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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戀書

by 무량화

공(空) 그리고 적(寂).

아름다운 것들은 왜 그리도 빨리 사라져야 하는지요. 현란히 불타는가 싶더니 어느새 죄다 낙엽 져 내리고 만 단풍. 한두 잎 나비인 양 가벼이 나풀대다가 드디어는 소낙비 되어 흥건히 쏟아져 내리는 잎, 잎새들. 황홀한 순간은 아주 잠시였습니다. 수천의 금빛 촛대 위에 일제히 촛불이 켜진 듯 거의 몽환적이기조차 하던 만추의 숲. 체리힐의 가을은 단풍으로 눈부셨습니다.



이제 축제는 끝났습니다. 새소리마저 멈춘 숲에 서늘히 바람이 지나갑니다. 바람 따라 천공을 헤엄치는 나목의 빈 가지들이 서로 마른 어깨를 부딪치며 노 젓는 소리를 냅니다. 문득, 달도 이운 한밤에 삐이걱거리며 천천히 노를 젓는 낡은 거룻배가 갈대숲 언저리를 지나 어둠 속 멀리로 사라지는 환영을 봅니다. 그건 빗금 그으며 떨어지는 또 한 잎 마지막 잎새였던가요. 떠나가는 것 모두 다 한결같은 물빛 슬픔입니다.



단풍은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나무의 자기 정리 의식이라지요. 그러나 떠날 때를 아는 겸손한 순응, 미련 두지 않는 범연한 작별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게 아닙니다. 하여 아무런 집착 없이 저리도 초연히 소멸해 갈 수 있는 평상심이 정녕 부럽기만 합니다.



가없이 푸른 창천은 눈이 시린데 거기 걸린 추상화, 까칠한 선과 선들이 빚어낸 화폭이 싸늘하니 추워 보입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숲은 얼마나 찬란하고도 화려했던지요. 황금빛 제의를 차려입고 전례 의식을 치르는 중세 사제 행렬만큼이나 장엄했건만 순식간에 훌훌 치장을 거두고 초탈한 수행자처럼 저만치 물러앉은 나무들. 며칠 만의 놀라운 변신입니다.



무상한 것이 어디 낙엽 져 내리는 단풍 잎새뿐이겠습니까. 부질없기로야 세간사 영화며 사랑도 마찬가지. 섬광, 그렇지요. 찰나를 불태우며 찬연히 타오르다 스러지는 불꽃처럼 한순간에 전 생애를 살아버리는 영혼이 무릇 그 얼마 이리요.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도무지 믿기지 않아요. 전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던 듯 아주 무상심하게 담담한 그대가 낯설다 못해 생소합니다. 어쩌면 혼자 한바탕의 봄꿈에 질펀히 빠져있던 것은 아닌가, 멍한 표정을 짓게도 됩니다. 우리가 공유했던 시간들이 어쩐지 비몽사몽 간을 헤맨 듯 애매모호해지며 현실감이 들지를 않습니다. 꿈만 같은 일, 역시 그건 설핏 꾼 꿈이었어. 자기 최면을 걸듯 짐짓 강하게 부정을 해봅니다. 아무리 도리질해 봐도 그러나 火印처럼 또렷이 남은 기억의 흔적들을 어이 지울 수 있으리까.



신비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무작정의 이끌림, 멈출 수 없던 격정. 전 전생 언제부터인가 준비된 인연이었지만 그 만남은 더디게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그 사랑이 찾아왔을 때 서로가 한눈에 단박 알아볼 수 있었던 신비를 어찌 외면할 수가 있을까요. 아낌없는 연소였고 후회 없는 투신이기도 하였으며 광적인 신앙처럼 그대 깊이 침몰하여 마침내 그 안에서 순교하고 싶었던 지독한 열정의 실체. 영육이 한데 녹아 종내는 혼절에 이를 것 같은 몰아의 경지, 더 이상의 충족이 없는 완전한 행복이 바로 그런 상태 아닐는지요.



그때. 어인 일인지 자꾸만 가슴 왼편이 아릿거렸지요. 불길처럼 달아오르다 못해 솟구쳐 벅차오르는 마음은 두둥실 하늘을 날았는데, 정녕 꿈이었나요. 세포 낱낱이 춤을 추던 그 황홀한 도취는 환각이었던가요. 절정을 향해 치닫던 숨 가쁜 호흡, 용광로로 끓던 뜨거운 숨결을 생생히 기억하건만 그마저 한갓 꿈이었던가요. 아닙니다. 저녁놀처럼 번지는 주홍빛 화염 속을 유영하던 환희, 그건 결코 환상도 꿈도 아닌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그 가을. 그대 색채와 향기 속으로 깊이 함몰되며 나의 우주는 그대 향해서만 열려있었지요. 하여 지나가는 말처럼 흘린 사소한 언어의 토씨 하나까지도, 아니 귓불 스친 작은 떨림의 동작까지도 낱낱이 내 안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대와 더불어 하나 된 동안만은 아린 상처들 잊을 수 있었으며 누기찬 삶에도 빛살 환히 들어찼지요. 그대의 부드러운 음성, 따스한 눈빛, 그것은 힘겨운 당시의 내게 얼마나 큰 위로와 위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안타까운 사랑이 그러하듯 단풍의 호사도 잠시였습니다. 축복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기 마련이니까요. 아쉽게 깨고 만 꿈과 같이 잠시라서 더욱 애틋한 그대와의 연(緣). 사라져 가는 것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잔영들. 부활의 봄이 와 햇살 온화하게 퍼지면 새소리 먼저 숲의 나무들 정령을 일깨울 테지요. 그리고 다시 계절은 돌고 돌아 얼마 후면 또 우리의 가을이 열릴 겁니다. 체리힐의 가을, 단풍나무 참나무 아름다이 물드는 체리힐의 가을이요.



잎잎의 찬란한 변화, 생각만으로도 눈이 부셔와요. 천지가 가득 차는 충만감으로 온전한 기쁨을 맛본 그 순간들은 내 생 최고의 은혜로운 선물이었지요. 두려움 없이 몰입하였던 격정의 시간은 우리의 마지막 사랑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비록 낙엽 되어 땅에 누었을망정 그대 만남으로 지상에서의 나의 여행은 축복이었음을 지금에야 그대에게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연연한 신록이 나무의 첫사랑이라면 단풍은 나무의 마지막 사랑 방식입니다.

-2001 미주 중앙일보 뉴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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