼양해수욕장에 들렀다가 함덕해변으로 달렸다.
비를 예보한 기상도와는 달리 그저 꾸므레한 날씨인 게 고마웠다. 제주의 사월은 고사리장마가 들어 거의 날마다 들쑥날쑥 비가 내렸는데 그나마 다행 아닌가. 첫날 코스는 동쪽으로 해안 따라 돌기로 했다. 딸내미가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으로 미리 찜해 둔 것 중에 해녀촌의 회국수. 함덕 지나 바닷가 그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간 지나치며 보아왔던 주차장 붐비던 바로 그 집이었다. 줄 서서 기다리다가 푸짐한 쟁반국수를 성게미역국 곁들여 맛나게 먹었다. 해장국 뚜가리 비운 지 두 시간도 안 지났는데 다들 잘 먹어 기분 흐뭇했다. 옛말에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내 논 물꼬에 물 들어가는 것만큼 보기 좋은 것이 없다’했듯이.
해안길을 달리며 내가 주문하는 대로 김녕 월정 바닷가를 들랑거렸다. 그러나 어쩌랴. 오묘한 옥빛 바다는 날씨 탓에 우울한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으니. 하긴 눈부신 태평양을 끼고 사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딸내미라 어느 바다인들 별 감흥이 있을라구.
문주란 철도 아니니 하도리 토끼섬도 그렇고.
재빨리 한약방 내음이 나는 비자림으로 방향을 돌렸다. 새천년목에서 연리목으로 연결된 비자림 한바퀴 산책 후 딸내미가 가고 싶다던 성산일출봉에 올라갔다. 정상에 섰어도 청자접시처럼 푸르른 굼부리는 우묵한 자취조차 희미했다. 해무 낀 데다 흐린 하늘이라 천지 구분이 안 돼서였다. 서귀포로 가는 도중 가시리 유채 벚꽃길을 들리려 했으나 서서히 밀려드는 어둠. 벚꽃 대신 센트럴 밸리 바다 같은 농장지대에는 자두꽃 복숭아꽃 사과꽃 살구꽃 배꽃, 그 무엇보다 끝 모르게 이어지는 아몬드꽃길이 펼쳐 보이는 장관과는 비교 불가인 가시리라 그냥 패스했다. 서귀포에 닿으니 한밤중, 그래도 관광지라 늦은 저녁은 먹을 수 있었다.
고단했던지라 푹 자고 늦으막이 일어나 아침은 식당에서 해결했다. 애들이 왔는데 밥 한끼 차려줄 생각을 안 하는 나이롱 엄마. 진짜 엄마 맞나? 처음부터 시간 낭비 같아 아예 주방에 들어갈 염도 내질 않았던 터다. 중문을 거쳐 송악산 휘돈 다음 산방굴사로 올라갔다. 전망 더없이 좋은 위치이나 용머리해안과 형제섬만 겨우 드러날 뿐인데 막상 용머리는 물때가 안 맞아
들어갈 수가 없었고. 아들이 오후 비행기로 부산에 가야 하므로 우리는 서귀포로 돌아오며 천백고지에 들러 잠시 걸었다. 그리곤 딸내미와 둘이서 쇠소깍이며 시내에 있는 정방폭포와 천지연폭포를 다녀왔다. 자연경관은 새파란 하늘이 배경으로 받쳐줄 때 더 돋보이는 법, 꾸물거리는 날씨라 그저 하얀 폭포 물줄기만 건너다보았다. 오후 늦게까지 선물용 갈옷 쇼핑을 하고는 횟집에 들렀다. 제주홍삼에 도다리회, 소라 숙회를 딸내미는 아주 달게 먹었다.
월요일,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비가 내렸다. 봄비라 빗줄기는 부드러웠다. 어쨌거나 딸내미 미션의 첫 번째 목록인 한라산 등반이라 우비와 스틱을 챙기는 등 행장을 꾸렸다. 어제 아들이 동생에게 갈 때까지 렌터카를 쓰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자 딸내미는 반납시키라며 택시를 이용하겠다 하였다. 젊은애라서 곧장 앱을 깔고는 카카오택시를 불렀다. 영실 초입까지 5만여 원의 택시비가 나왔다. 결제를 하더니 딸내미는 와우, 너무 저렴하다며 무척 신기해했다. 폰에 달러로 찍힌 지출 금액을 보고 나 역시 신기하기만 했다. 그 당시 환율이 올 들어 최고였던 때라서 달러 쓸 맛이 났다. 그러나 아들은 박사과정생 손자한테 매달 송금해 주느라 허리 휠 텐데....
