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 처처에 품어 안은 절경과 비경이 무릇 기하던가. 그 수 새삼 헤아려 무엇하리. 갈피마다 수려하고 명미한 풍광으로 경탄케 하는 이 산하.금수강산 뜻 그대로 역시 뛰어난 명작이요 명품인 것을.이 또한 우물 안 개구리의 호들갑일까.
진도는 초행길이었다. 당초 기대했던 대로 과연 보배 섬은 조화무궁한 천혜의 자원,
다양한 민속, 명승 경관이 어우러져 명실공히 보배답다.변화무쌍한 높푸른 산세를 시샘함인가, 징검다리 놓듯 정겹게 띄운 초록빛 섬 섬들.비옥한 땅 진도는 진도대로, 청청해역 다도해는 다도해대로 여간 매혹적인 게 아니다. 비록 짧은 일정, 주마간산 격의 여로였지만
문학세미나 주최 측의 성의 있는 안내와 세심한 배려로 진도의 진미를 포식한 셈이다.
놀랍기는 진도 들머리에서부터다.아우성치는 듯한 울돌목의 조류.반궁형 대교 아래 시퍼런 물살이 도도하다. 마치 큰 홍수진 나루터 같다. 분노처럼 함성처럼 무서운 기세로 휘굽어 감도는 급류. 거센 소용돌이로 굽이쳐 뒤트는 격랑이다. 지심 한껏 달아올라 들끓는 용암이다. 강인한 흡인력으로 마구 빨아 당길 듯 차라리 섬뜩한 해협. 그곳이 바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은 명량 대첩지다.
정유재란 시 충무공께서 여남은 척의 배를 이끌고 왜선 백수십 척과 맞서 대전과를 세운, 그리하여 칠 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량해전. 지형지물과 조수간만을 십분 활용하여 미미한 병력으로 마침내적장 마다시의 목을 베고 왜군을 섬멸시킬 수 있었던 것.당시 장군을 도와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하많은 진도인의 넋이 지금도 푸르게 푸르게 이어지는가, 감벽의 바다가 아득하다.
섬이 항용 그러하지만 진도에도 숱한 유배 문화의 자취와 함께특히 천연 요새로서의 전적지가 무수하다.대몽 항전 결의한 삼별초 군이 진을 쳤던 남도석성, 이충무공 전첩비가 선 벽파진,임진왜란의 격전지인 녹진 울돌목 등 진도의 역사는 수난의 민족사와 궤를 같이 한다. 호국충절의 기상 서린 항쟁의 터답게 곳곳에 남아 있는 鎭과 城. 그래서일까, 천연기념물인 진돗개조차 의리와 투지력이 남다르고 충성심 강한 명견으로 소문나 있다.
독일 견인 셰퍼드가 독일인의 특성을 닮듯 진돗개는 진도인의 생리를 닮을 수밖에 없음이리라.
그 외에도 진도에는 살펴볼 거리가 너무 많다.남종 문인화의 태두인 소치 허유 선생의 운림산방, 민속 쪽의 초분이며 용왕제 등등.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진도 다시래기와 씻김굿은 녹화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안타까웠다.뿐 아니라 서편제의 백미는 굽이굽이 남도 풍정에 얼려돌아가는 한 맺힌 진도 아리랑이 아니던가.진도인 고유의 감칠맛 나는 사투리에다세미나 전날 긴 가뭄 끝에 단비 흡족히 내려서인지 인심조차 융숭했다.
밤.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회동 해변에서의 강강수월래는 그날 행사의 절정이 아니었나 싶다.달집 타오르듯 광휘롭게 치솟던 불길, 소담스러운 모닥불의 향연은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 칠흑의 밤바다를 밝히는 모닥불 에워싼 채 일행 모두가 손 맞잡고 즐긴 강강술래는 달을 닮은 원무다. 목청 좋은 선창자의 노래에 따라 다 함께 소리 합해 강강술래 후렴으로 받으며
좌우로 돌거나 가운데로 모였다가 다시 뒤로 물러나며 돌고 도는 춤.그것은 넘실대는 파도 같았다. 출렁거리는 물결 같았다.
역동하는 힘이 연출해 내는 아름다움 속에 신명 지핀 표정마다에 어리던 흥겨움.
모두가 혼연일체 되어 하나로 연결된 둥근 고리가 된 순간이었다.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자꾸 거듭하다 보면 왠지 최면 상태가 되는 기분이다.
그 효과 때문인가. 혹자는 疆羌水越來라 설명하기도 한다.힘센 오랑캐가 물 건너 오니 유비무환, 외침에 대비하자는 설.
하긴 삼국시대부터 조선말까지 931번의 전쟁을 겪은 우리로서는 당연한 유추다.
반면 嘉興 嘉興 壽運來도 그럴듯하다. 고려 초 진도에 가흥 현이 있었는데그 지명에 실은 덕담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하긴 무엇인들 어떠랴. 강강술래는 뜻이 없는 음 그대로라도 독특한 정감이 해 오는데.
그 옛날 망금산에서 진도 여인들이 펼쳤을 강강술래를 떠올려 본다.그때는 이순신 장군이 적군에게 우리 편 군사가 많은 양 위장해 보이고자 한 의병 전술의 하나였다.
물론 강강술래는 그 이전에도 있어 왔던 전래의 민속놀이다.주로 한가위나 대보름 등 달밤에 아녀자들이 마을 공터에 모여 삶의 시름을 토하듯사설 엮다가 종래는 제 흥에 겨워 돌고 돌며 즐긴 춤이라 전해진다.
허나 달밤 아니어도 괜찮고 나부끼는 댕기나 옷고름 없어도 한데 얼려 돌다가 보면
양 어깨에 오르는 신바람. 고래로 오동 씨만 보아도 춤춘다는 우리 민족이었다.진양조로 천천히 시작해 자진모리로 차츰 빨라지며 힘이 오르는 가락.격렬하게 휘어드는 춤, 숨 가쁜 원무에 절로 흥이 솟구칠 법하다.
광란하듯 요상이 뒤트는 국적불명의 민망스러운 춤판이야 어찌 여기 견줄까.
달무리가 비잉 빙 돈다.
가아응 가아응 수우워얼래애
뛰자 뛰자 뛰어나 보자
강강술래.
이동주 님의 시 그대로 완만한 가락에서 격정적으로 몰아가는 이 호흡.강강술래는 여기에 멋이 깃든 것은 아닐까. 그 밤, 하늘 가득 드리운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달이 보였으나 왠지 달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는다.
만월이었던가 반달이었던가. 아마도 모닥불에 강강술래에 나 그만 함빡 취했던 모양이다.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