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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와 세조 그리고 금성대군
by
무량화
Sep 1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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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풍광 뛰어난 곳마다 어딜 가나 사찰이 자리 잡고 있다.
산이 높아 골짜기 그윽하거나 기암괴석 멋진 해변가 절경지에도 어김없이 절 하나 앉아있게 마련이다.
앞으로 죽계천 너르게 흐르고 소백산 자락에 싸 안긴 경북 영주 소수서원 터는 원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입구 학자송 솔숲에는 절터임을 증거 하듯 위엄찬 당간지주 한 쌍이 높다라니 서있다.
당간지주란 절에서 행사를 열거나 각종 의식을 펼칠 때 당이라는 깃발을 내걸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돌기둥을 이른다.
서원 마당에 널려 있는 유물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부터 있었던 숙수사라는데 대관절 언제, 무슨 일로 폐사되었을까?
소수서원은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1542년(중종 36) 이곳 출신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제사 지내기 위해 사묘(祠廟)를 지은 다음, 1543년 유생 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데서 비롯됐다.
몇 년 후인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李滉)은 조정에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賜額)과 국가 지원을 요청, 이에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액이 최초로 내려졌다.
이에 명종(明宗)은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성리대전(性理大全) 등 서적을 하사했다.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은 편액을 내려준 사액서원은 사학(私學) 기관이지만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 등이 주어지는 데다 세금, 병역까지 면제해 주는 특혜를 받게 된다.
헌데 청백리로 뽑힐 만큼 인품 깨끗한 사림이자 청렴한 선비였던 주세붕은 왜 하필 안향을 기리는 사당을 지었을까?
물론 안향은 고려에 주자학을 도입해 널리 펼친 성리학자로 조선시대 유학자 모두의 대스승이었지만 특별히 그를 기린 데는
이면의 남다른 사유가 있었다.
풍기란 고을은 예전에는 흥성한 순흥부로 통괄되던 지역으로 순흥 안 씨(順興 安氏) 본관지이자 단종애사와 연계된 피바람이 몰아치며 비극의 장소가 되었던 곳이다.
금성대군(錦城大君), 이름은 유(瑜)로 세종의 여섯 번째 아들인 의로운 그는 왕위를 찬탈한 친형에 맞서 유일하게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세조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된다.
처음부터 그는 조카를 내치고 왕이 된 수양대군에게 반발하다가 삭녕에 유배되었고 거기서 다시 경기도 광주로 이배 되었다.
1456년(세조 2)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하며 이에 연루되어 금성대군은 순흥 땅에 위리안치된다.
조선시대 중죄인을 벌하는 형 가운데 가장 중한 형태인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죄인이 거주하는 집 울타리에 탱자나무를 둘러쳐 일체의 바깥출입을 막는 형벌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히고 그곳에서 금성대군은 비밀리에 순흥부사 이보흠과 결탁해 재차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기천 현감의 고변으로 탄로가 나며
세조 3년 모반 혐의로 사사되었다.
이 정변지축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은 죽임을 당하고 역모 혐의에 얽혀 들어 순흥 주민 5백여 명이 마구잡이 처단되며 그 피계류를 타고 이십 리나 흘렀다 하니 그 참상 미루어 짐작이 간다.
결국 순흥 인근 30리 둘레 안에는 사람 그림자가 끊길 정도가 되며 순흥은 반역의 땅으로 낙인찍혀 완전 폐허가 되었다.
죽계천이 낙동강으로 흘러가다 잠시 물길 머문 곳에 지은 숙수사(宿水寺)도 그때 결딴나고 말았지 싶다.
규모 번듯한 지방 도시 순흥도호부는 폐부가 되면서 단양, 봉화, 예천, 풍기, 안동 등으로 갈가리 쪼개졌으며 순흥은 풍기군의 일개 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로부터 200년도 훨씬 지난 숙종 9년 순흥 부는 복원이 되고 충절을 지키려다 순절한 사람들을 기리는 제단도 그때 꾸며졌다.
소수서원에서 걸어 십 분쯤의 거리 맞은편에 위치한 금성대군 신단(錦城大君神壇)이라는 금성단이 바로 그곳이다.
정축지변이 발발한 지 80여 년이 지나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먼저 민초들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여 산삼 공납으로 힘들어하던 지역민들의 고초를 덜어주고자 산삼씨를 채취, 인공재배에 성공하여 풍기를 오늘날 인삼 산지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보다는 그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던 순흥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자, 이 고을 출신 대학자이자 순흥 안 씨인 안향
사당을 배향한 일이야말로 소수서원 건립 못잖은 주세붕의 업적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야사 한 토막, 백운동서원에 유생이 모여들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유생 몇이 도저히 무서워서 견디기 어렵다며 떠날 뜻을 밝혔다.
이에 주세붕이 까닭을 묻자 서원 앞을 흐르는 죽계천에서 밤마다 애끓는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오래전에 일어난 정축지변의 변고를 들어 아는지라 그는 천변 큰 바위에 공경할 경(敬) 자를 굵게 새겨 붉게 칠하고 원통하게 참변을 당한 넋들을 위로하는 제를 지내자 원혼들이 한을 풀어서인지 이후 귀곡성이 사라졌다고 한다. (현존하는 敬 자 바위)
이바구가 그럴싸해서인가, 밤새 내린 가을비 탓인가, 일부 흙탕물 져 흐르는 죽계천 물살이 오싹한 데다 안개비에 젖은 소수서원이 어쩐지 으스스해 보였다.
분위기 있게 바람따라 낙엽이라도 소복소복 내려 쌓였다면 기분 훨씬 괜찮았을까?
밤새 추적 댄 비로 낙숫물 소리 하염없던 날씨 때문이겠지만 그리도 고즈넉스럽던 소수서원 이미지는 이후 눅눅하고 어둑신하게 남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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