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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굴손으로 그리움 감고

by 무량화

'내 님믈 그리사와 우니다니

산 접동새 난 이슷하오이다..'

고려 가요 정과정 곡이다. 8백여 년 전 고려 의종 때의 문신이며 호는 과정, 본관은 동래인 정서 공은 의종의 이모부였다. 당쟁에 밀려 유배 생활을 하던 중에 그는 임금께 대한 그리움을 읊은 정과정 곡을 남긴다. 충신이 임금을 사모하는 애틋한 정을 노래한 정과정의 산실을 찾은 늦가을 오후, 추위마저 느껴질 정도로 바람이 스산하다. 수척해지는 산 빛, 무더기 진 억새꽃이 황량스레 나부낀다.


부산 남구 망미동 산 4의 7 일대. 우리 집에서 건너다 보이는 수영강 지류의 낮은 야산 지대가 바로 그곳이다. 망미 주공아파트가 들어서며 택지 조성으로 지금은 산이 제 모습을 잃었으나 한때는 제법 솔 숲이 우거져 등산로까지 나 있던 산이었다. 도시고속도로가 산을 관통하며 그나마 허리가 잘려나가 이제는 산이라기보다 한갓 둔덕으로 남겨진 곳. 구역도 망미동과 연산동의 경계인 까닭에 관할이 애매모호하다. 그런만치 시비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곳도 현재로는 없는 상황인 듯하다. 수영천이 정비되고 이 근처가 공원화되어 유서 깊은 이곳이 문화 유적지로 잘 가꾸어지기를 바랄 따름이다.


잡초 덤불진 숲을 조금 오르자 화강암 시비가 마중한다. 동래 지역의 향토사 연구 모임인 토향회에 의해 건립된 시비다. 부산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고전 문학비로 조형 감각이 돋보이는 시비, 무성한 풀숲에 홀로 오연하다. 전면에 정과정 곡이 한글 고서체로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비를 세우며’란 비음기가 새겨져 있다.


‘적소의 모래톱에 오이밭 일군 뜻은 덩굴손으로 그리움 감고 황색 꽃잎으로 수심을 가리고자 함인가’ 란 구절도 보인다. 그러나 오이밭은커녕 시비가 서 있기 무색할 정도로 전혀 정화가 안되고 지저분한 주변. 발아래로 수영천이 흐르던 지난날과는 달리 지금은 매립지 흙먼지만 분분한 자리에 허름한 공장들과 가축 사육장들이 무질서하다. 그렇듯 관리가 소홀하다 못해 방치돼 있는 인상이나 현재 구획 정리가 진행 중이라니 깔끔한 청사진을 기대해 본다.


바로 곁을 지나는 도시 고속도로가 연신 소음을 뱉어 내지만 암석과 숲이 어우러져 그런대로 운치를 돋우는 시비가 선 여기는 속칭 용머리 곶, 즉 용두곶으로 정서의 망배지였던 자리며 동민들이 부락제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가. 몇 백 년 묵은 언덕 위 팽나무 고목 한 그루가 단풍 물들며 당산나무처럼 시비를 굽어 지키고 섰다. 그 옛날 정서가 ‘넋이라도 님이 계시는 곳에 가고 싶습니다’ 읊조리며 망배 하던 자리에 선 감회가 애연할 따름이다.


또 한 군데 찾아본 곳은 원동교 옆 수영강 서쪽 제방을 끼고 선 비탈진 아카시아 숲이다. 레미콘 공장의 한구석이라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눈에 띄기 힘든 위치다. 거기에 부산교대초등학교 어린이 회에서 자연석을 다듬어 ‘정과정 옛 터’ 란 표석을 만들어 세웠다. 고증에 의하면 이 장소가 정확한 과정지이다. 개성에서 안치, 유배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삼각주 모래톱 바로 건너편이다. 북쪽 오륜대에서 발원하는 사천과 서쪽 금정산에서 시작된 세병천과 황령산에서 흐르는 무명천이 합류되는 지점의 그 삼각주 모래톱이다. 인근에 경암이란 바위가 있어 자기 모습을 비추며 일일 三省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개골산에 들어가기 전 명경대에 자신을 비춰보던 마의 태자 심경이 새삼 헤아려진다.


