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녀들의 순결-산타 아네스 미션

캘리포니아 미션

by 무량화

Mission Santa Ines에 닿고 보니 마침 이날은 과달루페 성모 축일.


오래전 멕시코 땅이었고, 지금도 멕시컨들은 자기네 땅이라 여기는 캘리포니아인지라 성당에 가면 과달루페 성모 신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내겐 여전히 낯설고 좀 서먹하면서도 어색하다.


갈색 피부의 과달루페 성모상 앞에는 그들 스타일대로 원색 꽃 장식을 무더기 무더기 잔뜩 봉헌해 놓았다.


우리네 토속신앙 당집 앞처럼 울긋불긋 촌스럽고도 요란한 색종이 장식이 몇 줄, 미션 전관에 내걸려 바람 따라 흔들거렸다.


종각 입구를 깔끔하게 사진으로 담아내기는 글렀다.


대신 미션 들머리에 줄지어 선 후추나무와 미션 건너편 완만한 구릉으로 이루어진 드넓은 전원의 평화로운 풍경을 담기로 한다.


때마침 뎅~뎅 종소리 울려 퍼지니 그 파문에 가슴이 아늑해졌다.


종소리를 따라 후원으로 들어서자, 앞마당에서보다 한결 또렷이 들리는 청량한 음향.


동시에 종각에 달린 세 개의 종이 시선을 끌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두서없이 미션 뒤란을 돌아 널따란 Cemetery에서 만난 종각은 여태껏 보아온 여타 미션의 고압적인 종각과는 달리 전아한 기품이 서려있었다.


이끼 낀 묘비석과 높직한 십자가 사이로 바라보는 종루 전경이 더할 나위 없이 고즈넉한 것이, 아네스 성녀를 기린 미션다웠다.

미션 후원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좌우대칭형 조경수들이 가지런히 가꿔져 있었다.


정갈하면서도 아주 단정하고 기품 있는 녹빛 정원이다.


눗누런 이파리들을 발치에 떨군 등나무 시렁에는 콩을 닮은 굵다란 등 열매가 주렁주렁 늘어져 있었다.


미래의 등꽃 정령들이 깃들어 있는 열매는 저마다 아기를 품은 여인처럼 배가 봉긋봉긋했다.


순결의 이네스를 통해 생명의 신비와 목숨의 존엄함을 선포하려 산타 이네스 미션은 거기 서있었던가.


놀이 삼은 단순한 미션 투어를 넘어 묵직한 주제의 상념들이 교차되던 산타 이네스 미션.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땅에 오시어 인류의 구원자 되시매....




왕의 길을 따라 세워진 스물한 개의 캘리포니아 미션 중 열아홉 번째로 1804년에 건립된 산타 이네스 미션이다.


캘리포니아 역사유적지 305호로 지정된 장소다.


1812년 대지진이 발생해 흙벽돌로 지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린 이후 재건축과 복원작업으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기프트숍을 통해 들어서면 칸칸으로 나누어진 박물관 전시실이 이어진다.


첫 전시관은 원주민의 사냥도구며 돌확 등 원시적인 생활상들을 담았다.


다음은 선교사들이 철을 제련해 만든 농기구들과 각종 연모를 모은 곳이 나온다.


이어진 방은 스페인에서 가져온 제구 일습과 사제 예복, 성가 책이 풍금과 함께 전시된 공간이다.


당시 사용했던 커다란 종과 가구며 악기, 주방용품도 모아놓았고 수도사들의 간결 소박한 방도 재현해 놨다.


어느 곳이나 바닥이란 바닥은 모두 이채롭게도 유약을 입혀 구운 정사각형의 반들거리는 전돌을 깔았다.


자연에서 채취한 물감을 써서 아라베스크 문양으로 사방 돌아가며 단청을 한 성전은 규모가 작고 조붓하니 아담스럽다.


건물 이층에는 수사들의 방이 줄지어 있고 앞뒤 회랑이 딸린 본관 외의 별채에 둘러싸인 후원은 성전 문을 열자마자 나타나는 구조다.

가톨릭 교우가 아니라도 혹시 들어는 봤을 과달루페 성모님.


세계 3대 성모 발현지는 멕시코의 과달루페, 프랑스의 루르드, 포르투갈의 파티마 중 멕시코에서 가장 먼저 발현하였다.


1531년 12월, 멕시코 원주민 후안 디에고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은 그후 남아메리카 인디언들 거의를 그리스도 교인으개종케 하였다.


디에고의 틸마(망토)에 새겨진 성모님 모습은 멕시코 인디오들만이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해독할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가 겨져 있었으니...


허리에 둘러진 진보랏빛 리본 형태의 복대는 토착민들이 전통적으로 임신한 여인임을 나타내는 표식이었으므로.


백인이 아닌 갈색 피부의 성모님에 두 손을 겸손히 모아 합장한 자세는 유럽 풍습으로는 생경하기만 한 것이었으니 나투신 곳에 따라 맞갖게 현현하신 비의(秘儀).


성모 발현은 그리하여 수많은 태아들의 생명을 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황금을 탐냈던 스페인 정복자들이 대륙에 들어와 무자비한 약탈과 착취를 일삼던 당시.


병사들은 원주민 여인들을 겁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그렇게 임신을 하게 된 여인들은 수치심으로 자살하거나 약을 먹고 낙태하기 일쑤였다.


그즈음 과달루페 성모님의 발현으로 그같이 딱한 사정에 처한 여인들에게 죄책감 대신 모성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었다.