비안개에 둘러싸인 채 영실을 오르는 동안 만난 산행인은 겨우 두서넛에 불과했다. 하산하는 그들은 다들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점점 빗발 거세졌다. 바람도 윙윙거렸다.울멍줄멍한 암벽 오백 나한도 병풍바위도 백골로 화한 주목과 구상나무도 전혀 챙겨 볼 여유가 없었다. 인적 드문 데다 음산한 날씨라 남벽분기점까지 돌려던 생각은 접기로 했다. 선작지왓 노루샘도 어느 결에 지나쳤는데 백록담 이마는 비구름에 깊숙이 숨어버렸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비를 피하며 김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찬 음식이 들어가서인지 오슬거렸다. 잠깐 히터를 가동시켜 공기를 덥히고 몸을 녹인 뒤 off를 눌렀다. 밖으로 나서자 허뚱거려질 만큼 비바람 심했다. 아무래도 경사 심한 영실 코스는 자신이 없었다. 완만한 어리목으로 방향을 잡았다. 4.7㎞라면 두 시간 정도 소요되겠다. 길이 평평해 걷기는 수월했다. 나무도 없는 허허벌판길을 걸어가는데 바람소리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안개비 자욱해 겨우 발밑 길만 드러났다. 부유하듯 움직이는 두 물체, 그래도 딸내미와 함께 걸으니 겁은 안 났다. 만세동산이며 사제비동산은 힐끗 볼 여유조차 없었기에 오직 빠르게 일로 직진. 고도 표지석 수치가 점점 낮아졌다.약간 경사진 산길이 나타나자 비탈 아래로 마른 계곡이 보였다. 어리목 계곡에 이르렀으니 거진 다 왔다. 부지런히 걷다 보면 곧 어승생 주차장이 나타날 터. 산 아래 닿으니 비도 수굿해졌다. 저만치서 차소리가 들렸다.
저녁 비행기로 제주를 떠나야 하므로 다음 날은 서쪽 해안을 돌아 공항으로 갈 예정이었다. 막 잠이 들려는데 딸이 내일 새벽에 해 뜨는 거 보러 성산 일출봉에 가자고 했다. 방금 일기예보를 확인해 본 결과, 다섯 시 58분에 일출맞이가 가능하다는 것. 네시로 알람을 맞춰놓았다. 알람소리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시차 때문인지 딸은 벌써 일어나 있었다. 옷을 따뜻하게 입고 깜깜오밤중에 집을 나섰다. 이미 카카오택시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휑하니 빈 도로를 질주해 다섯 시 30분 성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택시기사가 식사하며 기다리겠다기에 왕복 12만 원에 타고 가기로 했다. 예상보다 일출을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았고 꾸역꾸역 돌계단을 올라들 갔다. 우리도 허위단심 산정으로 향했다. 55분에 딸내미와 나는 정상 층계에 나란히 앉아 일출을 기다렸다. 구름 한점 없이 밋밋한 동녘 바다에 불그스럼 홍조가 일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카메라를 눌러댔다.
광휘로운 일출 장면이라기 보다 태양은 싱겁게 슬몃 떠올랐고 누리는 환해졌다. 고사리 장마 철에 그래도 이게 웬 특혜인가 싶어 합장 배례 올렸다.
원하던 한라산 영실에서 어리목 코스를 우중 트래킹했고 비자림이며 산방굴사도 다녀왔다. 성산일출봉은 두 번이나 올랐다.
딸 견해로는 영실도 좋지만 성산의 기운이 특히 뛰어 나니 기회 닿는 대로 자주 찾으라고 하였다. 절해고도 섬이라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는 음기가 강해 여성들이 득세하고 생활 전반을 주도한다는 말이 있다. 거대한 여신 설문대할망 설화가 이를 입증한다. 해서 남성성을 상징하는 돌하르방을 도처에 세워 강한 음 에너지를 눌러 음양의 조화를 맞추려 했다는 썰도 일리가 있다. 그처럼 음이 성한 지역적 특성에 균형을 맞추려면 양의 기운은 필수.
양의 에너지가 주는 밝고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고 싶어서일까. 성산이 지닌 기운이 왕성한 양기라 하니 힌번씩 좋은 기운을 받으러 올라야 하고말고. 내가 매달 한두 번은 성산일출봉을 찾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