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온 김에 태종대나 들러보기로 했다, 하늘 쾌청한 터라 주저 없이 택한 행선지다. 전망 좋은 등대만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다시 한번 찾아볼 장소가 있기도 해서였다. 9월은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 수복일이 들어있는 특별한 달이니까. 몇 년 전에 수국꽃을 보러 태종대 갔다가 의외의 정경을 만났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느닷없다 할 정도로 으슥한 송림 사이에서 본 바 있는, 한국동란 때 스러져 간 무명용사들의 추모비였다.
6·25 참전 영도 유격부대 유적지 비는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에 있다. 한국전이 치열하던 당시 부산 영도에 본부를 둔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출신 반공 청년 천이백 여 명은 생명 건 유격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한 극동군사령부의 지휘 아래 북한 땅에 공중 침투하거나 해상으로 침투하여 적의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군사 정보를 수집했다. 특수임무인 첩보 수집, 후방 교란 등을 주로 수행한 유격부대인 켈로부대. 목숨 바쳐 유격전을 전개하다 산화한 491명의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존 대원들이 뜻을 모아 1984년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폭양 따가웠으나 사방에서 몰아치는 해풍은 시원했다. 참기름을 바른 듯 잎새마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동백나무 쥐똥나무 후박나무 목련 곰솔과 해송 마가목이 어우러진 숲. 칡덩굴 멍게덩굴 등덩굴도 무성히 얼크러설크러졌다. 숲향기 밀밀한 산책로를 따라 자살바위 전망대 모자상을 거쳐 영도등대로 내려갔다. 거칠 거 없이 마구잡이로 달겨드는 거친 바람, 그러나 주전자섬이 마주 보이는 바다에 뜬 여러 척의 입항대기 컨테이너 선박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라 안팎이 여러모로 뒤숭숭한 시국이나 국제적으로 이뤄지는 경제활동은 무풍지대이듯 여전스레 활기찼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싶었고 일면 안도감이 들었다.
순환도로를 따라 태종대 정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해가 약간 기우는 듯하여 발걸음 날듯이 빨라졌다. 양팔 힘차게 내저으며 부지런히 걸었다. 일반 차량 운행이 통제된 대신 태종대공원을 도는 산뜻한 미니열차가 요소마다 정차하며 곁을 스쳤다. 가로에는 허투루 버린 쓰레기 하나 없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쓰레기 수거함이 비치돼 있는 등 전체 관리상태는 아주 좋았다. 태종사 들머리 못미처서 자연석에 새긴 유격부대 유적비 입구란 표지석을 만났다. 숲 사이로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이 부대는 한국전쟁 때 조직된 켈로부대(KLO, 미 육군 8240부대)로 특히 팔미도 등대를 탈환, 불빛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9월 15일 칠흑같이 어두운 밤 0시, 팔미도 등대 불빛을 육지 쪽으로 돌려 유엔군의 상륙작전을 인도해야 했다. 잘 훈련된 부대원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팔미도에 상륙해 순식간에 적군을 제압하고 등대를 탈환했다. 이들이 등대에 불을 밝히자 인천 앞바다에 늘어선 아군 함대들이 일제히 포를 발사했으며 네시가 되자 하얀 파도를 앞세운 인천상륙작전 서막이 열렸다.
‘군번 없는 군인’으로 전쟁 내내 대북첩보와 북파공작 등을 맡았던 켈로부대원들. 1.4 후퇴 때 월남한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출신 반공청장년을 규합하여 임시포로수용소가 있던 서면에서 결성되었다. 대원선정의 기준은 가족이 없는 경우라야 했고 가족이 있더라도 부양 의무가 없는 남자라야 했다. 이듬해 영도로 자리를 옮겨 태종대에서 훈련받은 유격대원들. 당시의 태종대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구축해 놓은 해안포대와 부대시설이 남아 있어 특수부대 훈련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산림이 울창하여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섬이었다. 그렇게 섬 안에서 고도의 비밀 훈련을 받은 그들.'동해지구 반공의병대' 또는' 켈로(KLO) 부대' 일명 '파라슈트부대'라고도 불렸으며 주한 합동 고문단(JACK) 산하 미국 중앙정보부(CIA) 소속의 비밀첩보부대원들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부대는 해체되었다. 1200명의 대원 중 900여 명은 임무 수행 중 장렬히 전사했다.
오석으로 된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군번도 계급도 없었던 대한의 젊은 영도 유격 부대원들은 보수나 대가 또한 바람 없이 다시 못 올 결의로 떠나던 날 태종대 이 소나무 저 바위 밑에 머리카락 손톱 잘라 묻어 놓고 하늘과 바다로 적 후방에 침투하여 숨은 공 세우다 못다 핀 젊음 적중에서 산화하니, 아아! 그 죽음 헛되지 않아 호국의 넋이 되어 국립묘지 합동 위령비에 모셨도다. 가신 동지들의 요람지 태종대 반공의 정기 어린 이곳을 못 잊어 작은 돌 하나 깎아 영도 유격 부대 유적지의 거룩한 자취를 남기노라.” 머리카락을 이 산하에 묻어두고 마지막 길 각오한 비장감이 눈가 뜨겁게 만든다. 군번도 없이 일련번호만 부여받았던 그들은 북괴군에 맞서 초개같이 목숨 바쳐서 대한의 자유를 되찾게 해 줬다.
적후방에 침투하여 현지 반공투사를 규합하고 적의 정세 탐지 및 적후방 교란 등 유격 작전을 수행하다 산화한 분들을 추모하는 조촐한 장소인 이곳. 무명용사비, 공수 낙하 및 해상 침투도, 유격 거점 배치 상황도, 해상 유격 작전도, 무선 통신 교신도, 영도 유격 부대 선열 추념비에 어룽지는 햇살 무늬가 그늘로 내렸다. 얼룩무늬 군복처럼 보이는 나무 그림자가 마치 난마처럼 어수선이 얽힌 현시국 같았다. 의정갈등 장기화로 아플까 무서운 판에 국감장에서는 탄핵소리 나오는 시절이 시절이라서인지 자못 처연해졌다. 어떻게 지켜낸 이 나라인데 한심함을 넘어 분노에 이를 만큼 금도를 벗어난 위정자들의 현 작태라니.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한국전쟁의 참상을, 불행을, 비극을 얘기한들 요새 젊은이들 우크라이나 전쟁보다도 더 피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삼 년에 걸친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국토에 만연한 기아. 구호물자에 의지해야만 한 최빈국 국민이었던 우리였다. 참담하기 그지없는 폐허에서 맨주먹으로 그래도 우리는 한마음 되어 산업을 일으켰고 경제부흥을 일궈내 오늘에 이르렀다. 'Freedom is not Free' 이는 미 워싱턴 DC 내 한국전 참전 기념 공원에 새겨 있는 글귀다. 까만 오석에 새겨진 그 글을 보며 먹먹하도록 숙연했던 기억. 그렇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는 거저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나라 지키고자 죽음 겁내지 않고 적과 싸우다 이름 없이 져버린 수많은 영령들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무명으로 스러진 유격 부대원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추모탑 앞에 놓인 조화 꽃잎 나붓대는 손짓에 밀려 천천히 언덕을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