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바늘에 관한 단상

by 무량화

오후 해거름 무렵 바닷가 산책하러 나서기 앞서 챙기는 게 있다.


물을 가득 채운 텀블러다.


길냥이 물 배달꾼이 종이컵에 물을 부어주자 방파제 테트라포드에 숨어있던 녀석들이 쪼르르 모여들었다.

까망이 점박이 누렁이 흰둥이가 물컵 가장자리에 머리를 맞댄 채 찹찹 거리며 물을 먹는다.

그중 누렁이 털이 유독 너저분하기에 살펴봤더니 털에 도깨비바늘이 잔뜩 붙어있다.

깔끔 떠는 성정대로 고양이는 틈만 나면 묘기 부리듯 몸을 비틀어가며 신체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관리한다.

아마도 이 녀석은 어딘가 후미진 풀덤불 사이를 방금까지 들쑤시고 다닌 모양이다.

도깨비바늘을 떼어주려고 손을 내밀자마자 녀석은 쏜살같이 도망가 버린다.

원래 고양이는 쥔장한테도 고분고분 살갑게 굴지 않고 새침 맞지만 떠도는 길냥이야 경계심까지 더해 몸을 사리기 마련이다.

낚시터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도깨비바늘을 찾아보려고 일부러 언덕 쪽에 나있는 조붓한 갈맷길을 택했다.

오래전 기억 속의 늦가을, 산으로 들로 쏘다니다 집에 오면 바짓가랑이와 양말목 여기저기에 붙어있곤 하던 길쭉한 풀씨.

하나하나 엄지와 검지로 꼭 집어 떼어내야만 제거되던 도깨비바늘이 자드락길 주변에 제법 숱하다.

짙은 색 풀잎에 노랑꽃 피어있던 이름 모를 그 키다리 풀이 바로 너, 도깨비바늘이었구나.


덜 여문 씨앗은 초록 기운이 돌며 몽당빗자루 같으나 완전히 익으면 흑갈색의 방사형, 마치 불꽃 팡 터지듯 한 모양이 된다.

이젠 잎새들 다 떨구고는 가느다랗고 긴 줄기마다 동그란 씨앗만 앙상히 매달고 흔들거리며 '나 좀 데려가 줘!' 한다.

사람이건 고양이건 스치고만 지나가면 악착같이 달라붙어 멀찌감치 이동해 종족을 널리 퍼트리라는 신의 섭리가 그러하니.

낚시 미늘(barb)처럼 풀씨 끝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반대 방향으로 껄끄럽게 붙어있다.

충치 치료할 때 치과에서 사용하던 도구가 연상돼 괜히 몸이 움츠러든다.

그 거스러미 구조는 들어올 때는 자연스러우나 나갈 때는 거꾸로 된 가시가 방해를 놓아 쉬이 빠지지 않는다.

사람의 옷이나 동물 털에 붙으면 툭툭 털어가지고는 어림없고 꼼꼼히 떼내야만 겨우 떨어지게 되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래도 금 나와라 뚝딱! 도깨비 금방망이처럼 가을 추억 하나 얼른 소환시켜 준 고마운 도깨비바늘.

동시에 도깨비바늘이 들려주는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나 행여 누군가를 귀찮게 한 적은 없는지, 성가신 존재가 되지는 않았는지, 이 저녁 곰곰 생각하게 만든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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