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여파로 종일토록 비바람 심하다.
윗녘은 해가 쨍쨍하다는데 부산은 며칠째 강풍에 떠밀리는 구름장 불안스럽다.
오후 녘, 빗발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기에 막간을 이용해 금강공원에 갔다.
공원 입구에는 어느새 벚나무 이파리들이 낙엽 져 빗물에 젖어있다.
은행나무 발치에는 은행열매 누렇게 떨어져 쌓였다.
거들떠도 안 보는 천덕꾸러기로 아무도 줍지 않아 쓰레기가 되고 마는 은행.
은행알이 아깝지만 체질상 맞지 않아 나 또한 그냥 지나친다.
이번엔 인심 좋아 보이는 목장승과 온 동네 평안을 비는 솟대가 마중 나온다.
숲 그늘 따라 이주홍 시비, 최계락 시비, 이영도 시비도 기다린다.
솔숲에는 기형도 시인과 천상병 시인 등의 시화가 여러 편 걸려 있다.
송림 지나 저만치 산 모롱이가 벌겋게 물들었다.
작년에도 진다홍 야하게 피었던 한밭 자리 군락 이룬 꽃무릇 단지.
꽃무릇이야말로 한두 포기로는 성이 안 차고 무리를 이뤄야 비로소 볼품이 난다.
전에는 꽃무릇을 보려면 일부러 전라도 선운사로 가야 했다.
요즘은 동네 공원마다 꽃무릇을 식재해 그리 귀한 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색을 하게 된다.
팍팍 폭죽 터지듯 붉고도 긴 꽃잎 화려하게 펼친 꽃무릇.
하마 꽃이 피었을까? 꽃무릇 소식 궁금해 몇 번 걸음 한 금강공원이다.
불과 일 주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는 민둥벌로 아무 기척 없었는데 그새 죽순 자라듯 쏘옥 꽃대 올려 환하게 피어난 꽃.
천생 잎과 꽃이 만날 수 없어 서로 그리워만 하는 사모의 정 저리 깊어 붉은 가슴일까.
여섯 매 꽃잎 화들짝, 요가라도 하듯 한껏 휘어진 수술 역시 속속들이 단심 펼쳐내보인다.
그 심사 요염할 정도로 애틋하면서도 얄궂다.
훤칠한 소나무 흉내 내듯 쭉쭉 곧게 뻗은 꽃대궁마다 불길 솟구치듯 수술 밀어낸 고혹적인 꽃무릇 한창이다.
알뿌리에 방부제 역할을 하는 성분이 들어있어 불경 제본 시 좀이 슬지 않고 단청 빛 잘 바래지 않기에 주로 절간에 많이 심는다는데.
석산화, 피안화라고 하는 이 꽃을 볼 적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만.
원색의 꽃송이들과 디립다 엉겨 똬리 튼 비암 그림으로 대표되는 천경자 그림이 떠오른다.
너무도 또렷하게 짙어 청사(靑蛇) 떠올리게 하는 새파란 꽃대궁과 이글거리며 치솟아 혀 날름대는 불꽃처럼 보이는 꽃 모양새 때문일까.
분위기상으로는 빛깔이나 꽃송이 자체가 기이할 정도로 요염하다 못해 요사스러운 석산화.
발칙한 내 연상작용과는 전혀 다르게 꽃말 애틋해 '서글픈 추억'이다.
꽃무릇은, 초여름에 피는 연자색 상사화와 닮은 점이 하나 있다.
잎과 꽃이 서로 만날 수 없다는 공통분모 외에 아주 뚜렷하게 도드라진 차이점은 이러하다.
꽃무릇은 가을에 꽃이 피었다 지고 난 다음에 잎 돋아 겨우내 푸르다가 봄 되면 스러지기에 꽃과 잎이 상면할 수가 없는 태생적 비련의 꽃이다.
반면 상사화는 잎이 먼저 돋으며 무성하던 잎 지고 난 다음 초여름에 꽃이 피기에 서로 못 만나는 운명이긴 마찬가지다.
꽃말이 그래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금정산에 다시 스멀스멀 안개비 스며든다.
태풍이 몰고 온 가을비 퍼부어
저 피처럼 붉은 꽃무릇 정념의 이마 좀 식혀주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