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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베르 Jun 05. 2020

예술가곡의 정점에 선 작곡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는 공포와 불안의 찰나를 표현해낸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절규(The scream of nature)’라는 그림이 떠오르는 작곡가가 있다. 허약한 체질과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을 가진 그의 삶은 수많은 실패와 고뇌의 몸부림이었다. 병과 가난을 달고 살았고 성공의 기회가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 같았으나 실체를 맛보지 못했다. 구스타프 말러와 동갑내기이자 빈 음악원 동기였던 19세기 낭만주의 독일 작곡가 후고 볼프(Hugo Wolf, 1860-1903)에 관한 얘기다.     

 

그는 규칙적이고 보수적인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고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15세에 빈 음악원에 입학했으나 여기서도 학교 규정을 위반하고 교장과 충돌하며 2년 후 퇴학을 당한다. 그 후 스물한 살에 잘츠부르크 가극장의 부지휘자 자리를 얻지만 여기서도 1년도 채 머물지 못하고 그만둔다. 1884년부터 1887년까지 저명한 <비엔나 살롱 신문(Wien Salonbratt)>에 평론을 쓰며 음악비평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지만, 신랄한 직설적인 비평과 특히 빈의 존경을 받던 브람스와 빈 필하모닉을 공격한 글로 많은 적이 생겼다. 이것은 후에 작곡 활동에 장애물로 작용하며 그의 곡이 널리 알려질 기회들을 막기도 한다. 이것뿐이 아니다. 무엇보다 원했던 빈 국립 오페라단 지휘자 자리를 빈 음악원 동기인 말러에게 내주게 되고 이 일로 그는 엄청난 자존심의 상처를 입는다. 볼프가 그 자리를 얼마나 원했냐면, 말년에 매독으로 정신 착란을 일으킬 때 국립 오페라단 연습실에 들어가 지휘자 행세를 했었다. 또한, 극장 주역 가수인 헤르만 빙켈만의 집 문을 두드려 “감독으로서 명하니, 내 앞에서 노래하시오.”라고 한 일화도 있다. 평생 숭배했던 작곡가, 바그너처럼 멋진 오페라를 쓰는 것이 그의 꿈이었지만 병약함과 스트레스로 단 두 곡만을 작곡하기에 그쳤다. 그것도 두 번째 오페라는 미완성으로 남았고 유일한 완성작인 오페라 <원님(Der Corregidor)>도 거의 무대에 올려지지 못했다.    

  

실패의 연속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삶에도 열정의 산물이 등장했는데 바로 가곡 작곡이었다. 영감의 광적인 분출이 일어났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집중적인 기간에 내면의 강렬한 감정이 시어를 통해 음악으로 응축됐다. 창작 혼이 불타오를 때는 일주일에 서너 곡 심지어 하루에 두세 곡을 작곡하기도 할 정도로 가곡 작곡에  심취했다. 단 2년 동안 160여 곡을 작곡했고 총 300여 곡의 가곡을 남겼다.

슈만처럼 문학적 조예가 깊었던 볼프는 수준 높은 시를 고르는 안목이 탁월했다. 또한, 한 기간에 한 시인의 작품에 몰두하며 장편 가곡집을 만들었다. 하이네, 아이헨도르프, 뫼리케, 괴테와 같은 독일의 대문호들의 시뿐만이 아니라 독일 시인 파울 폰 하이제가 이탈리아 시를 번안한 것과 엠마누엘 가이벨과 하이제가 번안한 스페인 시, 그리고 이탈리아 유명한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시 등 가곡 작곡을 위해 다양한 시를 선택했다. 또한, 기존 작곡가들이 이미 선택해 작곡한 시는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


볼프는 자신의 가곡을 ‘소리와 피아노를 위한 시들’이라고 표현했다. 시어(Word)와 음(Tone)의 완전한 결합을 추구하는 그의 노력은 숭고한 의식과도 같았다. 그는 늘 시를 읊조리며 산책을 했고 그 시간 동안 시에 담긴 섬세한 감성과 언어의 리듬을 채득 했다. 시어와 음의 결합을 위한 그의 노력은 듣기 편한 선율적인 음악이 아니라 언어의 리듬에 밀착한 낭송조적인 선율이나 급격한 음정 이동으로 돌출하는 듯한 독특한 선율선을 만들었다. 피아노 반주는 잦은 반음계 진행과 강한 불협화음의 사용으로 시어의 정서를 미묘하게 표현하며 심리적인 긴장감을 일으켰다.


그의 가곡 중 음악과 시적 재료의 결합이 가장 잘 되었다고 평가받는  <이탈리안 가곡집(Italienisches Liederbuch)>이 있다. 이 가곡집은 작자 미상의 중세 이탈리아 시들을 독일 시인 하이제가 번역한 시를 사용해 작곡했다. 짧은 가요 형식(Song Form)으로 구성된 46곡의 가곡은 남녀 간의 애정과 사랑, 질투와 갈등이 다양한 분위기의 장면과 어조로 표현된다. 그래서 이 곡은 한 명이 다 부르지 않고 주로 남녀가 주고받으며 노래하거나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테너, 베이스가 오페라 장면을 연출하듯 무대를 꾸미기도 한다. 또한, 더욱 드라마적 흐름과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46곡의 순서를 다양한 조합으로 변경하여 연주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가 창밖에서 세레나데를 부르지만, 엄마의 반대로 침대에서 그 노래를 들으며 흐느낄 수밖에 없는 여인의 눈물, 세상에 가장 좋은 말을 다 넣어도 너를 향한 사랑은 다 표현할 수 없다는 순정남의 고백, 바람피운 애인에게 퍼붓는 독설과 저주, 음악가가 이상형인 한 여자의 기도에 신이 응답한 듯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가까이 다가오는데 후주에서 피아노가 엉망징창 절뚝거리는 바이올린 소리를 묘사하며 자아내는 웃음, 자신의 애인이 여기저기에 10명이나 된다고 떠벌리는 허세 등 46곡의 가곡 모음은 한 편의 오페라처럼 역동적인 장면과 자유로운 감정을 전달한다.   

   

볼프는 리스트가 조언한 것처럼 큰 양식의 곡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존경하는 바그너처럼 장대한 오페라로 성공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오페라 대신 작은 형식의 가곡에 담겼다. 그리고 슈베르트가 표현한 고독과 희망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인간의 심연과 삶에 대한 포괄적 표현으로 가곡의 표현 가능성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때론 관능적으로, 때론 경건하게, 때론 요정이 날아다니는 낭만적 동화로, 때론 지독한 냉소로, 때로는 슬픔이 섞인 아름다움으로 때로는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웃음으로 복합적인 감정이 옅은 안개처럼 그의 가곡에 덮여있다.

볼프의 가곡이 보내는 삶의 낭독은 바쁜 걸음을 멈추고 인생을 잠시 돌아보는 순간을 선사한다.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이 있죠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가치 있을 수 있어요

생각해봐요 우리가 진주로 장식하길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것들은 무척 비싸지만, 역시 아주 작은 것이죠

생각해봐요 올리브 열매는 또 얼마나 작은지

그런데 그 맛에 이끌려 찾게 되잖아요

단지 장미만 떠올려봐도, 그게 얼마나 작은지...

하지만 알다시피 그 향기는 너무나 사랑스럽잖아요     


-볼프의 <이탈리안 가곡집> 중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Auch kleine Dinge)-

                

https://youtu.be/ywzR7qKx6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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