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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마이트

by 무량화

1950년 6월 25일 새벽, 느닷없이 북한은 무력으로 남한을 침략하면서 6·25 전쟁을 일으키지요. 사전에 암호명 '폭풍 224'에 따라 치밀하게 준비해 온 대로 기습 남침을 하는데요. 선전포고도 없이 갑작스레 터진 전쟁이라 남측 전세는 계속해서 불리해져만 가는 상황. 졸지에 서울을 빼앗기고 대전 대구를 적에게 잃은 뒤 임시수도 부산에 내려온 정부와 피란민들. 마지막 보루인 낙동강 방어선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치열한 전투가 연일 벌어지지요. UN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북괴군에게 밀려 바람 앞의 촛불 같은 누란의 위기에 빠진 자유국가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한 작전을 세웁니다. 이름하여 작전명 크로마이트. '크로마이트'는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 비밀 작전 암호랍니다.


당시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m임을 들어 이 작전을 허락하지 않았다네요. 항구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 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고 암초가 많은 데다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요. UN군이 상륙작전을 펼치기에는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지요. 반면 맥아더 장군은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인천상륙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해요. 결국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어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펼치게 됐답니다.



그의 작전은 월미도를 점령하기 앞서 먼저 팔미도부터 접수하기 위해 켈로부대원인 특공대를 한밤에 투입하는데요. 고무보트를 타고 팔미도에 조용히 상륙한 비밀대원들은 순식간에 북괴군들을 제압하고 등대를 점령했지요. 이들이 9월 15일 0시 등대에 불을 밝히므로 유엔군 함정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건데요. 이처럼 팔미도 등대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답니다. 이 등댓불이야말로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어 서울을 수복하고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중요한 불빛 맞지 않겠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인 팔미도 등대는 이처럼 인천상륙작전 당시 가장 먼저 탈환돼 연합군 함정과 병력의 인천 상륙을 최일선에서 도울 수 있었던 거였어요.



인천상륙작전은, 동해 삼척에서 미군함 미주리호가 상륙작전 준비로 오인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지요. 서해에서는 최적의 상륙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함포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작전부터 시도했는데요. 그와 동시에 맥아더는 군산에 상륙할 것이라는 거짓정보를 흘렸다고 합니다. 이 정보에 속아 넘어간 인민군들은 군산의 방어력을 강화하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 경계가 허술해졌다고 하네요.

드디어 D데이인 9월 15일 새벽 네 시. 작전개시일에 유엔군 산하 함정 206척, 7만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영종도 근처에 집결하며 작전이 시작되었는데요. 맥아더 장군의 지략과 이름 모를 수많은 유엔군들과 우리나라 장병들이 힘을 합쳐 이루어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므로 밀리기만 하던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꾸게 됩니다.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 상륙 이후 아군이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38선까지 올라오는 데는 보름 정도 걸렸으며 결국 적의 배후를 기습한 이 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역전되었지요.



그리하여 동족상쟁의 비극인 한국전쟁은 엎치락뒤치락,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군하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바뀌지요. 그 와중 확전을 우려한 미국 내의 정전 압박으로 휴전회담에 들어가 오랜 설전 끝에 휴전협정을 맺고 3년 1개월 만에 전쟁은 끝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전쟁종식이 아닌 휴전상태인 한반도인 거지요. 그러나 몇 년 전의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휴전선 인근의 발목지뢰 사건, 서울 한복판에다 오물풍선을 투척하는 행태에서 보듯 한국전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한때 인천 자유공원에 선 맥아더 동상을 철거시키자고 야단법석을 일으킨 사람들도 있었는데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 글쎄요?

흑백사진 구글/ 표제사진 팔미도 등댓불은 인천 친구가 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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