한 작품을 폭넓게 이해하자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나 배경, 곧 전기적 의미를 파악해야 그 뜻과 이미지 해석이 훨씬 용이하다. ‘ 내 님을 그리워 우는 모습은 산 접동새와 비슷하오이다’라는 첫 구절 만으로는 언뜻 연시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 작품은 널리 알려진 바대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戀主之辭이다. 송강의 ‘ 사미인곡’이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 그러하듯 ‘임’이란 의미는 연인이지만 실제는 군주를 나타낸다. 정서 역시 북망 요배하고 임금을 사모하며 애틋한 정을 담아 정과정을 읊었으리라.


아득한 일월 거슬러 고려조. 17대 인종의 비 공예 대후의 제부로 내시랑중의 벼슬에 있으면서 왕의 신임을 받던 정서. 그는 의종 5년 권신들의 정쟁에 휘말려 동래 수영강 부근 한적한 강촌에 유배된다. 환관들의 세력과 왕의 처가인 임 씨 세력 사이에서 알력의 제물이 된 것이다. 의종의 차남을 옹립하려 모반을 꾀한다는 참소로 억울한 귀양살이를 하게 된 정서. 고향인 동래로 유배를 떠날 때 머지않아 다시 부르리라 한 왕의 위로를 믿고 적소에서 부르심만을 기다린다. 만 천하 사람들이 다 의심한다 해도 오직 임금만은 자신의 깨끗함을 알아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귀양처에서 기쁜 소식 오기만을 고대한다. 매일 같이 개성으로부터의 소명을 기다리며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그 세월이 어언 스무 해. 이후 정중부의 난으로 의종이 축출되고 명종이 즉위하자 비로소 다시 기용됐다.


그간의 나날. 정서는 오이밭 일구고 정자 세워 과정이라 이름 짓고 그 정자에 올라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를 부른다. 긴 밤을 두견이처럼 눈물로 지새우며 임금께서 부르기를 애타게 기다리나 끝내 소식이 없자 연군의 정을 가요로 읊었던 것이다. 이를 악학궤범에서는 삼진작이라 했고 후세 사람들이 정과정 곡이라 불렀다. 정서가 멀리 개성을 바라보며 정과정을 노래했음직한 이 자리. 드높이 마주한 장산이 선비의 기개를 푸르게 북돋울 듯 올연하다. 언덕 위 큼직한 바위에 올라 바다를 향하면 울적한 심사가 다소 풀렸을 듯도 싶다. 아니, 기다림과 한의 시학인 정과정 곡을 읊조리며 통한을 삭혔을까.


정과정이 태어난 까닭에 지금의 수영강은 당시 과정천이라 불렸고 동래에서 토곡을 거쳐 수영으로 통하는 길목은 과정로라 칭하게 된 것이다. 시비가 서있는 망미동 역시 ‘望美’란 미인을 망배 한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 즉 정서가 아침저녁 임금이 계신 북녘을 향해 망배했던 데라 하여 망미동일 터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이름의 유래를 더듬어 나가면 이렇듯 국문학의 큰 봉우리와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흐뭇하지 않을 수 없다.


후세 사람들은 시인과 시에 대한 사랑을 돌에 새기고 오래도록 잊지 않고자 거리며 강에 그 이름을 얹는다. 그리하여 박제된 역사 속에서가 아닌 범상한 일상 중에서 우리와 친밀히 만나는 것이다. 시구마다 충신의 단심과 한이 스며있는 정과정 곡. 시인은 가도 그의 시와 노래는 우리의 가슴에 남아 영원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1993>





세월의 무상함이여.

변해도 어찌 이토록 변할 수가....

오이밭은커녕 강줄기도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도심 속 자그마한 섬으로 남은 정과정 자리에 서니 회포만 애연타.

빙 둘러 치솟은 고층 아파트 숲에 싸여,
옛 풍치는 고사하고 삼십 년 전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망미동에 살면서 몇 번 와본 장소이건만 물어물어 겨우 찾아낸 정과정 유적지.

이런 위치에 숨바꼭질하듯 숨은 문화유산을 대관절 누가 무슨 재주로 와볼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말끔한 데크에 정자 우뚝 단장시켜 놓은들 미로 헤매듯 길 찾기 어려워서야...

국문학의 봉우리건 특별한 역사현장이건, 개발에 걸림돌 되면 가차 없이 밀어붙이는 이 만용.

한구석 궁벽진 자리에 밀려 겨우 명맥 이어가는 정과정 유적지를 마주하니 아연할 따름이다.

접동새 진작에 사라지고도 남을, 저 어지러운 소음과 고층건물에 사방이 막혀버린 딱한 지경이 말을 잊게 한다.

경암 옆 낭떠러지에 희끄무레 피어난 구절초 꽃이 그나마 깊은 탄식을 다독거리며 위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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