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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동 고분군에서 보름달 마중

by 무량화

부산으로 이사와 망미동에 자리 잡고 한자리에서 십수 년을 살았다.

이 한 대목만으로도 요령부득에 늘 푼수 없는 사람, 즉 이재에 밝지 못한 맹꽁이 기질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튼, 당시 갓 중학에 입학한 아들과 초등 일 학년 짜리 딸을 데리고 심심하면 올라갔던 뒷동산이 배산이다.

산죽 서걱대고 소나무 우거진 숲길 걸어서 산꼭대기에 서면 남쪽 저만치에 광안리 바다가 너르게 펼쳐졌고 동백섬과 해운대도 한눈에 드러났다.

뒤돌아 북쪽을 보면 금정산 웅장한 산줄기가 이어졌으며 눈 아래로 아슴히 서면이며 동래와 연산동이 장난감 레고마을처럼 아기자기하게 보였다.

이른 봄 양지꽃이랑 제비꽃이 피던 산, 까치랑 온갖 멧새 지절거리고 가을이면 억새가 하얗게 나부끼던 배산.

무엇보다 신나기는 산에만 가면 무늬와 색상 다른 고대 토기 조각을 주워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학창 시절에도 줄줄 외우면 되던 역사 시간이 좋았고 점수가 잘 나오니 그 과목에 재미를 느끼게 돼, 고리타분하다는 골동품 취향이 굳어졌지 싶다.



부산 와서 박물관회에 들어가면서 심도 있게 관심을 넓혀가다 보니 흥미 깊어진 역사였던 만치 눈에 띄는 대로 토기 쪽을 모아 박스로 한가득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산동 울멍줄멍한 산등성이 고분들은 뫼의 형태가 거의 다 주저앉아 흔적 희미해, 아이들 소꿉 놀이터가 된 양지녘일 뿐이었다.

다만 소문으로 나돌 뿐 학술적 역사고증이 나온 바도 아니거니와 따라서 체계적인 발굴 작업 같은 게 이뤄지지 않았던 때였다.

토기 쪽이 주변에 마구 흩어져 있다면 고분 냄새쯤은 문외한이라도 충분히 맡으련만 아마도 학계에서는 예산 타령부터 했을 테고.

산 정상에서부터 산자락 여기저기 허투루 굴러다니는 토기 파편이 흔하다는 정도 외에는 옛적일에 다들 별로 관심을 안 보이던 시절이 꽤 길었다.

이미 일제강점기 때 갑주류와 원두대도(圓頭大刀)가 출토(현재 일본 도쿄박물관 소장) 돼 주목받았으나, 이후 오랜 기간 산업발전에 총력을 기울이느라 옛 무덤에 대한 관심 같은 건 뒷전일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학술조사나 연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당장 국가는 경제 부흥을 위해 매진하던 당시, 국민들도 먹고살기에 급급해 과거 유물이며 지나간 역사에 마음 쏟을 여력이 없었던 시대였다.

그러는 동안 도굴이 성해 상당수의 유물이 마구잡이로 도굴꾼의 돈벌이 표적이 되어 음성적으로 유출되기에 이르렀다.

야밤을 틈타 몰래 고분을 파헤친 그들이 도구도 도구지만 조심성이 있었겠는가, 그렇게 얼마나 많은 토기가 깨어지고 버려졌을까.

그들의 도굴행위가 왜 지탄받아 마땅한가 하면 몰래 분묘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현장을 훼손 또는 변질시킴으로 과거를 흩트려 놓아 역사를 왜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문자가 없던 고대 사회를 밝혀주는 단서는 오직 유물뿐인데 한 시대의 문명을 통째로 누락시켜 버려 역사를 읽을 수 없게 만들기에 큰 범죄다.

오랫동안 연산동 거대 고분은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는 동안 꾼들에 의해 웬만한 유물들은 다 털려나갔을 터.


그로부터 한참 지나 삶의 질이 나아지며 연산동 인근 도로를 뚫다가 유물이 나오자 부산 박물관과 고고학계에서 발굴작업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다.

