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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사이 Jul 10. 2023

K에게

Summer Letter_여름에 쓰는 편지

k 에게.


안녕 k! 생각해 보니 난 네가 여름을 좋아하는지 겨울을 좋아하는지 모르네. 난 여름을 좋아해. 다음에 너를 만나면 물어봐야겠어. 추운 겨울에는 자꾸 우울한 글을 쓰게 돼. 지난겨울이 유독 춥고 우울했어서 그런 건가? 난 여름이 더 좋아졌어.


이번 봄에 우연히 연필 한 자루와 카드 한 장을 선물 받았어. 그 카드에 이렇게 쓰여 있더라고.


'나는 이 계절이 좋아. 싱그럽고 아늑하며 향긋한 나의 계절과 글 한 편의 어울림.'


글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나를 아늑하게 만드는 주변인들이 떠올랐어. 그때 아, 여름엔 주변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어. 이름도 '썸머레터' 라고 지어놓고 말이야. 내가 소중히 쌓아 올린 단단한 관계들에 고마움을 전하면서 이 싱그럽고도 텁텁한 여름을 보내고 싶었어. 그리고 썸머레터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너를 떠올렸지.


너와의 추억은 보통 가을이거나 겨울이더라고. 익숙한 롱패딩을 입고 뽈뽈 거리며 돌아다니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아. 너에게 나는 어떤 기억으로 남았는지도 궁금해진다. 여하튼, 내 편지의 첫 번째 주인공이 된 걸 축하해!

너랑은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일이 있었네. 특별한 에피소드 없이 차분히 흘러간 관계도 있는 반면 우린 여러 번 뜨거웠다 차가웠다 반복한 담금질된(?) 사이인 것 같아.

세상엔 나와 다른 사람도 있다는 것. 그들과 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런 걸 너를 통해 배웠어. 지독히도 달랐지만 같은 부분을 찾으려고 애를 쓰던 때도 있었지.

사랑 같은 우정도 있고, 우정 같은 사랑도 있다고 하잖아. 살면서 그중 하나를 경험해 봤다고 느낄 수 있는 게 어떻게 보면 행운일지도 모르겠어. 너를 생각하면 발을 동동 구르던 날들이 떠올라.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은데 뭐가 맞는지 몰랐어. 어렸을 때는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어 그저 물리적으로 곁에 있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지.


돌아보니 그 시간들은 도움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너에게 의지하기 위해 곁에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어.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나 혼자 판단할 수는 없는 건데 말이야. 하지만 그 마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본능적인 동기가 되지 않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누군가는 나를 살게 하고, 나는 누군가를 살리고 있는 거지.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그럴 거니까, 오늘 하루를 더 소중히 여기자. 그리고 어렸을 때의 상처들은 어리고, 싱그럽고, 아무것도 몰랐으니, 추억으로 잘 포장해 두자.

사람이 너무 잘하고 싶으면 망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 고백해 보자면 난 사실, 진지하고도 유쾌할 수 있는 '친구'의 의미를 너를 통해 깨달았던 것 같아. 친구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도, 친구가 있어서 세상 그 무엇보다 든든하다는 느낌도 네가 처음이었어.

방 한 칸짜리 좁은 자취방에서도 얘깃거리, 볼거리만 있으면 맛있는 것들을 잔뜩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떠들 수 있었던 거. 힘든 일, 기쁜 일, 자랑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고민하지 않고 너와 대화할 수 있었던 거. 시험기간이면 서로의 동네에 번갈아가며 카페란 카페는 모두 다녔던 것도. 스쳐간 인연들, 관심사들, 그걸 다 기억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래서 너에게도 이 충만한 느낌을 똑같이 주고 싶었나 봐. 그렇지만 난 너무 서툴렀어. 지금도 서툴긴 해. 지금의 나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내 자신에게, 그리고 주변인들에게 조금 더 솔직해졌다는 거야. 그래서 서툴다고, 미안하다고, 이해해 달라고 얘기할 수 있어.

한 때는 누구보다 너를 잘 안다고, 위로하는 데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또 한 때는 슬픔은 나누면 두 배가 되는 건가, 싶었던 적도 있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왜 이 친구에게 자꾸 생기는지,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너를 만난 지 10년이 넘어가는 지금,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떠나지 않는 것밖에 없단 사실을 알아. 그리고 그게 제일 힘든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지. 같은 온도와 같은 마음으로 한 자리에 있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래도 난 여전히 서툴러서,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해보겠다고 다짐해. 뜨거운 여름날 찡그린 미간을 풀게 하는 나무 그늘 마냥, 한 번 그 자리에 계속 있어보겠다고.

네가 눈물짓는 날보다 웃는 날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날들에 가끔은 내가 등장하기를. 이 편지를 읽는 모두가 그러하기를.

2023년 7월 우중충하지만 선선한 여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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