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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하는 팬덤'의 시대

[Cover Image: IG @polo_tokki]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대한 파편적 이해를 가진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아티스트와 소속사가 팬에게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전달하는 일방향 구조라는 것인데요. 하지만 이는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입니다. 어쩌면 애초부터 틀린 개념이었을 수도 있고요.


잘 둔 팬 하나, 대형 소속사 안 부럽다

최근의 팬덤은 때로 아티스트나 소속사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습니다. 소속사의 소극적인 마케팅으로 그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아티스트도, “금손” 팬의 손을 거쳐 오히려 소속사가 공격적 마케팅을 펼칠 때보다 더욱 톡톡한 홍보 효과를 보는 경우가 생겼죠. 오늘은 이처럼 ‘생산하는 팬덤’의 활약으로 아티스트의 인지도를 확장시킨 대표적인 사례 3가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더 글로리> 최혜정 역을 연기한 차주영 배우


1. 아티스트는 팬의 시선으로 볼 때 가장 사랑스럽다 — 배우 차주영 X 꾸꾸


사극 드라마 촬영장에서 팬덤 ‘꾸꾸’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차주영 배우의 쇼츠, 한 번쯤 본 적 있지 않으신가요? 그녀는 2023년 초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넷플릭스의 문제작 <더 글로리>에서 최혜정 역을 맡으며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는데요. 드라마에서 불량하고 욕설에 능한 ‘일진’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했던 그녀가, 쇼츠에서는 우아한 한복 차림과 격조 있는 말투로 팬들의 “자금 조달”과 “살림 정돈” 여부를 걱정하는 귀여운 반전 매력을 발산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출처 '차주영붐은온다' 인스타그램 (@ahopmal)


해당 쇼츠를 게재한 유튜브 ‘차주영붐은온다’ 채널의 댓글에는 “아이돌도 아닌 배우가 팬들과 친구처럼 소통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등 팬들과의 소통 기회가 적은 배우들은 좀처럼 받아보기 힘든 인간적 호감이 담긴 반응들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해당 채널 구독자 수가 19만 명을 돌파해 실버 버튼을 받게 되었고, 계정주는 이를 다시 차주영 배우에게 선물하며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순덕’ 팬심을 증명했습니다.



출처 르세라핌 공식 유튜브
출처 보이넥스트도어 공식 유튜브


많은 소속사가 비하인드 콘텐츠 등을 활용해 아티스트의 인성 영업을 시도하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소속사의 주도 하에 공식적으로 기획된 콘텐츠는 아무리 자연스럽게 포장해도 인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죠. 차주영 배우가 지금과 같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영상이 가공된 비하인드가 아니라 “진짜” 비하인드였기 때문이며, 이는 소속사가 아닌 팬의 순수한 시선으로 담아낸 덕분입니다.


따라서 소속사는 아티스트와 팬 사이의 소통을 무작정 제한하기보다, 적절한 선을 유지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팬에게 전해진 진심은 더 깊은 애정과 충성으로 돌아올 뿐만 아니라, 신규 팬덤 유입을 통해 아티스트의 지속적인 성장을 뒷받침하는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가장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출처 SMTOWN &STORE / 캐릿


2. 소속사는 판만 깔아라, 노는 건 팬들이 할 테니 — 라이즈 소희 X 똘병단


이름부터 비주얼까지 무엇 하나 범상한 구석이 없는 이 인형, ‘똘병이’는 SM의 보이그룹 라이즈(RIIZE) 소희를 모델로 작년 밸런타인데이에 출시된 MD입니다. SM엔터테인먼트에게 캐릭터 마케팅은 이미 보편화된 전략이지만, 똘병이만한 범(汎)팬덤 규모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사례는 이례적입니다. 현재 똘병이의 인기는 케이팝 팬덤을 넘어 ‘듀..가나디’, ‘먼작귀’ 등과 함께 ‘Z세대 인기 캐릭터’ 라인업에 묶일 정도이며, 이러한 똘병이의 “미친 스타성”에 힘입어 “똘병 아빠“ 소희의 대중 인지도 역시 함께 상승세를 타고 있죠.



출처 X @Dolyeoja
출처 X @ddolzzal


‘똘병이’가 이만큼의 화제성을 지닐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개성 넘치는 비주얼을 재료로 확산된 팬덤의 놀이 문화가 있습니다. MD 출시 초기, 라이즈의 팬덤 브리즈(BRIIZE)는 각자 배송받은 ‘똘병이’의 모습을 SNS로 공유하며 “미남 똘병이 당첨”, “똘병이 경락 팁 공유” 같은 바이럴 트렌드를 형성했습니다. 또한 새침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만만해 보이는 눈빛, 소희의 풍성한 머리숱을 표현한 병정 모자로 인해 짤막해진 비율 등에서 “하찮은 듯 자꾸만 신경 쓰이는” 캐릭터성을 발견한 팬들은 똘병이를 활용한 각종 짤과 밈을 쏟아냈습니다.