생명의 귀중함을 깨우쳐서 복중의 아기를 보호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과달루페 성모님, 이후 태아와 자녀들의 수호성인이자 멕시코의 수호자로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인지 멕시코 가정마다 과달루페 성모상을 모시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로 전 멕시코인의 수호천사가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기적이 인정된 것이 아니라 2세기가 흐른 18세기에 공식적으로 조사를 마친 다음 승인이 이루어졌다.


과달루페 성모발현으로 현재 남미권은 대부분이 가톨릭 국가로 정착됐는데 따지고 보면 아이러니다.


정복자였던 침략국 스페인의 국교가 토착신앙을 밀어내고 전국민의 종교로 깊이 뿌리내렸으니 오묘한 신의 뜻일까.




태아와 자녀들의 수호천사로 생명의 어머니라 추앙받는 과달루페 성모상에 겹쳐지는 얘기가 얼핏 떠오른다.


2차 대전이 한창일 때 루마니아에 있는 한 수녀원이 독일 군대에 접수되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흰 꽃잎 같은 젊은 수녀가 윤간을 당한 뒤 임신을 했다.


독일 병사들에게 무참히 능욕을 당한 결과였다.


종전이 되며 전화가 걷힌 뒤 평화를 되찾은 수녀원.


그러나 하느님께 바친 순결서원을 강압에 의해 잃고 만 수녀는 낙태를 선택하는 대신 자진해서 수녀원을 떠나기로 하였다.


비록 용납하기 어려운 불의하고 불경스러운 씨앗이나 자신에게 맡겨진 생명을 지키기로 한 결단은, 위대한 모성의 발로 그 이전의 보다 본질적인 것.


그러자 원장수녀는 회중들과 긴 회의를 거치고 오랜 기도 끝에 그녀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기로 한다.


저주스러운 악의 결과일지라도 모든 생명은 고귀한 하느님의 선물, 그러니 우리 모두의 아기로 받아들여 기르겠다고.


그 후 루마니아 작은 수녀원에선 해맑은 소년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영화 25시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는 순간이 아닌가.




통상 아녜스 또는 아그네스라 불리는 성녀의 스페인식 이름인 Santa Ines는 순결, 양, 신성함을 뜻한다.


성 이네스는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평소 성스러운 생활을 희구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뛰어난 미모를 지녔던 이네스에게는 구혼자가 줄을 섰는데 그중 하나가 청혼을 거절한 데 대해 앙심을 품고 그리스도 신자라 고발을 하고 말았다.


총독 앞에 끌려가서도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자 그녀를 매음굴로 보냈지만 끝까지 동정을 지키다 열세 살 나이에 순교하였다.


그 시대에는 열다섯이면 벌써 결혼 적령기라 하나 아직은 새순같이 여리디 여린 싹이건만.


성녀는 어린양을 데리고 있거나 팔에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약혼한 남녀 및 처녀와 정원사의 수호 성녀이기도 하다.




성녀 이네스, 아네스는 세속에 때 묻지 않은 깨끗한 영혼, 절대 순결한 백옥 같은 정신의 표본이다.


그런 이네스의 이름을 단 희곡이 쓰여졌는데, 신의 아그네스(Agnes of God, 존 필미어 작)라는 연극을 본 것은 90년대 초다.


배경이나 소품 하나 없는 네모난 방에 나무의자 두 개가 놓여있다.


갓 낳은 아기를 탯줄로 목 졸라 쓰레기통에 버린 사건이 수녀원에서 발생하였다.


영아 살해 혐의를 받고 있는 아그네스는 학교교육을 받은 바도 없는 데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티 없이 순수한 스물한 살짜리 예비 수녀다.


아그네스의 정신감정을 하는 정신과 여의사인 리빙스턴은 냉소적인 무신론자이다.


한편 신앙심 깊은 원장 수녀는 아그네스가 순수의 표상 그 자체로 너무나 희디희어서 현실에 발붙일 수 없는 존재같이 여긴다.


결국 리빙스턴이 최면을 걸고 아그네스는 진실을 토해낸다.




비밀통로로 침입한 아지 못하는 한 남자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한 그녀는 신이 자신에게 아기를 주신 건 실수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아기를 키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므로 아기의 숨을 멈추게 해 다시 신에게 돌려주려고 한 것일 뿐이다.


살인이 끔찍하게 무서운 죄란 것조차 의식지 못한 행동이었다.


극 중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탁월하였던 신의 아그네스는 당시 연극배우 윤석화와 박정자, 손숙의 빼어난 연기로 격찬을 받았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건조한 무대를 배경으로 세 사람의 등장인물은 팽팽한 삼각 구도를 이루며 흡인력 있게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때 무척이나 강렬하게 각인된 아그네스란 이름, 신성한 이미지 이네스를 폭력으로 능욕하고 아프게 하는 자는 현대에도 수없이 많다.


지나친 피해의식이 아니라 실제로 여성이기에 받는 유형무형의 상처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다.


전쟁이 터지면 약자인 어린이와 여인들이 가정 참담한 피해자가 된다.


내전으로 피폐해진 아프리카 땅이나 동유럽 등지 난민들의 행렬을 통해 익히 보아 온 대로.


현재도 후진국가 여러 나라에서, 아직 한국에서도, 여성이란 이름 앞에 수시로 장난치듯 주홍 글씨를 새기고 싶어들 한다.


여린 꽃잎을 짓밟는 무자비한 성폭력으로 그것도 아주 깊디깊게. 2018


주소 : Old Mission Santa Ines .1760 Mission Drive .Solvang, CA 93463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