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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나타

-1990-

by 무량화

1


이 가을. 누구나 한 번은 떠나 보아야 하리.

매인데 없이 홀로 길 떠나 보아야 하리.

자신으로부터도 훌훌히 떠나 보아야 하리.



그렇게 빈 마음으로 나서면

아무 흔적 남김 없는


바람 혹은 구름이 동행해 주리니.

그때 우리는 들으리라.


저 숲 나뭇잎 물들고 지는 까닭을.



범연히 가을빛 깃드는 잎새들.

그것은 자연의 질서에 맞갖는 겸손한 순명.

허나 가장 진한 몸부림으로


치열히 항거하는 역설적인 모반 같은 것.



안으로 뜨겁게 연소하는


또는 급랭의 영하로 결빙하는

내재율의 갈등이 빚는 처연한 신음 같은 것.

어쩌면 마지막 순간을 황홀하게 장식하려는


못내 안타까운 안간힘 같은 것이리라.



2


너른 들 호남 향해 연면히 달려온 노령산맥.

그 끝머리에 신성봉 받들어 이고


만산홍엽 절정 이룬 내장산.

산이 불타고 있다.

찬연한 불꽃으로 활활 불타고 있다.



풋내 나는 이십 대 정열이기보다


원숙히 무르녹은 중년의 농즙 같은 열정으로


광기이듯 지르는 불.

속으로 갈무린 정화 기어이 못 견뎌


결결이 풀어 헤치니 질탕한 교태가 되는가.

휘감기고 내꽂히며 압도해 오는 저 농염한 관능.

르누아르의 풍만과 화려.

얼마쯤 퇴폐적인 라 트라비아타


한데 얼려 불사르는 혼.



거기에선 나른히 취하게 만드는


잘 발효된 술 내음이 난다.

몽롱한 환각을 일깨우며


진홍빛 맹렬히 타오르는 산불.

온 산이 미쳐 도는 한 자락 불춤이다.



드디어 산이 익는다.

뜨거움에 지질려 그만 산이,


산이 흘러내린다.

이골 저 골 기슭마다 공 고르며 치달리며


용솟음치는 해일.

때론 울컥 각혈하는 산비탈.

용암과도 같이 핏빛 선연히 흘러내리는 자국 따라


후드득 날아오르는 불새, 불새 떼.



3


지금은 단풍으로 한껏 호사했지만

곧이어 낙엽 져 뿌리로 돌아갈


순명의 시간을 기다리는 나뭇잎.

하여 우주에의 회귀본능은 비감하리만치 아름다운 것.



소멸이 아닌 새로운 탄생을 위한 준비이기에


집착이나 미련 두지 않는 걸까.

지순히 높고 순결히 맑은 또 하나의 환생을 위하여


지금은 기도가 필요한 때.

그러나 분명한 이별의 예감 앞에


어찌 마음 숙연해지지 않을 수 있으랴.



회한도 정한도 다 부려 놓고


체념과 달관으로 저만치 서 있는 가을의 허리쯤엔

그래도 차마 떨구지 못한 그리움 묻어 있다.

멀수록 간절한 그 정념일랑 어디에 띄울 것인가.



4


누리 만년 그리도 의연하고 당당하던 산.

그 산이 화염에 싸여 마침내 허물어진다.

대제국 로마의 멸망도, 천년 사직 신라의 쇠잔도


그렇게 왔다던가.

영화는 속절없는 한순간의 꿈이었다.

더더욱 향락은 찰나의 도취.



결국 모든 생명 있는 것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할 존재.

그래서 허망하다.

내장산 단풍 불 꺼지고 낙엽 져 사위면


그땐 빈 숲에 주체 못 할 바람소리뿐이리니.



가을은 그래서


고행의 숱한 밤들이 영근 사리였다가

조개비 아픈 상처가 키운 진주였다가

차마 못 견딜 담금질로 뼈 깎아 세공한


상아 그 눈부심 이리.

자칫 파열할 듯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이 가을의 律, 정연히 다스리기 위해

하늘은 저리 창창하고 바람은 돌아앉아


칼날 시리게 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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