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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다리가 셋

by 무량화

일간지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안경을 낀 반듯하게 잘 생긴 백인 청년. 나이 스물하나 인 그는 그러나 한쪽 눈과 다리를 잃고 귀환한 부상병이다.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따분해 비디오 게임처럼 신나고 재미있는 전쟁놀이를 꿈꾸며 자원입대한 군. 이라크 전에 파병된 지 몇 달 만에 그는 폭탄 공격을 받고 피투성이가 되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수차례 수술에 따른 심한 고통 때문에 진통제가 과다 투여되고 그로 인해 날마다 공포스러운 환각을 경험한다. 눈앞에서 폭탄이 터지며 온몸은 찢겨 만신창이가 되곤 한다. 각막에 박힌 탄피, 잘려나간 다리. 병상에서 그는 정신없이 비명을 질러대야 했다. 끔찍스런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그는 말한다. 전쟁은 결코 비디오 게임이 아니었노라고.



지금 미국은 미증유의 재난인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남긴 상흔 수습에 골몰하고 있다. 그 통에 잠시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틀림없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할 골 아픈 문제꺼리가 있다. 이라크 전이다. 아울러 점차 세를 확대해 가는 반전시위 또한 묵과할 수 없는 행정부의 짐이다.



지난 8월 초,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 어느 평범한 어머니가 시위에 나섰다. 여름휴가를 즐기던 대통령의 심기를 어지럽힌 그녀는 신디 시핸. 자신의 아들이 젊디 젊은 청춘으로 죽어야 했던 이유를 알고 싶다며 대통령과의 면담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대표성 없는 주장은 수용할 수 없다며 면담 요구를 일축해 버렸다. 텍사스의 뙤약볕 아래 1인 피켓 시위로 시작된 농성은 날이 거듭될수록 많은 동조자가 불어나며 힘을 늘려갔다.



크로퍼드 목장의 길섶에 꽂힌 수백 개의 하얀 십자가. 거기에는 이라크에서 숨진 희생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농성장을 언론이 주목하면서 세간의 관심은 크게 증폭됐다. 그녀와 생각을 같이 하는 호응자는 물론 격려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주위에 밀려들었다. 그녀는 평화의 어머니, 반전 운동가라 불리며 전국적인 반전시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각처를 돌면서 이라크에서의 미군 철수와 전쟁의 부당성을 외치는 그녀. 아주 평범했던 한 주부는 그렇게 전사로 변모해 갔다.



제풀에 지쳐 거둘 줄 알았던 1인 시위가 전국적인 반전 시위로 확산되어 갔다. 그러자 부시 대통령은 국민을 상대로 이라크 전의 홍보에 주력했다. 세계 평화와 자유민주주의의 정착이라는 미명. 아무리 명분 있는 전쟁임을 강조한들 대관절 싸움질에 무슨 명분이 주어지며 폭력에 내세울 명분이란 게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초반엔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파병이 시작된 이라크 전이다. 9.11 테러의 배후이자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는 트집을 걸며 전쟁을 벌였으나 샅샅이 뒤져도 WMD는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아프간 전 때와는 달리 전황은 지지부진인 가운데 전사자가 속출했다. 결국 명령권자의 무모한 오판과 세계를 제패하려는 오만함으로 무고한 생명만 희생돼 갔다. 설상가상으로 엄청난 전쟁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부담이 커지자 국민들도 점점 전쟁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다.



쏟아부은 전비도 전비이지만 집계에 의하면 이라크 전선에서 사망한 미군 숫자는 2천을 넘어섰으며 2만여 명이 부상 입은 상이군인으로 살게 됐다고 한다. 부시 정부가 2009년까지 십만 명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킬 방안을 마련해 둔 것처럼, 이라크 전은 이미 일 년 전에 종전 선언을 한 것과는 달리 여전히 불타오르는 전쟁으로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폭탄이 터지고 있는 이라크가 아닌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라고 그럴듯한 명제를 대부분 앞세우곤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도사린 것은 대립 상태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탐욕의 결과물인 것이 전쟁이다. 민족상쟁의 비극인 육이오가 김일성의 탐욕스러운 공산화 야심 때문이었듯 이라크의 석유가 이번 전쟁의 숨겨진 목적은 아니었던가.



대한민국 중허리를 가로지른 철책선 인근에는 다리가 셋뿐인 고라니가 심심찮게 목격된다고 한다. 도처에 묻힌 지뢰 탓이다. 아니, 평화의 길 마다하고 상생 공존을 거부하며 유아독존하려는 전쟁광들 때문이다. 단말마를 내지르며 쓰러졌다가 겨우 목숨 건져 절뚝거리는 짐승은 무슨 죄로 날벼락을 맞았나. 마태복음 26장의 말씀처럼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하게 마련. 핵을 가진 자 종당엔 그 핵으로 망한다. 소련이 수많은 핵을 가지고도 왜 자체 붕괴됐을까.


2005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 청탁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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