출처 라이즈 공식 X


SM엔터테인먼트는 똘병이를 둘러싼 이 같은 흐름을 발 빠르게 포착해, 오는 4월 <RIIZE PARK> 팝업스토어에서 판매할 신규 MD로 다른 인형들과 달리 혼자 머리가 길어진 버전의 똘병이 출시를 예고했습니다. 팬덤의 놀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이 전략은, 성공적인 팬 마케팅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판을 잘 깔아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합니다.


팬덤, 특히 케이팝 팬덤은 그야말로 “놀 줄 아는 집단”입니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카페를 대관하고 이벤트를 기획해 ‘생일 카페’ 문화를 만들어냈으며, 좋아하는 아이돌의 인형을 직접 제작해 판매하는 것은 물론, 인형 전문 옷가게와 수선집까지 등장시켰습니다. ‘노는 행위’ 자체로 새로운 문화 현상을 만들고, 적지 않은 경제 효과까지 창출하는 신흥 크리에이터 집단. 이러한 팬덤의 역량을 이해하고, 그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는 소속사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에스파 팬튜브 '광야쿵야' / NCT 127 팬튜브 '우리칠클럽'


3. 팬들의 놀이터이자 머글의 입덕 관문, SNS 기반 팬계정의 부상


예로부터 팬들은 아티스트의 IP를 기반으로 팬픽, 팬아트 등의 2차 창작물을 만들며 자신들만의 ‘즐길거리’를 자급자족해 왔는데요. 최근에는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개인 SNS를 활용한 ‘팬계정(팬스타그램, 팬튜브 등)’이 부상하며 팬메이드 콘텐츠의 새로운 지형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NCT 127의 팬튜브 ‘우리칠클럽’은 2022년 12월 개설되어 현재 구독자 9.4만 명, 누적 조회수 2억 회를 돌파했습니다. 특히 2천4백만 뷰의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마크] 반사신경 레전드 아이돌’ 쇼츠는 팬덤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까지 확산되며 “타팬인데 이 영상은 볼 때마다 안 넘기고 끝까지 본다”, “야구를 했어야 할 인재다” 등의 뜨거운 반응을 자아냈습니다.



뉴진스 팬아트 (출처 인스타그램 @polo_tokki)


팬계정의 부상이 기존 팬메이드 콘텐츠의 확산 양상과 차별화되는 지점은 바로 접근성입니다. 개인 SNS가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절, 팬픽과 팬아트 등의 수요는 주로 팬덤 내부에서 형성되었으며, 작가의 팔로워 위주로 콘텐츠가 유통되어 다소 폐쇄적인 형태를 띠었는데요. 이에 반해 최근의 팬계정은 SNS 플랫폼의 무작위적인 알고리즘 시스템을 통해 비(非)팬덤 청중에게도 자연스럽게 노출되며, 보다 개방적인 환경에서 ‘머글(특정 팬덤에 속하지 않은 대중)’들의 자연스러운 유입과 참여를 돕습니다.


결국 아티스트의 매력 포인트를 가장 잘 포착하고, 그러한 매력이 돋보이도록 가장 잘 포장할 수 있는 사람은 팬들입니다. 팬계정이 아티스트의 대중성을 높이고 신규 팬덤 유입을 이끄는 효과적인 확산 채널로 자리 잡은 만큼, 소속사 역시 이를 주요하게 모니터링하며 아티스트의 홍보 방향과 향후 활동 전략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YG 엔터테인먼트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의 팬덤은 단순한 소비자의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직접 유무형의 콘텐츠를 만들어내며 아티스트의 인지도와 가능성을 확장하는 능동적 주체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들이 생산하는 콘텐츠는 단순한 지지의 의미와 효과 이상으로 아티스트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동시대의 문화적 흐름을 주도하는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이제 소속사는 팬덤이 보유한 창의적 생산 및 확산 능력을 전략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팬덤의 자발적 움직임을 어떻게 지원하고 조율하느냐에 따라, 아티스트의 성장 및 지속 가능성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죠.


아티스트와 팬, 소속사가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 환경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생산하는 팬덤’의 시대를 이해하고 존중할 때, 엔터테인먼트 산업 발전의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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