미국에서 경황없이 지내던 어느 날, 연산동 고분이 새 단장 끝에 준수한 모습으로 부활했음을 알게 됐지만 태평양 너머의 일.

한국으로 리턴하고 나서 언제 한번은 가봐야지, 벼르던 곳을 이제야 찾게 됐으니 여러모로 소회가 남달랐던 하루다.


부산에서 유일하게 거대한 봉분이 있는 연산동 고분군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의 둥글고 높은 봉분 형식을 취한 고분들이다.


황령산 건너에 위치한 배산에서 북쪽으로 뻗은 구릉 능선 정상부에 남북 방향으로 18기의 큰 봉분이 일렬로 배치돼 있다.


구릉 아래 자락 경사지에는 봉분이 없는 1천여 기 이상의 중소형 고분이 산재해 있는 대규모 고분군 단지다.


5∼6세기에 조성된 삼국시대 고분 1천여 기가 모여 있는 사적 제539호인 부산 연산동 고분군이 배산 성터 저 아래 기다랗게 누워있다.

연산동 고분군이 조성될 당시 지금의 부산교대 앞까지 인근이 전부 바다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긴 섬이었던 곳이다.

따라서 고분의 주인공들은 수영만과 내륙이 연결되는 곳에서 왜와의 교류 거점 역할을 하는 등 해상 교역을 담당했던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무덤의 특징은 석곽 내부를 점토로 발라서 마감 처리했으며 물이 석곽 안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풀잎, 나뭇가지와 점토를 번갈아 가며 덮는 부엽공법을 사용했고 마사토로 연약한 지반을 강화했다.

부산 지역과 신라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이 출토되어 5~6세기 삼국 시대 이 지역의 고대 역사 연구와 문화 규명의 주요 유적지로 평가된다.

이미 일제 강점기 때 철제 갑주(甲胄)들이 출토되어 고대 한국과 일본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지다.



배산 정상부터 올랐다가 일단 산 전체를 조망한 다음 배산 줄기 하나가 북쪽 방향으로 흘러내린 산자락을 타내렸다.

보기에 따라서는 비너스상 매끈하니 아름다운 여체와도 같고 규모상으로는 신라고분 못잖은 위용 드러낸 연산동 고분군.

한국 어디서나 느꼈듯이 모든 면에 있어서 우수한 두뇌 덕인지 경제발전 덕인지 아무튼 지역사회마다 특색 있게 잘도 가꾸고 다듬어 놓아 감탄사 터질 정도였다.

그렇듯 죽은 자들의 무대이지만 전혀 꺼려질 바 없는 역사 문화 공간으로 꾸며, 산책로가 있는 공원인 현재는 무덤이되 금잔디 유정스러웠다.

서녘으로 해가 지면서 인근은 더욱 고즈넉, 아늑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부드러운 곡선의 고분을 하나하나 눈으로 쓰다듬다가 홀연 하늘에 뜬 달을 보게 됐다.

마침 음력으로 구월 보름날, 독특한 장소에서 달마중을 하게 된 셈이다.

일부러 특별 이벤트를 마련해 두신 하늘의 배려 같아 그 또한 기꺼웠다.

원만무애한 둥근달이 고분 사이 둥두렷 떠있기에 좀 더 머물러 있으면서 사위 어두워진 다음 푸른 월광을 즐겨보고 싶었다.

산책 나온 마을 사람들도 끊임없이 다니므로 전혀 적적하지는 않았으나 여섯 시가 지날 즈음 저녁 찬바람이 밀려들며 스카프를 펄럭여댔다.

아무래도 그쯤에서 무리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답, 도회의 불빛 한결 밝아질수록 한기는 점점 심해졌다.

귀가하니 일곱 시가 넘었다. 거의 종일을 쏘다녔으므로 좀 무리하게 걸은 하루, 따끈한 물로 발의 피로부터 풀어줬다.

연산동 고분군 내 M3호분으로 석곽 내의 목곽 흔적(내부 하얀 선)과 벽면 상단 점토 위의 각재 흔적 (문화재청 자료)

위치ㅡ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 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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